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2화 보내 주지 않을 거요
방금 돌아간 안톤이 혹여나 자신을 만나서 칼리크를 옹호하거나 그쪽으로 뭔가 부탁을 했
다면 무척 실망했을 것이다. 물론 출정한다는 걸 알려 준 것만으로도 안톤은 제 역할을 다
했다.
출정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건 알고 있었다. 칼리크가 매일 찾아오니 유클로와의 전쟁까지
아직은 시간이 좀 남아 있는 줄 알았다. 그런데 이미 출정을 준비하면서 그는 내색 하나 없
이 자신의 시중을 다 들어준 거였다.
다른 일도 아닌 전쟁을 하러 떠나는 것이다. 후… 벨리타의 마음이 조금은 복잡해지기 시
작했다.
***
안톤은 마마를 알현하고는 곧장 데인을 찾아갔다.
“마마께서 어떻게 덫에 대해 아셨지?”
데인도 안톤과 똑같은 생각이었다. 극소수만 알고 있는 덫에 대해 알고 있다?
“게다가 도적 떼 두목 얼굴에 칼자국이 있다는 것은 우리 원정대 5명밖에 모르는 일입니
다. 별로 중요한 일이 아니어서 폐하께도 고하지 않은 일입니다.”
“그건 나도 모르던 일 아닌가?”
시간이 지날수록 황후는 그들에게 수수께끼 그 자체였다. 가뜩이나 오아시스에 대해 황후
가 알고 있는 것도 의구심이 일었는데 이런 세세한 사항까지 그냥 가만히 앉아서 꿰뚫고
있다? 뭐가 뭔지 가늠이 되질 않았다.
데인은 서둘러 황제를 알현하기 위해 밖으로 나섰다.
보고할 것이 많았다.
그의 생각으로 황후의 정보통은 에단 스톤일 것 같았다. 뭔가 그림이 그려질 것 같으면서
도 모호해졌다. 정확히 에단이 무슨 역할을 하는지 알지 못해서 그러했다.
***
“폐하. 에단 스톤의 거처를 알아냈습니다.”
데인은 그동안 알아낸 정보를 폐하께 고하기 시작했다.
“가장 서쪽에 있는 해안가 마을에 정착했습니다.”
“그래? 거기서 뭘 하던가?”
벨리타를 오해하게 만든 남자였다. 거금까지 줘서 보냈으니 그렇게 오해했던 것이지만 이
제는 무슨 목적으로 그와 접촉했는지 황제도 의아해졌다.
“거기서 토목 공사를 하고 있습니다.”
토목 공사?
“그 해안가 마을은 지형상 상당히 낮은 곳에 있습니다. 그곳에 있던 길을 없애고 절벽으로
다닐 수 있는 새로운 계단을 만들고 있습니다.”
“왜?”
“그것이 확실하진 않습니다. 그렇게 되면 그 마을 사람들은 상당히 편리하게 되긴 합니다
만.”
“왜 하필 그 마을인가 하는 것이 의문이지.”
“네.”
폐하와 말을 하면 이것이 좋았다. 핵심을 짚어 내며 대화의 속도가 빨라진다. 일일이 설명
을 다 하지 않아도 그 앞을 추론해 내신다.
“불편함을 개선해 줄 마을은 많다. 그러니 왜 하필 거기인가가 의문이다.”
“또 한 가지. 지금 에단의 주변으로 사람들이 모이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
모이는 사람들이 누구냐에 따라 위험한 인물인지 아닌지 판단할 수 있다. 하지만 그런 의
심은 하지 않는다. 벨리타가 명령한 일이다. 오아시스 건도 있었으니 해가 되는 일은 절대
아닐 것이다. 이젠 그녀가 하는 일에 그 어떤 의심을 할 이유가 없다. 의심 한 번 잘못해서
지금도 호되게 벌을 받고 있다. 나라를 위해 이보다 더 큰 공을 세운 사람은 없다.
“젊은 청년들입니다. 대단한 응집력으로 뭉치고 있습니다. 알아보니 그 에단 스톤이라는
자가 친화력과 신념이 대단하더군요. 그를 따르는 자가 속속 모이고 있습니다.”
