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9화 기다리라 하세요
그리워도 했다. 많이 좋아했었나 보다. 하지만 이렇게 직접 얼굴을 마주하고 보니 반가움
은 잠시, 속에서 자신이 당한 것에 대한 억울함이 밀려왔다.
벨리타는 처음으로 고압적인 자세로 나갔다. 그가 지은 죄가 크기 때문에 거기에 합당한
벌은 받아야 한다.
자신의 말을 믿지 못하고 탑 지하에 가둔 죄.
저 성급한 성질머리도 고쳐야 한다. 그러니 원작에서 폭군이 되었지. 사람 하나 구제해 보
려고 갖은 노력을 다한 걸 알아주기는커녕, 지하에 가둬? 최소한 해명할 시간이라도 줬어
야지. 코빼기도 안 보였잖아. 그녀는 이것에 아예 한이 맺혔다.
“사과하러 일찍도 오시는군요.”
“그건 유모가….”
“그만하세요.”
더 이상 그가 하는 말을 듣고 싶지 않았다.
“언제부터 유모 말을 들었나요?”
칼리크는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다. 벨리타 말이 다 맞다.
그녀 앞에서 변명이나 늘어놓은 꼴이 되었다.
벨리타는 그만 말하고 싶었다. 벌써 지쳐 버렸다.
이 정도면 충분히 시간을 내준 셈이다.
“이제 그만 나가 주세요.”
칼리크는 싸늘한 그녀의 눈동자와 그것보다 더 차가운 목소리에 심장이 오그라들었다. 더
한 취급을 받는다고 해도 할 말이 없다. 이 모든 것이 자신 탓이다. 다리에 힘이 풀려 자리
에 주저앉을 것만 같았다.
“누구 덕분에 아직 몸이 회복되지 못했네요. 무척 힘들군요. 잘 가세요.”
벨리타가 얼음장 같은 목소리로 그 말만 던진 뒤, 등을 돌렸다. 보기도 싫다는 말이었다.
칼리크는 억지로 일어섰다. 속은 타들어 가고 암담했지만 그래도 이렇게 만날 수 있었던
것에 감사하기로 했다.
“또… 오겠소.”
아무런 대답이 없다. 칼리크는 어깨를 떨구고 숨쉬기 어려운 밖으로 다시 나갈 수밖에 없
었다. 한 번이 안 되면 열 번, 백번 천번이라도 용서를 빌 것이다. 그녀의 마음이 풀릴 때까
지 멈추지 않을 것이다. 죽을 때까지 해야 한다 해도 할 것이다.
벨리타… 정말 죽을 죄를 지었소. 뭘 해도 상관없소. 만나 주기만 해 주시오.
터덜터덜 걸어 나가는 칼리크의 어깨는 한없이 무겁고 버거웠다.
***
“마마. 정말 죽을 죄를 지었습니다. 제가 폐하를 막는 바람에 마마께서 맘고생을 다 하시
고. 미처 헤아리지 못해 또다시 큰 실수를 범했습니다. 용서해 주세요.”
칼리크가 나가고 바로 유모가 들어와서는 바닥에 엎드려 읍소하기 시작했다.
유모의 마음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벨리타는 몸을 돌려 자리에서 일어나 앉았다.
“유모. 일어나세요.”
침울에 빠진 유모가 그녀의 말에 비척비척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그녀와 눈도 못 마주치며
대역죄인처럼 굴었다. 유모의 마음을 편히 해 주어야 했다. 누구보다도 저를 위한 사람이
다.
“잘했어요. 유모.”
네?
놀란 눈으로 이제야 벨리타를 바라보는 유모의 표정은 어리둥절하였다.
“유모는 잘못한 것 없어요. 그러니 용서할 것도 없고요.”
유모의 두 눈이 빠르게 껌뻑거렸다. 폐하를 만나기 전 마마님의 표정은 그렇지 않았던 것
같은데. 자신이 잘못 봤나 싶어 고개가 슬쩍 기울어졌다.
“역시 유모밖에 없어요. 오히려 고마워요.”
그…런가?
어색하게 굳어졌던 유모의 표정이 점점 펴지고 있었다. 마마님이 그렇다고 하면 그런 거
다. 다행이다. 겨우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다시 밝아진 모습으로 유모는 밖으로 나갔다.
