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폭군에게 찍힌 민폐 황후 입니다-81화 (81/130)

81화 완벽한 재현

“여기?”

“조금 위….”

음….

뻐근한 곳을 찾아 그가 꾹 누르자 절로 신음이 새어 나왔다. 이렇게 시원할 수가. 이렇게

직접 발바닥 안마를 받아 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좀 더… 세게요.”

“이렇게?”

“더… 더 세게.”

으음….

누르는 자리도, 힘의 세기도 아주 딱 좋았다. 만족스러운 감탄사가 그녀의 입에서 연거푸

흘러나왔다.

그녀의 반응에 힘을 받은 황제는 열심히 더 발바닥을 꾹꾹 눌러 주었다. 그래도 그녀를 처

음으로 편안하게 해 주는 것 같아 뿌듯했다.

“거기… 좀 더….”

“여기가 좋소?”

“그래요.”

음….

그녀의 입에서 신음 같은 감탄사가 계속 흘러나왔다.

문밖에서 노크하려고 손을 올리던 시종장은 다시 슬그머니 내렸다. 데인 대공님과의 회의

시간이 다가와 모셔 가기 위해 대기하던 중이었다.

흠흠….

지금 슬쩍 들려오던 소리가…. 방해해선 안 되는 소리다.

황제 폐하께서 계속 잘 주무시지도 못하고 마마 때문에 노심초사하시던 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시종장이었다.

그러니 폐하가 이제야 마마와 길게 시간을 가지고 계시는데 회의야 조금 늦어져도 괜찮지

않을까 싶었다. 지금 가서 데인 대공님께 아뢰면 흔쾌히 기다려 주실 것이다. 물론 자세한

보고는 드리지 않을 것이다. 폐하께서 마마와 조금 더 시간을 가지려 하신다고만 전할 것

이다.

시종장은 다행이라는 미소를 지으며 진심을 담아 닫힌 문을 향해 고개를 깊숙이 숙였다.

폐하. 뜻하시는 바를 꼭 이루소서.

데인 대공에게 달려가는 시종장의 발걸음은 그 어느 때보다 밝고 경쾌했다.

***

다시 돌아가는 칼리크는 뿌듯했다. 팔은 좀 뻐근했어도. 벨리타도 그때 이렇게 팔이 아팠

을 텐데. 그때는 몰랐지만, 괜히 더 미안해졌다. 자신보다 훨씬 많이 아팠을 것이다. 그 연

약한 팔로 땀나도록 억센 근육들을 주물렀으니.

그래도 지압을 해 주고 다리를 주물러 주자 편안한지 스르륵 잠이 들었다. 한참 동안 그 얼

굴을 들여다보다 담요를 덮어 주고는 조용히 밖으로 나왔다. 시종이 된 기분이었다. 벨리

타만의 시종.

오늘은 많은 것을 얻었다. 그녀가 말도 많이 건넸고 편히 잠도 들었다. 내일도 가서 또 주

물러 줘야겠다. 이렇게 그녀의 얼어붙은 마음도 조금씩 풀려 갔으면 좋겠다.

“폐하. 펠론국에서 보내온 물자들은 내일 모두 도착합니다. 데상 연합국과 렉서 왕국에서

출발한 30만의 군사는 3일 후 사막으로 들어가는 들판에 집결하며 가장 먼 소닉 왕국 10

만 군사는 5일 후 도착합니다.”

폐하를 기다리고 있던 데인은 지금까지의 집결 사항을 상세히 보고했다.

“이번엔 그 어느 때보다 더 보급이 중요하니 특별히 신경 쓰시오.”

“물론입니다.”

“그래. 그럼 5일 후, 밤에 우리 쪽 30만을 합쳐 60만의 대군이 안톤을 선봉으로 먼저 오아

시스 쪽으로 조용히 떠난다. 그리고 3일 후 나머지 40만의 군대를 이끌고 내가 출정한다.”

오아시스로 가는 길을 안톤이 알기에 60만의 대군을 이끌고 갈 것이다. 대신 안톤의 역할

인 황제 수호는 기사단장이 맡는다.

“네.”

안톤과 기사단장, 데인과 부기사단장까지 비장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렇게 되면 사람들은 낮에 출정하는 폐하의 군대만 볼 것이다. 협곡으로 통하는 그 길로

향하는. 그 정보는 유클로 왕국으로 바로 들어갈 것이다.

