85화 상상을 뛰어넘는 행동
이름 짓는 꼬라지 하고는! 그저 우습기만 했다.
그동안 머리에 뼈가 튀어나온 백마를 찾았겠지. 찾아서 이렇게 둔갑시킨 거고. 웃기고 있
네. 그 백마는 아주 안전한 곳에 잘 갇혀 있다. 자신의 말 신수 안에. 게다가 이 백마는 그
놈의 말이 절대 아니다. 다른 사람은 절대 태우지 않고 그놈만 태우는 성질 더러운 백마라
소문이 났는데 이렇게 자신이 쓰다듬고 있는데도 가만히 있다. 하! 누굴 속이려고.
인사를 하고 마구간지기가 떠나자 이 넓은 곳에 사람 하나 없었다. 모두 출정식이 끝나 뒷
정리를 하러 간 모양이었다. 그러게 뭐 하러 그리 요란하게 하고 난리야.
윽.
뜨거운 용암 덩어리 같은 것이 갑자기 배 속에 모이기 시작했다. 조짐이다. 잘됐다. 오래간
만에 신수가 나오는 것이라 쿠로는 기대에 부풀어 있었다.
그의 등 쪽에서 말 신수가 드디어 튀어나왔다.
에?
여전히 작았다. 기대에 못 미치는 제 신수 때문에 쿠로의 미간이 확 구겨졌다.
“야! 이것도 집어삼켜!”
그의 명령에도 말 신수는 가만히 있었다. 공중으로 뛰어다니는 것도 아니고 그냥 가만히
서 있었다. 무언가를 찾아 두리번거리는 것처럼 고개를 자꾸 좌우로 움직였다.
“얼른 삼키라니까. 그래야 더 커지지!”
아무도 없겠다 지금이 기회인데 가만히 굳은 듯 서 있기만 하는 말 신수가 답답해 환장할
것 같았다.
***
칼리크는 사기가 하늘을 찌르는 자신의 군대를 이끌고 당당하게 행진하고 있었다.
그런데.
지금 제 신수가 나오려고 했다. 아니 나오려고 허락을 구하고 있었다. 투명하게 나오는 거
라면 상관없었다. 바로 허락했다.
그의 몸에서 쑤욱 빠져나온 호랑이 신수가 아무도 모르게 어디론가 휙 사라졌다.
호랑이 신수의 목적을 알게 되자 그는 행진하는 가운데 피식, 웃음을 지었다.
***
“저기 또 있어. 벨롱인지 메롱인지 하는 저것도 같이 삼켜. 어서!”
쿠로는 눈을 부라리며 자신의 신수에게 사납게 명령했다. 하지만 주인의 말인데도 들은 척
도 안 하고 말 신수는 가만히 서 있기만 했다. 가만히 보니 좀 떠는 것도 같은데. 그럴 이유
가 없어 어디가 안 좋은가 살짝 의심이 들었다.
“야! 너… 왜 그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언젠가 보았던 것처럼 말 신수가 그 자리에서 펄쩍펄쩍 뛰기 시작
했다. 그때는 멀리서 봐서 지랄발광을 하는 줄 알았는데 가까이서 보니 그게 아니라 경기
를 하는 것 같았다. 말의 갈기부터 등 쪽의 털들이 다 곤두서 있었다. 머리를 좌우로 마구
휘두르면서 히이잉, 앓는 소리까지 냈다.
쿠로는 제 신수가 걱정이 되어 한 발 다가갔다. 그런데 말 신수가 먼저 자신에게로 마구 달
려왔다. 실물이었으면 그대로 말에 받힐 상황이었다. 바짝 다가온 말 신수의 눈이 얼어 있
었다. 겁에 질려 있었다.
대체… 왜… 더 이상 아무 생각도 못 할 정도로 빠르게 그를 스쳐 쏜살같이 그의 등 뒤로 사
라져 버린 말 신수가 기가 막혔다. 지금 뭐 하는 거야? 이제야 겨우 나타나더니 바로 사라
져? 지금이 어떤 기회인데 저 두 백마를 삼키지도 않고. 이러니 내가 미친다.
쿠로는 열이 있는 대로 받아 눈앞에 있는 백마 두 마리를 잡아먹을 듯 노려보았다. 자신의
말 신수가 집어삼키지 않고 그대로 둔 백마들이 그냥 꼴 보기 싫었다.
윽.
