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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군에게 찍힌 민폐 황후 입니다-84화 (84/130)

84화 보여 줄 게 있소

우웩!

바로 뱉어 내며 마마님 앞에서 추태를 보였다. 눈물이 다 나올 정도로 독했다. 이런 걸… 어

떻게 마마님은….

“재…성…합니다….”

혀가 뻣뻣해져 말도 제대로 나오지 않는다. 죄송합니다.

마마님에게 속은 건 아니지만 이런 독극물을 한 잔 더 달라고 하신 것이 이해되지 않았다.

폐하도 마마님도 다 이해가 되지 않았다.

입맛이 달라지진 않으셨을 텐데.

이상하다….

이런 홍차는 사양이다. 이런 홍차를 타 주는 남자를 만난다면 그날로 끝이다. 그러니 보좌

관에게는 절대로 홍차 같은 건 타지 말라고 해야겠다.

홍차는 유모의 자존심이었다. 최고라 자부할 정도로 잘 타는 유모였다.

벨리타는 홍차 잔을 들고 창가로 다가갔다. 시원한 바람이 분다. 저 멀리 황제궁이 선명하

게 보인다. 그 사이에 놓인 넓은 궁정도, 반짝이는 호숫가도 한눈에 내려다보인다. 너무나

평화롭게 보이는 정경이었다. 곧 전쟁을 앞두고 있지만.

벨리타는 홍차 잔을 들어 음미하듯이 목을 축였다.

***

“벨리타. 오늘까지만 오고 좀 쉬어야 할 것 같은데 그래도 될까?”

그가 다음 날 와서는 그렇게 말을 했다. 당연히 출정이 코앞으로 다가왔으니 여기 올 수 없

을 것이다. 그런데 끝까지 이야기를 안 한다.

“그러시든가요.”

아무 걱정 없이 있게 배려해 주려고 그러나 본데 오히려 기분이 가라앉았다.

“벨리타. 내가 당신에게 보여 줄 게 있소.”

뭘 또 가져왔나 싶었다. 작은 건가? 호주머니에 넣을 만한 작은 것인가 보다. 그의 주변에

물건 같은 건 전혀 보이지 않았다.

“당신이 확인을 해 줘야 하오.”

그녀는 소파에 앉아 궁금한 눈빛을 그에게 던졌다.

그가 그녀의 시선을 잠시 잡고 있더니 갑자기 한 손을 뻗어 올렸다.

화악.

아니!

벨리타는 앉아 있지 않았으면 뒤로 넘어갈 뻔했다. 순식간에 나타난 어마어마한 호랑이를

보고 숨이 다 막혔다.

이…것이… 그러니까….

천장까지 닿을 정도로 둥둥 떠 있는 거대한 호랑이를 믿기지 않는 눈으로 바라보며 벌어

진 입을 다물지 못했다. 아니 입을 벌리고 있다는 것도 알지 못했다.

신수다.

그렇다면!

“그때 보았다던 호랑이가 이게 맞소?”

맞아요. 그때 보았던 그 호랑이.

칼리크는 그녀의 반응에 흡족했다. 출정하면 이 사실이 세상에 알려질 터. 그 전에 벨리타

한테 직접 보여 주고 싶었다. 신수마저도 당신의 공이 컸다는 걸 알려 주고 싶었다. 잠시

분노와 의심으로 못 전했던 그 고마움을 전하고 싶었다. 게다가 이젠 소리 내어 부르지 않

아도 마음대로 호랑이 신수를 불러낼 수 있게 되었다.

“신수가… 발현되었네요?”

그녀의 목소리가 떨렸다. 눈은 사납게 보이는 호랑이의 얼굴에 못 박혀 있었지만 무섭진

않았다. 감격으로 떨릴 뿐이었다.

이 신수가 발현되었다는 건. 앞으로의 미래가 원작대로 흘러가지 않는다는 말이다.

이젠 모든 것이 다 갖추어졌다.

거대한 톱니바퀴가 그녀가 원하는 대로 돌아가고 있다.

“만…져 봐도 되나요?”

그녀가 얼마나 감격스러워하는지 뿌듯한 마음으로 지켜보던 칼리크는 그녀의 손을 잡고

호랑이 신수에게 다가갔다.

처음으로 만져 본 호랑이의 감촉에 벨리타는 팔에 소름이 다 돋았다. 기쁨이 온몸을 타고

돌았다.

대단했다. 어마어마했다.

