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3화 십년감수했다
방 안에는 이미 커다란 정리 상자들이 여러 개 놓여 있었다. 벨리타가 손으로 가리키면 시
녀들이 그 드레스를 내려 상자에 곱게 접어 집어넣는 순서로 일이 진행되었다.
유모는 다른 곳에 있다가 마마님에게 가는 도중 중간에 보좌관을 만났다. 왜 이렇게 바삐
서두르냐고 묻길래 유모는 마마님이 드레스를 상자에 넣고 있다 말했다. 어서 가서 도와드
려야 한다고. 별생각 없이 그렇게만 말하고는 뛰어갔다.
뒤에 남은 보좌관은 그 말을 듣고는 급히 폐하에게 뛰어가 들은 대로, 아니 자신이 해석한
대로 고했다.
***
칼리크는 벨리타의 말에 어리둥절해 잠시 머릿속이 텅 비어 버렸다. 갑작스러운 상황이 전
개되는 바람에 바로 이해가 되지 않았다. 자기 감정이 너무 컸던 건지 오히려 그녀의 말을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드레스 기부… 기부….
칼리크의 두 눈은 힘 빠진 호랑이 눈동자처럼 자꾸 껌뻑대기만 했다.
그의 손이 뒤통수로 올라갔다. 어색하게 몇 번 긁어 대기만 하다가 제자리로 내려왔다. 그
리곤 그저 허허 웃어 버렸다. 지금 서로 다른 대화를 하고 있었다는 걸 알아차리자 안도감
과 함께 민망함까지 따라왔다.
“괜한… 참견을 해서 미안하오. 어서 마저 하시오.”
뻣뻣한 걸음걸이로 그곳을 빠져나온 칼리크는 헛웃음이 자꾸 새어 나왔다. 보좌관이 큰일
하나 터트렸다. 그 말만 믿고 뛰어와 이런 촌극을 벌인 자신이 더 우스웠고.
그래도 다행이었다. 정말 십년감수했다. 눈앞이 캄캄했다. 그러니 보좌관이 이상한 보고를
올린 건 그냥 넘어가기로 했다. 또다시 거론하는 건 우스꽝스러울 뿐이다. 다만 벨리타가
정확히 알아차리지 못했기만을 바랐다.
해프닝으로 끝난 일이었지만 그는 가슴을 쓸어내리며 다시 돌아가고 있었다.
방에서 작업을 재개하던 벨리타는 여전히 칼리크가 이해되지 않았다. 저럴 거였으면 왜 온
건지. 아무리 생각해 봐도 바보 같은 행동이었다. 혹시… 이런 식으로 한 번 더 만나러 온
건 아닐까? 출정을 앞두고 저래도 되는 건가?
머릿속이 더 복잡해질 것 같았다. 그녀는 고개를 저으며 그 생각을 밀어 버리고는 다시 드
레스 룸 정리에 집중했다.
***
다음 날, 칼리크는 다른 계획을 짰다. 더 성의 있는 일을 해야겠다. 벨리타가 지루해져서
정말로 짐을 싸는 일이 없게 더 노력해야 한다. 어제의 일 또한 만회해야 한다.
굳은 결심을 한 칼리크는 어디론가 바삐 걸어갔다. 그리고는 한참 만에 뭔가를 들고 다시
벨리타의 방으로 올라갔다.
“벨리타.”
또 왔다.
어김없이 또 칼리크가 찾아왔다. 출정이 다가오고 있는데도 계속 이러니 오늘은 왠지 마음
이 불편했다. 그래도 어제보다는 훨씬 정상으로 보였다.
탁.
이번엔 그가 탁자 위에 티 세트를 내려놓았다. 이걸 들고 왔다는 것 자체도 놀라웠는데 그
의 말이 더 놀라웠다.
“이 홍차, 내가 만들었소.”
정확하게 자신이 한 일들을 다시 재현하고 있다.
의도한 것이다. 그는 뭘 해야 할지 몰라 자신이 했던 모든 것들을 따라 하고 있다. 그렇다
는 건 그걸 했을 때 그가 기분이 좋았다는 말이다. 자신이 한 수고로움을 하나하나 다 실행
하고 있다.
“그거 마시고 죽으라고요?”
칼리크는 또다시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그녀가 그때처럼 똑같이 하고 있는 건 반가웠지만
자신이 그 당시 어떠했었는지 다시 되돌아보게 되었다. 좀 심했구나, 아니 많이 심했구나.
