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화 좀 살살 해요
그는 자신도 모르게 남아 있는 음식들을 싹싹 다 비우고 있었다.
그녀의 눈에는 게걸스럽게 먹는 것처럼 보였다. 얼마나 굶었으면 저러나.
그냥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리고 그가 다 먹기를 기다려 주었다. 먹을 때는 개도 안 건드린
다는데 먹는 사람에게 뭐라 할 마음은 없다.
“그만 쉬고 싶어요.”
식사를 다 하고도 그가 일어날 생각을 하지 않자 그녀가 먼저 말을 했다. 딱히 할 말이 있
는 것도 아니고 대화가 오고 가는 것도 아니라 어색한 시간만 흘렀다. 오늘은 이 정도면 될
것 같아 그만 가 보라는 뜻으로 그렇게 말했다.
서운한 기색이 역력한 그가 할 수 없이 일어났다.
“아. 오늘 점심도 같이 먹을까?”
벨리타는 한숨부터 내쉬었다.
“또요?”
그녀의 말에 풀 죽은 모습이 된 칼리크는 여전히 바로 나가지 않고 뭉그적거렸다.
“다시 저녁때 오겠소.”
저벅저벅.
거절의 말은 하지도 못하게 바로 뒤돌아 문 쪽으로 빠르게 걸어가는 그의 뒷모습을 보며
그녀의 감정은 미묘했다. 피식, 헛웃음까지 나오려 했다.
칼리크는 다 죽어 가는 모습으로 들어왔다가 다시 조금은 살아난 얼굴로 돌아가고 있었다.
소기의 목적은 달성했다. 앞으로도 더 잘해야 한다. 그는 어서 빨리 저녁이 되기만을 기다
렸다.
***
그냥 날이 어둑해지자마자 다시 달려갔다. 저녁이라고 했으니 지금도 저녁이다. 원래 저녁
이란 어두워지면 다 저녁이니까.
하지만 황후 방에 앉아 보지도 못하고 잠시 서 있다가 돌아오게 되었다.
“이렇게 맘대로 오면 곤란하죠.”
들어서자마자 벨리타가 먼저 강하게 타박을 하고 나왔다. 그냥 문 앞에 서서 시종처럼 그
녀의 꾸지람을 듣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오래 기다리지 않고 바로 얼굴을 볼 수 있
었으니 그나마 다행스러웠다.
“이렇게 수시로 오시는 분이 지하에 있을 땐 왜 한 번도 오지 않았나 모르겠네요.”
칼리크는 그 말에 뭐라 말을 하려다 다시 입을 꾹 다물었다.
“내일부터는 오더라도 하루에 한 번만 오세요. 그래야 용서를 구하는 사람처럼 행동하는지
알 수 있을 테니까요.”
그를 만난 처음에 그가 한 말이었다. 그때 그는 더 자주 만나 자신을 괴롭히려고 하루에 한
번씩 꼭 만나러 오라 명령했지만, 지금 자신은 덜 자주 만나기 위해 하루에 한 번만 오라고
선을 그었다. 그대로 놔두면 시도 때도 없이 찾아올 것이다.
칼리크는 믿을 수 없었다. 이건 매일 그녀를 봐야 한다는 말이다. 아니, 볼 수 있다는 말이
다. 보고 싶어 매일 드나들며 청을 넣는 것이 아니라 아예 그렇게 정해진다는 말이다.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는 자신에게 기회를 주고 있다. 이 기회를 놓치면 안 된다.
“대답은 해야죠?”
대답을 하는 대신 고개만 끄덕이는 그의 표정이 비장해 보였다.
그러니 지금은 그냥 가라고 하는 그녀의 말에 따랐다. 내일 점심때 또 볼 수 있으니 다음을
기약하며 자리를 떠났다. 황후궁을 나와 다시 집무실로 돌아가는 그의 가슴은 벨리타가 이
정도라도 허락해 준 것에 대한 감사로 가득 찼다.
***
“데인. 나보고 이젠 매일 만나러 오라는군.”
그는 자신도 모르게 집무실에서 일을 마무리하고 있는 데인에게 말을 해 버렸다.
“황후마마가요?”
그럼 누구겠어.
데인은 잘 되었다 여겼다. 지금 폐하께서는 황후의 영향을 많이 받고 있다. 매일 만나게 되
면 무슨 진전이라도 있지 않을까 싶어 희망을 품게 되었다.