배 속이 싸해지면서 속이 안 좋아졌다. 그대로 느껴졌다. 제 안에 들어간 말 신수가 바들바
들 떨고 있다는 게 진동으로 다 느껴졌다.
일단 진정시켜야 했다. 아무것도 없는데 도대체 왜 이러는 건지. 손으로 자신의 배를 쓸어
주며 눈으로는 사방팔방 주위를 살폈다. 그냥 평온한 풍경밖에는 보이지 않았다. 뭘 잘못
먹었나. 금방 들어갔으니 다른 걸 삼킬 시간도 없었을 텐데, 이해가 되지 않는 상황이었다.
속이 계속 거북해져 쿠로는 할 수 없이 그 자리를 벗어나기 시작했다. 마차를 오래 탔을 때
느끼는 메슥거림까지 있었다. 어서 저택으로 돌아가 좀 쉬어야겠다.
돌아서서 걸어가는 그의 뒤로 커다란 황금빛 눈동자 두 개가 번쩍 나타났다 사라졌다. 그
런 줄도 모르는 쿠로는 비틀거리는 발걸음으로 황궁을 빠져나가고 있었다.
***
벨리타는 점점 사라지고 있는 군대 행렬을 창밖으로 바라보고 서 있었다. 지금 이곳은 제
방이 아니라 칼리크 방이다. 그의 방은 황궁 입구와 그 밖까지 멀리 가장 잘 보이는 곳이
다. 그래서 이리로 올라왔다.
그런데.
갑자기 열린 창문으로 다소 강한 바람이 불어와 그녀의 얼굴에 닿았다. 날씨가 구름 한 점
없이 맑은데….
어?
3층에서 바라보는 허공에 커다란 두 눈동자가 끔뻑거렸다. 아. 놀라라. 호랑이 신수였다.
반가운 마음에 손을 올려 흔들어 주었다. 투명한 상태라 더 신기했다. 하지만 두 눈동자만
으로도 알아보았다. 그 주인과 똑 닮은 눈동자였다.
찡긋.
호랑이 신수가 한쪽 눈만 감으며 윙크를 했다. 짓궂은 면도 있네. 그녀는 환하게 웃으며 계
속 호랑이 신수에게 손을 흔들어 주었다. 호랑이 신수는 다시 황궁 밖으로 번개같이 사라
졌다.
오래간만에 그녀의 얼굴에 피어오른 미소가 잠시 머물렀다.
***
행진 중인 칼리크는 제 신수가 돌아온 걸 느꼈다. 스스로 알아서 잘 처리하고 돌아왔다. 이
제 쿠로의 말 신수는 쉽사리 밖으로 나오지 못할 것이다. 호랑이 신수가 무서워서 쿠로 안
에만 머무르려 할 것이다. 제대로 겁을 주고 온 모양이었다.
입술에 슬쩍 미소가 걸렸다가 사라졌다. 벨리타까지 만나고 온 것에 대한 미소였다. 주인
마음을 너무 잘 아는 자신의 신수에게 고마움을 전했다.
칼리크는 광활한 들판에 자신의 군대 40만을 집결시킨 뒤, 커다란 함성을 지르며 다시 유
클로 왕국 국경선을 향해 위엄 있게 진군하기 시작했다. 검은 군복을 입은 수많은 군사들
의 행렬은 실로 장관이었다.
***
며칠 동안 진군한 칼리크 군단이 드디어 국경을 넘었다.
빠르게 진군하면 협곡까지 또 며칠이면 다다른다. 하지만 천천히 진군할 것이다. 지금 안
톤과 60만 대군은 오아시스를 지나 유클로 왕국으로 향하고 있을 것이다.
그 시간을 맞춰야 한다. 천천히 진군해서 협곡 앞에 머물 예정이다. 유클로 쪽에서는 더디
게 다가오는 우리 때문에 환장할 것이고 불안과 혼란은 더 가중될 것이다.
거기에 협곡 앞에서는 적들의 상상을 뛰어넘는 행동을 할 것이다. 그렇게 주의를 끌면 그
들은 또 영문을 몰라 팔딱팔딱 뛸 것이다.
그런 상태에서 본토가 공격받고 있다는 소식을 듣게 되면 군사들을 다시 배치하느라 우왕
좌왕할 것이 뻔할 일. 유클로 왕이 고군분투해 보았자 이미 막을 수 없다. 그 후에 함락은
시간문제다.