꿀꺽꿀꺽.
탁.
그는 찻잔을 소리 나게 내려놓았다.
“자. 이제 됐지?”
벨리타는 그때로 돌아간 듯했다. 신기한 체험을 여러 번 하고 있다.
“독은 마시자마자 바로 안 죽어요. 퍼질 시간이 필요하죠.”
그때는 그가 저 말을 했을 때 자신은 눈가가 찌푸려졌는데 지금 그는 두 눈을 반짝이고 있
었다. 같은 경우인데도 반응이 저와는 다르다.
저벅저벅.
“멀쩡하지? 이제 드시오.”
여기까지 하련다. 안 그래도 시원한 홍차가 마시고 싶었는데 잘되었다 싶었다.
“난 원래 뜨거운 홍차만 좋아했는데…….”
그가 또 말이 많다.
“불만이면 마시지 말아요.”
그가 따라 준 홍차를 그녀는 시원하게 마시는 중이었다.
“사람 말은 끝까지 들어 봐야지. 그랬는데 이상하게 시원한 홍차를 즐겨 마시게 되었소. 당
신을 닮아 가나?”
그의 말에 별 반응을 하지 않았다. 벨리타는 지금 입 안에 감도는 홍차 맛에 집중했다.
창의력은 제로다. 그대로 재현하고만 있으니.
오늘은 그냥 이렇게 차 한잔 같이 마시고 보내야겠다. 출정도 앞둔 사람인데 머리가 얼마
나 복잡하겠는가. 그는 끝까지 출정이라는 말을 꺼내지도 않고 자신만 하염없이 바라보다
돌아갔다. 아쉬워하는 그의 눈빛이 계속 뇌리에 남았다.
아무래도 대화가 그쪽으로 흐르면 분위기가 무거워질 테니 자신이 걱정할까 봐 출정에 대
해서는 말을 꺼내지 않은 것 같다.
출정을 앞두고 황궁이 어수선하니 점점 시간이 지날수록 긴장이 되는 건 당연했다.
칼리크가 돌아가고 나서 방으로 들어온 유모와 핀핀을 보며 미소를 지었다. 이렇게 좋은
사람들이 제 곁에 있다.
“지하에 있을 때 우리 핀핀이 없었으면 큰일 날 뻔했어. 도와준 유모하고.”
몇 번이고 되풀이하며 그 고마움을 전하고자 했다. 이번에는 꼬리가 하나 더 달렸다.
“황제도 오지 않았던 곳인데 말야.”
갑자기 핀핀의 토끼 같은 눈동자가 더욱 동그래졌다.
“아니에요. 오셨어요!”
이번에는 벨리타의 새파란 눈동자가 휘둥그레졌다.
할 말을 잃고 있는 마마께 핀핀은 제가 아는 걸 소상히 전하기 시작했다.
유모까지 같이 지하 방으로 가서 도망치자고 한 날. 마마님과 헤어지고 다시 유모가 시키
는 대로 약초 물을 가지고 갔을 때, 구멍으로 고개를 내밀다가 후다닥 숨었었다.
누가 있었다. 그때는 감시병이 뭘 살피는 중이라 여기고 숨죽여 숨어 있기만 했다. 꽤 오랜
시간을 그렇게 있었다. 그러다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아 다시 동태를 살피기 위해 구멍 위
로 눈만 내민 순간, 놀라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아니! 저… 저분은!
미동도 없이 아까와 똑같은 모습으로 문 앞에 서 있었다. 한참 동안 저러고 계신 것 같은데
언제까지 저기 서 계시려나. 핀핀은 난감했지만, 폐하가 가실 때까지 구멍 아래에서 노심
초사하며 하염없이 기다려야만 했다.
다시 한참을 기다리다가 구멍 위로 몰래 살펴보니 아무도 없었다. 가신 것이다. 언제 가셨
는지도 모르고 있었다. 워낙 소리 하나 없이 서 계시다가 나가셨기 때문이다. 서둘러 구멍
위로 오르려는 순간, 발소리가 났다. 누군가 다가오고 있어 다시 핀핀은 구멍 아래로 몸을
숨겨야만 했다.
그 사람은 잠시 후 발소리를 내며 멀어져 갔다. 발소리 하나 들리지 않게 나가셨던 폐하와
는 달리 이번에는 멀어지는 발소리가 들려왔다. 구멍 위로 빼꼼히 내다보니 뒷모습만 봐도
누군지 알 수 있었다. 제1 대공님이셨다.