그래. 벨리타를 믿지 못했다면 당장 위험인물로 찍혔을 것이다. 십중팔구 이런 경우는 사
병을 모으는 움직임이다. 사전에 제거해야 하는 조직이다. 그러나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건 칼리크뿐만이 아니었다.
데인 역시 황후가 대단한 정보, 게다가 세세한 정보까지 미리 알고 있고 또 다른 계획을 세
우고 있다는 것이 놀라웠다.
황후는 절대 이런 걸 해낼 사람이 아니었다. 이 정도 되면 대신보다도 더 훌륭했다. 그동안
알지 못했던 대단한 면을 보고 있는 것 같아 감탄하면서도 황후가 더 신비롭게 보이기도
했다. 설명할 수 없는 일들을 벌이고 있는 황후를 데인조차도 따라잡을 수 없었다. 전에도
생각한 것이지만, 마치 위에서 다 내려다보고 지휘를 하는 느낌이었다.
“지켜보면 알게 되겠지.”
“네. 제가 예의 주시하고 있겠습니다. 지금은 유클로에 집중하십시오.”
황제는 고개를 끄덕이며 그와 묵직한 시선을 교환했다.
***
벨리타는 직접 쓴 서신을 주머니에 넣고 있었다. 황후궁 기사들 중 셋을 에단에게 보낼 생
각이었다.
벨리타는 마음을 굳게 먹고, 미래를 알기에 시간을 단축하기 위해 직접 관여했다. 이왕 이
일을 시작한 이상 처음 마음먹은 대로 진행하는 것이 맞다. 어쨌든 이 세계에서 벨리타로
서 살아가야 한다.
서신에는 안부와 격려의 말을 썼다. 모이는 인재들을 잘 활용해 달라고도 썼다.
자칼단 중 석공도 있고 토목 공사에 필요한 인재들이 있다. 집을 짓고 마차를 고치고. 그리
고 같이 도울 사람들이 속속 모이고 있을 것이다. 그들이 앞으로도 에단을 도울 것이다.
에단이 척척 알아서 진행시킬 일이었다. 거기에 황궁 깃발을 여러 개 준비해 출발하는 기
사단에게 전달할 생각이다. 서신과 함께 이것이 주요 목적이다.
에단의 주둔지에 모든 사람들이 볼 수 있게 이 깃발을 꽂도록 명할 것이다. 황실과 관련된
사람이라는 명예도 줄 것이며 황실의 명성도 드높일 것이다. 그것이 가장 중요했다. 백성
들과 특히 에단에게 황실에 대한 경외감과 충성을 높이는 것.
이 깃발은 에단에게 더한 사명감을 부여하게 될 것이다. 황실에 대한 소속감도 느낄 터. 싹
트고 있는 황실에 대한 경외감을 더욱 크게 키워 놓아야 한다.
이제 변수는 많아졌다. 아무리 적국이 침공해 온다 해도 만반의 준비를 하고 있고 유클로
와의 전쟁에서도 이기고 돌아오면 미래가 바뀐다. 제일 중요한 건 에단이 황실의 편이라는
사실. 이것이 핵심이다. 이제 거대한 소용돌이 속에 소설 내용이 서서히 바뀌기 시작했다.
그 중심에 벨리타가 있다. 소설 내용을 알고 있다는 힘을 이제야 제대로 발휘하고 있는 셈
이었다.
기사를 잘 출발시킨 벨리타는 조금 한시름 놓았다. 하지만 출정을 앞두고 있어 일말의 불
안감은 남아 있었다. 판도가 바뀔 확률은 높지만, 아직 확신하기에는 이르다. 어디건 변수
가 남아 있기에 신중을 기해야 한다.
자. 이 일은 일단락되었으니 이제부터 다음 일을 하자.
진작에 했어야 했다.
벨리타는 제 방에 커다란 짐 상자들을 들여놓게 했다. 비어 있는 여기를 가득 채울 일만 남
았다.
***
“폐하!”
갑자기 보좌관이 헐레벌떡 뛰어 들어왔다. 그의 다급한 목소리에 칼리크는 고개를 들었다.
“폐하! 큰일 났습니다. 황후마마가 지금 짐을 싸고 있다 합니다.”
뭐라?
칼리크는 튀어 오르듯이 벌떡 일어나 그대로 달려 나갔다.