벨리타는 혼자 남아 아까 몸을 낮춰 사과하던 칼리크의 모습을 다시 떠올렸다.
칼리크는 황제인 자신이 한쪽 무릎까지 꿇고 머리까지 숙였는데 그 이상 뭘 더 원하느냐
고 생각할 수도 있다. 이 세상에서는 어마어마하게 대단한 일이겠지만 그녀가 살던 세상에
서는 그리 대단한 일은 아니다. 별로 크게 와닿지 않는 모습이라는 말이다. 물론 황제임을
감안하면 특별한 행동이지만 그렇다고 바로 상처받은 마음이 풀릴 리 없다.
벨리타는 심신이 피곤해져 다시 몸을 누이며 조용히 눈을 감았다.
***
바로 다음 날 아침 일찍 또다시 칼리크가 찾아왔다고 유모가 고했다.
유모에게 미리 말해 두었다. 또 찾아오면 방으로 바로 들이지 말고 아래층 응접실에서 기
다리게 하라고. 그래도 이렇게 일찍 찾아올 줄은 몰랐다.
“핀핀. 머리를 다시 내려 주렴.”
핀핀은 의아한 시선을 옆에 서 있는 유모에게 던졌다. 시간을 들여 마마께서 좋아하는 올
림머리를 해 드렸는데 다시 풀어 달라 하셨기 때문이다.
“마마. 폐하께는….”
“기다리라 하세요.”
유모는 바로 마마의 뜻을 알아차리고 밖으로 향했다.
핀핀 역시 손을 움직여 가닥가닥 땋아 올린 머리를 조심스럽게 풀기 시작했다. 자신은 마
마의 뜻을 따르기만 하면 된다. 걱정이 되는 건 테이블에 차려 놓은 아침 식사를 조금 후에
드셔야 한다는 것이다. 머리 손질이 다 끝나 바로 식사하시는 걸 거들려고 했는데 시간이
더 지체되니 시장하실까 봐 그것이 걱정되었다.
벨리타는 거울을 통해 우아하게 올린 머리 모양이 바뀌어 가는 걸 느긋하게 지켜보고 있
었다.
***
칼리크는 한 시간째 황후궁 응접실에서 서성거렸다. 노심초사, 다시 누군가 오기만을 기다
리기가 답답해졌다. 자리에 앉았다가, 창가로 걸어가 우두커니 서 있기도 하다가, 응접실
안을 여기저기 걸어 다녀 보기도 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우리에 갇힌 맹수처럼 이리저리
왔다 갔다 정신없이 굴었다.
태어나서 누군가를 이렇게 기다려 본 적이 있었나? 없다. 다른 이들 같았으면 꿈도 못 꿀
일이었다. 보통의 그라면 지금의 이 자리에서 참지 못하고 나갔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그저 초조할 뿐이었다. 그래서 이렇게 맴돌고 있을 뿐.
벨리타이기에 가능하다. 한 시간이 아니라 몇 시간을 기다리게 한다 해도 다 괜찮다. 이러
다가 그냥 가라고 할까 봐 지금 그것이 초조한 것이다. 얼마든지 기다리게 해도 좋으니 어
제처럼 만나 주기만 하면 좋을 것 같았다.
그가 내쉬는 한숨이 바닥에 늘비하게 깔려 발밑에 질척거릴 정도였다. 더 이상 내쉴 한숨
도 고갈되어 바닥이 날 때쯤 시녀 하나가 들어왔다. 반가움과 불안이 섞인 눈으로 그는 조
용히 기다렸다. 겉모습과는 달리 그의 심장은 어지럽게 벌렁거렸다.
제발….
아! 시녀가 안내를 한다. 위층으로. 시녀의 뒤를 따라나서며 얼마나 안도했는지. 피가 바짝
바짝 마르는 시간이었다.
겨우 다시 만난 벨리타는 긴 머리를 풀어 헤친, 아름다운 모습으로 침대에 기대어 앉아 있
었다. 몸 상태가 어제보다 더 나아 보여 정말 다행이었다.
“벨리타. 다시 한번 용서를 빌러 왔소.”
칼리크의 표정만 보면 한 시간 넘게 기다린 사람 같지 않았다. 전혀 그런 일은 없었던 사람
처럼 벨리타의 모습만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었다. 이렇게 만날 수 있는 것만도 감사하는
표정이었다.