그런 사실을 핀핀은 빠짐없이 알려 드렸다.
그랬구나. 오지 않은 것이 아니었구나.
왔었구나.
그럼. 전에 왜 찾아오지도 않았냐고 했을 때 뭔가 말하려다 그만둔 것이 이 말을 하려다 만
것인가? 무슨 변명이냐고 할까 봐 하지 않았던 건가?
기껏 왔으면 깨워서라도 말을 했어야지 왜 그냥 가?
안 해도 되는 생고생까지 했다. 가시밭길을 걸어왔다. 다시는 그런 길은 걷고 싶지 않다.
“유모. 홍차 한 잔 더 주실래요?”
유모는 떨떠름한 표정으로 홍차 한 잔을 더 따라서 마마에게 건넸다.
“많으니 두 사람도 한 잔 마셔요.”
유모는 애써 미소를 지으며 괜찮다고 사양을 했다. 그 홍차를 맛있게 마시는 마마님과 탁
자에 놓인 홍차 주전자를 번갈아 바라보며 굳은 미소를 지었다. 미소는 미소인데 여전히
이 상황을 믿을 수 없어 짓고 있는 어색한 미소였다. 조금 전, 폐하가 직접 자신을 찾아오
셔서 이런 부탁을 할 줄은 꿈에도 몰랐다.
“홍차를 만들고 싶은데.”
처음엔 무슨 말인지 몰라 두꺼비처럼 눈만 껌뻑거렸다. 그래서 만들어 달라는 소리인가?
아직 폐하가 껄끄럽고 불편했다.
“가르쳐 줄 수 있나?”
“누구에게요?”
멍해진 눈빛으로 멍하게 되물었다.
“누구긴 나지.”
너무나 어처구니없는 말이라 처음에는 알아듣지 못하다 한 박자 늦게 알아들었다.
예에?
폐하가? 직접?
차라리 내가 하고 말지 싶어 나서려고 했는데 완강히 거부하고 나오셨다. 직접 꼭 해야 한
다고. 그 고집을 누가 말리나. 정말 마음에 안 든다.
순간, 사람 먹게끔은 만들 수 있을까 염려되었지만 잘 가르쳐 주면 어찌 되겠지 싶어 할 수
없이 가르쳐 줄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정말 환장하는 줄 알았다. 예전 마마님도 이러셔서 가르쳐 드렸지만 이렇게 속 터지진 않
았다. 뭐 하나 제대로 하시는 게 하나도 없었다. 홍차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먹으면
죽는 독약을 만드는 모양이었다. 자루에 홍차를 넣는 것부터 어수룩하더니 우려내는 시간
하나 딱딱 맞추지도 못하고 이건 그냥 사람이 먹을 수도 없는, 듣도 보도 못한 것이 탄생했
다.
정말 폐하만 아니면!
유모는 뻗치는 성질을 참기 위해 심호흡을 얼마나 해 댔는지 가슴이 뻐근할 정도였다. 내
가 못 산다. 왜 이런 걸 한다고 덤비시냔 말이다.
그냥 후딱 만들어 드릴 텐데. 속이 부글부글 끓어올랐지만 대충 어떻게든 색깔은 나왔다.
맛은 보장 못 한다.
절대 맛보지 않을 것이다. 처음 만들 걸 맛보다 혀가 오그라드는 줄 알았다. 떫고 쓴 맛에
혀가 다 말려 들어갔다. 폐하의 맑은 눈빛만 아니었으면 필시 저를 죽이려 굴고 있는 것이
라 확신했을 것이다. 그 정도로 맛이 형편없었다.
그렇게 만든 홍차다. 그걸 또 직접 들고 가시는 폐하를 보며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아
주 이해하지 못할 행동을 하고 가셨다.
그런 홍차를 마마님이 드시고 계신다. 맛이 의심스러웠는데 마마님 얼굴을 보니 너무나 아
무렇지 않은 표정이었다. 이상한데…. 잘되었나? 하긴 가르친 선생이 우수하니. 괜히 으쓱
해지기도 했다.
유모는 자신도 그 홍차를 한 잔 따랐다. 향이 좀 강한 것 같은데…. 다시 한번 마마님의 표
정을 보며 의심을 접고는 한 모금 입에 넣었다.
우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