설마. 그럴 리가 없다. 아니다. 똑같은 걸 한다고 지루해했다. 그래서 노래까지 했는데 마음
에 들지 않았던 거다. 그렇다고 짐을? 안 된다.
안 돼. 벨리타. 안 돼!
칼리크는 눈썹이 휘날리게 황후궁으로 달려가느라 정신이 없었다.
***
설마가 아니었다.
벨리타의 방에 커다란 짐 상자들이 열려 있고 벌써 한 상자는 드레스로 가득 차 있었다. 나
머지 상자에도 여러 벌이 들어가 있었고 계속해서 시녀들이 드레스를 넣고 있느라 분주했
다.
갑자기 등장한 황제를 본 시녀들은 일시에 움직임을 멈추고는 놀란 눈으로 쳐다보기만 했
다. 황제의 표정이 이해 불가였기 때문이다. 어디가 대단히 아픈 것처럼 보였다.
황제가 드레스 룸으로 터덜터덜 걸어가자 시녀들과 유모는 눈치껏 자리를 피했다.
“벨리타….”
흠칫 놀라는 그녀의 모습에 더한 확신이 들었다. 자신이 올 줄 몰랐으리라. 그러니 저리 놀
라지.
“지금 저 짐들을… 어디로….”
벨리타는 왜 칼리크가 여기 나타나 다 죽어 가는 목소리로 그걸 묻는지 몰라 그저 빤히 쳐
다보기만 했다.
“펠…론국이오?”
그녀의 고개가 옆으로 기울어졌다. 눈가를 찌푸리고 있는 것만 보아도 자신이 행선지를 알
아차린 것이 못마땅한 눈치다.
“펠론국?”
어이없다는 그녀의 목소리에 그럼 다른 곳인가 싶었다. 그렇다면 어디로?
“내가… 보내 주지 않을 거요.”
장소는 중요하지 않다. 그곳이 어디건 여기에서 절대 떠나게 하지 않을 것이다. 못 보내
줘. 벨리타. 그건 안돼.
“보내 주지 않을 거라고요?”
당신이 뭔데 보내 주네 마네 하냐고 따지는 듯이 들렸다. 그래도 할 수 없다. 절대 못 떠난
다. 황궁을, 내 곁을 절대 떠나면 안 돼. 벨리타.
“벌써 말해 놓았는데 보내 주지 않는다니요?”
“그게 어디건, 누구건 절대 안 되오.”
벨리타는 이러는 칼리크를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다. 언제 이런 일에 관심을 뒀다고. 정
신이 나갔나….
“이미 약속했어요.”
누가 있는 거다. 하긴, 그녀를 추종하는 무리들이 좀 많았던가. 아무리 그래도 절대 안 된
다.
“안 돼. 보낼 수 없소. 절대 안 되오.”
정말 정신 나간 사람처럼 구는 칼리크 때문에 벨리타는 그저 황당할 뿐이었다.
“그건 내가 결정할 문제예요. 당신이 관여할 문제가 아니라고요.”
칼리크는 고개를 저었다. 그것도 여러 번 저었다.
“그런 일을 혼자 결정하지 마오. 제발….”
도대체 그가 왜 이러는지 정말 모르겠다. 이런 것 하나도 마음대로 하지 못하게 만들 심산
인가. 벨리타는 슬슬 화가 나기 시작했다.
“아니. 드레스 기부하는 것까지 참견해야겠어요?”
***
조금 전.
이것저것 신경이 쓰이고 머릿속도 복잡하여 예전부터 마음먹은 드레스 룸 정리를 해야겠
다 마음먹었다. 그러면 기분도 개운해지리라.
입지도 않은 드레스로 가득한 룸을 진작에 정리를 했어야 했는데 그럴 여유가 없었다고
하면 변명일까. 이참에 싹 다 정리해서 남은 건 필요한 사람에게 기부할 생각이었다.
시녀들을 대동하고 작업을 시작했다. 한 번 입고 그냥 걸어 놓은 드레스가 수두룩했다. 아
래층에도 가득하고. 물론 예전 벨리타가 말이다. 지금 봐도 쓸데없이 너무 많았다. 절반 정
도는 기부해도 될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