하염없이 호랑이 배 부분을 쓰다듬어 주었다. 엄청난 힘이 느껴졌다. 이런 호랑이가 우리

편이라니 그것이 너무나 고마웠다.

“너무 믿음직스럽네요. 누구하고는 달리.”

그녀가 신수를 좋아해 줘서 좋은데 한편으로 마냥 씁쓸해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이게 다 당신 덕이요. 고맙소.”

이제야 말로나마 고마움을 전했다. 더 빨리 전하지 못한 것이 후회스러웠다.

“그런데도 탑에 보내 정말 미안하오. 내 평생 사죄하며 살겠소.”

아무 대답 없이 벨리타는 계속 호랑이만 경건한 손길로 쓰다듬고 있었다.

칼리크는 신수를 좋아해 주는 벨리타의 모습을 눈에 담았다. 멀리 떠나기에 앞서 그녀의

모습을 새기듯이 바라보기만 했다.

***

드디어 출정하는 날의 아침이 밝았다. 3일 전 이미 대군단이 안톤과 함께 비밀리에 먼저

사막으로 떠났다. 대외적으로 보여 주기 위해 그는 낮에 출발하고 유클로 왕국 국경에 다

다르면 이쪽으로만 관심이 쏠리도록 요란하게 진군할 것이다. 협곡 바로 앞까지만.

칼리크는 온천탕에서 경건하게 몸을 깨끗이 하고는 출정복을 입기 위해 제 방으로 올라갔

다. 시종장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공손히 예를 갖추는 시종장 앞에 그가 팔을 벌리고 누구보다 강한 모습으로 우뚝 섰다. 시

종장의 도움을 받으며 옷을 갖춰 입는 그의 모습은 누구도 따라올 수 없는 절대자의 모습

이었다.

준비를 마친 그는 시종장이 열어 준 문으로 장엄하게 걸어 나갔다.

그러나 바로 우뚝 멈추어 버렸다. 바로 눈앞에….

벨리타가 너무나 완벽한 모습으로 제 앞에 서 있었다. 놀라움과 반가움, 고마움까지 더해

그를 가슴 벅차게 만들었다.

벨리타….

칼리크는 감격에 겨운 발걸음으로 다가가 그녀를 힘껏 끌어안았다. 이렇게 나와 줄 줄은

기대도 하지 않았다.

“누가 맘대로 안으라 했나요?”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자신을 밀어내지는 않았다. 이것만으로도 큰 선물이었다.

“벨리타… 고맙소.”

“잘 다녀오세요.”

비록 그녀의 말투는 형식적이었지만, 그것만으로도 그의 눈빛이 강렬하게 번쩍거렸다.

귓가에 속삭이듯 들리는 그녀의 말이 여신에게서 은총을 받는 듯 격한 감정을 불러일으켰

다. 반드시 돌아와 그다음을 이어 나갈 것이다. 모든 근육에 힘이 절로 들어갔다.

칼리크는 그녀의 얼굴을 경배하는 마음으로 내려다보았다. 신에게 감사드린다. 이런 벨리

타가 자신의 아내라는 것을.

“물론이오.”

칼리크는 손을 올려 그녀의 얼굴을 가만가만 쓰다듬어 보았다. 떨어져 있는 동안 이 느낌

과 이 순간을 계속 간직할 것이다.

이제 가야 한다.

의기충천한 칼리크는 그녀에게 감사의 눈인사를 하고는 자신을 모시러 온 기사단을 향해

돌아섰다.

***

쿠로는 거창한 출정식에 참가하면서 속으로 한없이 비웃었다. 그 넓은 연무장에 가득 들어

찬 군대를 보며 배알이 꼴렸다. 많다. 게다가 여기 있는 군대들은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합류지인 광활한 들판에 더 많은 군대가 집결해 있다. 여기 있는 군대는 도심 대로를 행진

할 일부만 모여 있는 것이다.

이것이 힘이다. 황제의 힘.

군대의 수만 헤아리면 절대 누구도 덤비지 못한다. 뭔 꿍꿍이인지는 몰라도 군단을 나눠

출병하기까지 했다.

하지만 사막이나 유클로 왕국이 호락호락하지는 않을 것이다. 환각의 사막에서 헤매다 떼

죽음을 당할 것이고 죽음의 협곡에서 전멸하고 돌아올 것이 안 봐도 뻔한 일. 그때는 자신

에게 승산이 있다.

불가능한 일이지만 혹, 어찌어찌 간신히 이긴다 해도 다 죽고 그나마 남은 군사들도 지쳐

빠져 있을 터. 그 틈에 자신과 에무르가 움직이면 최후의 승자는 자신이 될 것이다. 그러

니.