호랑이 신수는 계속해서 전방을 먼저 둘러보고 그에게 보고하고 있었다. 혹시라도 매복하
고 있는 적군이 있는지 없는지 그걸 먼저 탐색하는 역할을 아주 톡톡히 잘 해내고 있었다.
40만 대군이 알아채지 못하게 투명한 모습으로 제 역할을 충실히 해내는 호랑이 신수 덕
에 칼리크의 기세는 누구보다 드높았다. 신수가 발현된 황제는 천하무적이 된다는 말을 실
감했다.
황제의 너무나 당당하고 엄청난 카리스마를 뿜어내는 모습에 군대들의 사기 또한 하늘을
찔렀다.
***
벨리타는 오늘도 황궁 안을 산책하고 있었다.
요즘 들어 산책을 유난히 많이 하신다. 시간도 점점 길어지고 있다.
“마마. 여기라도 잠시 앉으십시오.”
따라다니는 시녀들이 테이블과 의자를 정원수 아래 준비해 놓고는 그쪽으로 안내했다. 회
복된 지 얼마 안 된 황후가 걱정되어 휴식처를 마련한 것이다.
벨리타는 그들 말에 따랐다. 다 같이 잠시 쉬는 것도 괜찮을 것 같았다.
유모는 손 빠르게 그녀가 가장 좋아하는 차가운 홍차를 유리잔에 하나 가득 담아 건네주
었다. 유리잔에 얼음이 동동 떠 있는 것이 보기만 해도 속이 다 시원해졌다.
“마마….”
조금 떨어진 곳에서 펠론국 대사로 온 사람이 그녀를 불렀다. 모국에서 온 대사인데 당연
하게도 그녀는 모르는 사람이었다.
이런 일이 한두 번이 아니니 별로 크게 긴장하지도 않았다. 그래도 눈살이 찌푸려지는 건
막을 수 없었다. 낯선 남자와 부딪히면 워낙 안 좋았던 기억밖에 없으니 당연한 것이었다.
출정식이 끝나고 며칠이 지났는데 아직도 돌아가지 않았다니 뭔가 께름칙했다.
시녀들이 물러나고 그 대사가 그녀의 맞은편에 앉았다.
“그간 잘 지내셨는지요?”
아직은 별다른 낌새가 느껴지지 않는 공손한 말투였다.
“덕분에요.”
대사는 다정한 오빠 같은 미소를 지으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래도 아직은 안심하기엔 이
르다.
“국왕 전하 내외분께서 주신 서신을 전해 드립니다.”
행동도 공손했다. 두 손으로 긴 편지 봉투를 전했다. 그것을 받아 든 벨리타는 조심스럽게
봉투를 개봉했다. 자신은 모르는 분들이지만 이 몸의 부모님이다. 원작에서는 딸의 죽음
때문에 로카 왕국과 손잡고 카르탄 제국과 전쟁을 일으키는 인물이었다.
[내 사랑하는 벨리타에게. 건강하게 잘 지내고 있느냐? 무소식이 희소식이라 여기며…….]
편지만 읽어도 얼마나 딸을 사랑하는지 그 아버지의 마음이 절절히 느껴졌다. 너그럽고 인
자하신 모습이 절로 떠올랐다.
[내 딸 벨리타에게. 최근에는 사고를 치지 않는 것 같아 요즘 두 다리 뻗고 잘 자고 있다…
….]
어머니의 편지는 읽기 시작하자마자 혼나는 느낌이 들었다. 어머니 쪽이 더 무섭게 느껴졌
다.
[……요즘 유모도 소식을 뜸하게 전하고. 너는 아예 감감무소식이고. 내가 한번 그리로 가야
정신을 차리려나…….]
벨리타의 고개가 살짝 기울어졌다. 상상하던 모습과는 전혀 딴판이었다.
[……넌 사고만 안 치고 얌전히 지내면 황후로서 흠잡을 데가 없단다. 그러니 명심해라. 남
자 밝히지 마라. 내가 어떻게 이런 딸을 낳았는지 원통한 눈물을 흘리는 것도 이젠 끝내고
싶단다. 지금처럼만 해 다오. 명심하리라 믿는다. 사고 치지 말아라.]
어휴. 어머니까지 이런 심려를 하게 만들다니.
누가 볼까 봐 얼른 편지를 봉투에 쏙 집어넣었다.
“마마. 이제 황후궁으로 드시지요.”
그 느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