이번에는 날이 어두워졌는데도 계속 일을 하시려는 폐하를 저지하지 않았다. 오늘은 괜찮
을 것 같았다. 대화의 물꼬는 제대로 트신 것 같으니 이대로 잘되기만을 진정으로 바랐다.
***
쿠로는 황궁 안을 슬금슬금 염탐하듯이 다녀 보아도 딱히 건질만 한 것이 없었다. 얼마 전,
자신이 심어 놓은 첩자에게서 황제가 사막 근처에 다녀온 것 같다는 말을 들었다. 사막?
왜?
그 이후로 황궁 출입이 잠시 어려워졌었다. 그러니까 왜?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답이 나오지 않았다.
뭔가 큰일이 벌어진 것 같은 낌새인데 그게 뭔지 모르겠다. 그래서 이렇게 직접 황궁을 염
탐하고 있는 것인데 수확이 없다. 무슨 꿍꿍이지?
사막 근처엔 왜 간 것이고.
황궁 출입은 왜 엄격히 한 거지?
몰래 뭔가를 진행했거나 숨겨야 하는 일이 있었던 것 같은데 그게 무엇인지 알 수가 없어
환장하겠다.
못된 것들.
황제나 그 측근들끼리만 뭔가 쑥덕쑥덕 일을 처리했다. 그것이 더 환장하고 입에서 아는
욕이 다 튀어나오게 만들었다.
대놓고 자신을 제외시키고 비밀에 부치는 행태가 역겨웠다. 이래 봬도 이 나라의 대공인
데!
그래. 그렇게 나온다 이거지?
그래봤자 별 뾰족한 수가 안 나올 것이다. 뭘 해도 승자는 자신이 될 터이니.
기분 더럽게 황궁을 나서고 있는 쿠로의 얼굴이 구겨질 대로 구겨지고 있었다.
* * *
칼리크가 오늘은 벨리타에게 음식을 먹여 주고 있었다. 하도 한다고 해서 거절하기도 귀찮
아 오늘만 그렇게 하라 허락했다.
그저 새처럼 입만 벌리면 되었다. 그래. 어디 받아먹어 보자. 그렇게 하고 싶어 한다는데
말릴 필요는 없다.
그녀가 그만 먹겠다는 신호를 보내기 전까지 먹여 주는 걸 멈추지 않았다.
그녀는 처음 만났을 때, 그의 명령대로 매일 점심을 같이 먹으면서 죽을 맛이었는데, 지금
의 칼리크는 그렇지 않았다. 누가 보면 가벼운 식사를 하는 것이 아니라 중대한 회의를 하
는 듯한 진중하고 심각한 표정이었다.
하루 만에 그의 얼굴이 많이 달라져 보였다. 잠을 푹 자고 일어났는지 눈 주위 다크서클이
많이 사라졌다. 얼굴빛도 더 좋고 입술에도 혈색이 돌았다. 어제는 좀비 같았는데 오늘은
사람이 되었다.
“뭐 더 필요한 것 없소?”
“불편한 건?”
“뭐든지 말만 하면 다 갖다주겠소.”
“오늘 이 닭고기가 더 부드러운 것 같소.”
벨리타에게서 답이 없는데도 그는 저 혼자 계속 떠들고 있었다.
이렇게 말이 많았던가. 그녀는 딱히 할 말도 없었고 꼭 대답이 필요한 것 같지도 않아 그냥
조용히 있었다.
“여기 토마토 구운 것도 먹어 보시오.”
“이 고기는 더 작게 잘라 줄까?”
“수프가 좀 뜨겁네.”
말이 너무 많았다. 살짝 그녀의 눈가가 찌푸려졌다. 물론 자신을 위해 이것저것 말을 건네
는 건 알겠지만 너무 과했다.
“왜 이렇게 시끄러워졌죠?”
그녀의 말에 멋쩍은 표정을 지으면서도 그는 뭐라도 더 하고 싶었다. 그녀와 같이 마주 보
고 앉아 있는 것만도 고마웠다. 뭐든 다 해 주고 싶었다. 이만큼 너그럽게 허용해 준 벨리
타가 진정 천사로 여겨졌다. 자신이었다면 절대 만나 주지 않았을 것이다.
벨리타는 몸이 아직 회복되지 않아서 그런지 식사가 끝날 때쯤 피곤해졌다. 힘이 들었다.