그러면 그들은 협곡에 만반의 준비를 하고는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우리 군대를 기다릴

것이다. 하나 이쪽에서는 아주 천천히 진군할 것이다. 안톤 군단의 진군 속도와 맞춰야 하

기 때문이다. 대신 요란하게 이쪽에만 집중시킬 것이다.

그렇게 되면 우리의 작전이 성공할 것이다. 오아시스를 거점으로 방향을 잡고 진군하는 우

리 군대가 또 있다는 걸 전혀 눈치채지 못할 테니 성공은 시간문제였다.

“부기사단장은 내가 떠나고 비어 있는 황궁을 지켜라. 제2사단까지 주둔시켜라.”

이에 부기사단장은 고개를 깊이 숙였다. 늘 전쟁을 떠나시면 그가 황궁 수비를 맡아왔다.

1사단만 배치해도 수비는 되었는데 이번에는 2개 사단으로 늘리셨다.

방비를 더 철저히 강화하라는 말씀이시다. 폐하의 뜻을 바로 알아들었다. 황후궁 경비를

더 강화하겠나이다.

부기사단장은 탑으로 황후마마를 끌고 갈 때 거칠게 했던 것이 못내 죄스러웠다. 그는 안

톤과 친우 사이였다. 그를 잃었다는 생각에 자신의 사적인 감정까지 들어갔다. 죽을죄를지

었다. 그것에 대한 반성으로 황후마마를 철저하게 지킬 것을 신에게 맹세했다.

***

자신이 좋아했다고 발 마사지를 시작으로 연이어 다리를 주물러 주었다. 자신은 한 번밖에

안 했는데 그는 벌써 세 번째다. 그만두게 하지 않으면 언제까지고 할 기세였다. 노력하는

건 인정해 주었다.

“매번 똑같네요.”

칼리크는 그녀가 지루해하는 것 같아 당황했다. 그럼 뭔가 다른 걸 해야 할까….

“내가 뭘 어떻게 하면 덜 지루해질까?”

그녀의 두 눈이 살짝 커졌다.

서로 역할만 바뀌었다. 예전 자신이 한 말을 똑같이 그가 말하고 있었다. 다 알고 하는 걸

까? 일부러? 그렇다면 나도 맞장구를 쳐 줘야겠다. 그가 한 것처럼 똑같이.

“노래해 봐요.”

그가 당황해 눈을 껌벅거리는 모습도 자신과 똑같았다. 데자뷰.

“노래는….”

“그럼 춤을 추든가요.”

“할게. 노래할게.”

그녀는 칼리크가 둘 다 하지 않고 내뺄 거라 예상했는데 한다고 하니 도대체 무슨 노래를

할지 기대가 되었다. 황제의 노래를 처음 듣는 사람이 될 거라는 것에 대한 기대였다.

칼리크는 그렇게 말은 해 놓고 무슨 노래를 해야 할지 난감했다.

마음을 풀어 주겠다고 했으니 그냥 눈 딱 감고 뭐라도 하자.

칼리크가 시작했다. 굵직한 목소리로 제법 노래를 잘했다. 귀가 즐거울 정도로. 그런데 무

슨 노래인지는 모르겠다. 성악? 군가? 뭔지는 모르겠지만 씩씩한 노래였다.

“하나 더 해 봐요.”

이러고 있으니 마치 자신이 당한 그대로 갚아 주고 있는 것만 같았다. 그럴 마음은 없는데

이상하게 예전 자신의 상황과 똑같이 전개되고 있는 것이 신기할 정도였다.

“벨로롱~~벨롱~~”

이런.

저게 왜 여기서 나와!

가사를 모르니 대충 건너뛰며 아는 단어만 말하는 것 같았다. 저만큼도 하는 게 용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벨롱벨롱벨롱벨롱 벨로롱.”

이 부분은 자신 있었다. 중독성 있어 흥얼대던 부분이라 자신 있게 끝맺음을 했다. 그리고

는 스스로가 대견하다는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가 시키는 대로 다 할 줄은 몰랐다. 더더군다나 저 노래를 부를 줄은. 이러니 더 오버랩

이 되어 그때로 돌아간 듯한 착각마저 일었다. 역할 바꾸기 놀이를 하는 것만 같았다.