그렇게 그 자리에서 으스대는 건 이게 끝이다, 이놈아.

안 그래도 언제 출정하나 손꼽아 기다렸는데 드디어 떠난다. 이미 에무르 쪽은 준비를 시

작했고 두 달 후면 수백 척의 군선이 출항 준비를 마친다. 그 이후로는 승승장구로 이어질

것이다. 이제 시작되었다.

다 좋은데 이놈의 출정식은 뭐가 이리 긴지.

맨날 전쟁에 미쳐서 이런 출정식을 도대체 몇 번이나 하는지 모르겠다. 징글징글했다. 우

렁찬 함성을 지르는 수많은 군사들이 아니꼬웠다. 자신에게는 위협적인 소리였다. 하지만

불쌍하게 여기기로 했다. 얼마 안 있어 죽을 목숨들이었다. 너그러워지자.

이 자리에 펠론국 국왕 내외를 대신해 대사까지 와 있었다. 다른 나라에서도 고위 귀족들

이 와 있지만 유독 저놈만은 거슬렸다.

벨리타와 친분이 대단한 자였다. 어렸을 때부터 알고 지낸 사이라 하는데 그동안 뜸하더니

오늘 다시 보게 되었다. 그냥 보고만 있어도 기분 나빠지는 유형이었다. 지금도 저 멀리 떨

어져 앉아 있는 벨리타를 슬쩍슬쩍 쳐다보고 있다. 내 눈을 속일 수 없지.

어찌 되었건 이들은 나중에 자신이 황제가 되면 영접하러 올 대사들이다. 어떤 인사말을

준비해야 잘 어울릴까 이런 생각을 하며 지루하고 지루한 출정식을 견뎌 내기 위해 용을

썼다.

벨리타 역시 저 혼자 고고하게 앉아 있는 모양새가 거슬렸다. 이쪽은 단 한 번도 쳐다보지

않은 채 정면만 응시하는 저 시선이 제일 거슬렸다. 자신이 황제가 되는 순간 저 재수 없는

얼굴을 보지 않아도 된다. 간간이 칼리크의 시선이 벨리타에게 닿는 것을 보고 있자니 역

겹기까지 했다. 꼴값하고 있네.

이 모든 걸 한자리에서 지켜보고 있는 것이 고문에 가까웠다.

드디어. 억지로 참고 인내했던 출정식이 끝나고 함성을 지르며 군단이 행진하기 시작했다.

겨우 그들이 황궁을 다 빠져나가고 나자 조용해진 황궁에서 다시 저 혼자만 희열을 만끽

하기 시작했다.

여기저기 남다른 심정으로 둘러보던 그는 황제의 마구간으로 발길을 돌렸다. 이상하게 이

곳이 신경이 쓰였다. 뭔가가 계속 찜찜했다. 계속 자신의 신수가 나오지 않는 것도 이상했

다.

“이것이 되찾았다는 그 백마인가?”

마구간지기에게 쿠로는 단도직입적으로 물어보았다. 이럴 때 그의 목소리는 근엄함 그 자

체였다. 마구간지기는 제2 대공에게 깍듯이 고개를 숙이고는 대답했다.

“맞습니다. 대공님.”

흐음….

제 눈에는 그냥 그런 백마처럼 보였다. 다른 특징이 있는 것도 아니라면 제 생각대로 아무

백마나 데리고 와서 속여도 무방했다.

“확실한 증거가 있는가? 다른 백마와 별다를 바 없는 것 같은데.”

“있습니다. 이 백마는 유니콘의 후예라는 말이 있듯이 이마를 만져 보면 약간 튀어나온 뼈

가 있습니다. 뿔이 되려다 만 흔적이라고 합니다.”

아주 신화를 만들어라.

비아냥거리면서도 쿠로는 그 백마의 이마께를 만져 보았다. 이마를 덮고 있는 털을 젖히고

만져 보니 정말 둥글게 튀어나온 뼈가 있었다. 원래 이렇게 태어나는 종류가 있는 거겠지.

거기에 이야기를 만들어 낸 것이고. 유니콘 좋아하네.

“이 백마의 새끼인 벨롱 역시 이마에 뿔 흔적이 있습니다.”

“벨롱?”

저쪽에 이보다 조금 작은 백마가 하나 더 있었다.

“이름입니다.”

하!

하마터면 마구간지기 앞에서 실소를 터트릴 뻔했다. 간신히 참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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