오늘은 이 정도에서 끝내야 하겠다.
칼리크는 내일을 또 기약하며 그녀의 방에서 퇴장했다. 그런데 벨리타가 좀 지루해하는 것
같았다. 별 감흥도 없어 하고. 말을 거의 하지 않았다. 전혀 웃지도 않고. 제 노력이 부족한
것이다. 뭐가 좋을까. 어떻게 해야 그녀의 마음이 돌아올까.
그는 골똘히 고민하며 황후궁을 나왔다.
***
다음 날은 점심 식사를 마친 뒤, 그녀를 긴 소파에 눕게 했다. 침대에 눕히면 오해를 할까
봐 소파를 선택했다.
벨리타는 그가 무엇을 하려고 하는지 몰랐다. 누운 자리가 침대가 아니라 소파긴 했지만,
경계하는 중이었다. 설마, 스킨십을 하려 하지는 않겠지. 그럼 정말 최악…….
손을 대긴 했다.
최악은 피해 갔다. 그가 다리를 주무르고 있었다. 몸을 낮춰 무릎으로 서서는 그녀의 발바
닥부터 풀어 주더니 발목을 지나 무릎 위까지 꼼꼼히도 주무르기 시작했다.
처음에 자신이 그의 다리를 주물러 줬던 때가 떠올랐다. 그도 그걸 떠올려 이러는 걸까?
어쨌건 이건 마음에 들었다. 음식을 먹여 주는 것보다는. 사실, 음식을 누가 먹여 주는 건
트라우마가 생겼다. 그때 그 입으로 음식을 물고 다가오던 요리사 때문에. 그래서 칼리크
가 음식을 먹여 주는 것보다 이렇게 다리를 주물러 주는 것이 더 나았다. 제법 잘하기도 했
다.
그런데 저 반짝이는 것은.
그의 이마에 땀이 맺히기 시작했다. 이제 알았다. 그가 자신이 해 주던 걸 기억하고 그대로
하고 있다는 걸. 그가 살아오면서 언제 누구의 다리를 주물러 보았겠는가. 그날 자신이 어
떻게 주물러 주었는지 빠짐없이 기억하고 있는 것이다. 그대로 지금 시현하고 있다. 땀까
지 흘리면서.
자신의 모습과 많이 오버랩되었다. 참 많이 바뀌었다. 예전엔 이런 사이도 아니었고 그저
죽기 싫어서, 그가 불쌍해서 주물러 준 것뿐이었는데. 그때는 이 칼리크가 소설에서 가장
불쌍한 인물 같았다. 황제나 되어 가지고 가장 비참하게 생을 마감하는 인물. 그랬는데 판
도가 바뀌었다.
안톤이 살아 돌아왔으니 카르탄이 유클로 왕국과의 전쟁도 승리할 수 있는 확률이 아주
높아졌다. 그러니 그가 소설 속에서는 죽었다 해도 앞으로 반드시 꼭 죽으라는 법은 없다.
지금 땀 흘리며 자신의 다리를 주무르고 있는 칼리크는 죽지 않을 확률이 높아졌다.
자신이 어떤 고초를 겪었는데, 왜 그런 일을 벌였는데, 다 그를 살리려고 한 일이었다. 그
대가로 죽을 고생을 했지만.
윽.
칼리크가 발바닥 어딘가를 꾹 누르자 억눌린 비명이 터져 나왔다. 너무 아팠다.
“좀 살살 해요.”
그녀의 타박에 바로 미안한 표정을 지으며 칼리크는 손가락의 힘을 조절했다. 자신 탓으로
연금되는 바람에 다리가 아프다는 말을 잊지 않았다. 어떻게든 조금이라도 만회하기 위해
이 일을 생각해 냈다. 생전 처음 하는 거라서 어느 정도로 힘을 주어야 하는지 몰라 너무
세게 눌렀나 보다. 더 조심해야겠다.
“이젠 괜찮소?”
벨리타는 말없이 두 눈을 감았다. 이제 딱 적당했다. 아주 시원했다. 무거웠던 다리가 훨씬
가벼워지는 느낌이었다.
“여기는?”
그의 그윽한 목소리가 제 발등으로 쏟아졌다. 만족스러웠다.
“네…. 거기.”
많이 좋았나 보다. 다리가 시원하게 풀리며 기분이 좋았는지 입을 꾹 닫고 있던 벨리타가
계속 말을 해 준다. 다행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