“당신은 말로만 사과하네요?”
싸늘한 그녀의 목소리를 들으며 칼리크는 더 안도하는 표정이 되었다.
“어떻게 하면 맘이 풀리겠소?”
말만 하시오. 내가 뭐든지 다 해 주겠소.
아무리 날카롭게 질책하는 소리라 해도 자신한테 뭐라 대꾸라도 해 준 것이 그저 다행스
럽기만 했다. 아무 말도 안 하고 침묵을 지키는 것보다는 백배 천배 나았다.
“그걸 왜 나한테 물어요?”
말을 주고받는 것, 그 하나만으로도 좋았다. 칼리크는 그녀가 아무리 차갑고 매몰차게 말
을 해도 다 좋게 들렸다. 고맙기까지 했다. 저렇게라도 말을 해 줘서.
“업어 줄까?”
벨리타는 절로 한숨이 내쉬어졌다. 고작 생각해 낸 것이… 하아….
그녀는 침대에서 내려서려고 했다. 하려고 했던 식사나 해야겠다.
“잠깐. 벨리타.”
그가 때는 이때다 싶었는지 서둘러 다가왔다. 제지할 시간이 없었다.
그는 그녀를 달랑 안아 들어 올렸다. 갑작스러운 접촉에 당황한 건 벨리타뿐만은 아니었
다. 얼떨결에 몸이 먼저 움직였지만, 갑자기 그의 심장이 쿵쾅거리기 시작했다.
그녀를 안았다. 닿았다. 가까이 있다.
그녀의 얼굴에 혈색이 도는 걸 무척 다행으로 여기면서도 변함없이 아름답다는 생각을 했
다. 예뻤다. 사랑스러웠다. 그녀를 못 봐 금단 증상으로 계속 시름시름 아팠던 모양이다. 그
녀로 인해 자신이 치유되고 있었다.
되도록 천천히 걸었다. 금방 내려놓기가 싫어 천천히 걸어갔다. 자신의 품에 안긴 벨리타
를 느끼며, 그녀가 주는 무게감에 위로를 받으며 느리게 느리게 걸어 의자에 살며시 앉혀
주었다.
그녀는 그와 시선도 마주치지 않았다. 이렇게 갑자기 가깝게 접촉할 생각이 없었는데 당혹
스러웠다. 이러면 좋지 않다. 이럴 줄 알고 그가 접촉을 시도한 것인지도 모른다.
“내가 먹여 주겠소.”
스스로 생각하라 했더니 난처한 일만 골라 자처하고 나선다. 정말로 빵이며 수프며 하나하
나 떠서 먹여 주려 했다.
“지하에서 쪼그리고 있느라 다리가 아프지 손은 멀쩡해요.”
스푼을 쥔 그의 손이 허공에서 민망하게 멈추고 표정은 어둡게 변해 갔다.
벨리타는 제 손으로 직접 조금씩 먹기 시작했다. 아직 많이는 먹지 못해서 그런지 벌써 배
가 불러 왔다. 고기를 갈아서 넣은 스튜를 천천히 먹다 빤히 자신만을 바라보고 있는 그와
눈이 마주쳤다. 무슨 할 말이 있는 듯 보였다.
“나도 같이 먹어도 될까?”
그의 말에 벨리타는 잠시 움직이지 않았다. 자신을 위해 차려진 묽은 환자식 음식을 다시
한번 쳐다보았다.
“돌아가서 정찬을 드세요.”
“아니오. 지금 이거면 되었소. 좀 시장하군.”
정말이었다. 맛있는 냄새에 오래간만에 배가 고파졌다. 남은 스튜를 서둘러 입에 넣으며
칼리크는 맛있게 먹기 시작했다. 그녀가 앞에 있어서 그런지 식욕이 돌아오고 있었다. 사
실 그것보다 그녀와 함께 있고 싶은 이유가 더 컸다. 이러면 지금 당장 나가 보라는 말은
하지 않을 것 같았다.
그렇게 앞에 남은 것들을 그가 먹기 시작했다. 부드러운 빵과 수프를 떠먹고 보니 언제 제
대로 된 식사를 했는지 기억에 없었다.
어제처럼 바로 나가라 하지 않은 것만 봐도 희망은 있다. 안도해서 그런지 맛이 있었다. 요
리사가 바뀌었나 싶을 정도로 예전보다 더 맛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