“내일은 오늘보다 나아야 할 거예요.”

완벽한 재현을 했다. 이런 날도 오다니. 신기하긴 했다.

칼리크는 난생처음 누군가 앞에서 노래까지 다 해 보고 상상해 본 적 없는 일이 벌어진 하

루였다. 좀 낯뜨겁긴 했지만, 그래도 벨리타가 좋아한 듯하니 그걸로 만족스러웠다. 까짓

거. 노래 정도야 또 불러 줄 수 있다. 그런데 군가 외에는 아는 노래가 없다. 연습이라도 해

야 하나…. 갔다 와서 해야겠다. 유클로를 정복하고 와서 말이다.

출정을 앞두고 해야 할 일들이 산더미같이 쌓여 있었다. 그 와중에 벨리타까지 신경 써야

하는 것이 힘들 만도 한데 그는 티끌만큼도 그렇게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더 해 달라 하

면 더 해 줄 수도 있었다. 그녀의 마음이 조금씩이라도 풀린다면. 욕심은 내지 말자. 더 걸

린다고 해도 계속 노력할 것이다.

그는 황후궁을 나와 연무장으로 향하며 다시 정신 무장을 하고 있었다.

***

벨리타는 완전히 몸이 회복되어 궁정 앞을 산책할 정도까지 건강을 되찾았다. 밝은 햇살을

맞으며 오래간만에 바깥 공기를 쐬니 좀 더 기운이 나는 것 같았다.

그런데 안톤이 다시 뵙기를 청했다. 그래서 전에 에단을 만났던 곳, 황후궁 응접실로 안내

했다. 사막에서 돌아와 처음 만났을 때는 안톤에게 제대로 할 말을 다 하지 못했는데 잘되

었다 싶었다.

“지난번에는 제가 회복이 더뎌 제대로 말도 못 했네요.”

“아닙니다. 황후마마.”

감동적인 말은 다 들었다. 살아 돌아와서 고맙다는 말을 몇 번이나 하셨다. 안톤은 마마의

진심이 보여 지금도 묵직하게 고개를 숙였다.

“얼마나 감사한지… 그 악랄한 도적 떼를 상대로….”

자신의 불찰로 덫을 놓고 변태적인 행위를 하는 도적 떼에 대해 말해 주지 않아 이들이 그

고생을 했다. 그러니 잘 탈출해 돌아온 것이 얼마나 고마운지 모른다.

“네. 맞습니다. 특히 그 두목 놈이….”

안톤은 내색하지 않고 은근슬쩍 다시 여쭈었다. 뭔가 더 아시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네. 맞아요. 얼굴에 칼자국이 있는.”

안톤은 자신의 놀람이 드러나지 않게 고개를 숙이며 표정을 가다듬었다.

“그런데 무슨 일로….”

안톤은 표정을 잘 정돈한 뒤, 행동만큼이나 묵직한 목소리로 대답을 했다.

“마마. 저는 내일 먼저 출정하게 되었습니다.”

아! 먼저 출발하는구나.

오아시스 쪽으로 가는 계획을 그녀 또한 알고 있었다.

“큰 발판을 만들어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마마. 반드시 승리하고 돌아오겠습니다.”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이런 안톤이 있어 얼마나 든든한지 모르겠다.

“이 말씀 드리고자 만나 뵙기를 청했습니다.”

그래도 전보다는 황후의 얼굴이 많이 좋아진 것 같아 마음이 한결 놓였다.

“덫에 다친 발목은 괜찮나요?”

“…다 나았습니다.”

안톤은 계속 표정에 신경 써야 했다. 첫날 찾아뵈었을 때 그런 자세한 얘기까지는 꺼내지

않았었다. 그런데 황후는 두목에 대한 이야기도 마치 옆에서 보기라도 한 듯한 태도였다.

상처를 치료한 보좌관이 말해 줬을 리도 없고. 소식을 들었어도 발목을 다쳤다는 말만 들

었을 텐데. 놀랄 수밖에 없었다. 황후궁에만 있던 마마가 어떻게 알고 있는 걸까? 그냥 추

리해 낸 걸까?

오아시스도 그렇고 의구심이 커졌지만 정중하게 인사를 한 후 그는 돌아갔다.

벨리타는 그를 보내고는 생각에 잠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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