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8화 황후궁으로 갈 것이오
둥근 달을 쳐다보아도 그 안에 그의 얼굴이 보였다. 미소 짓는 칼리크의 얼굴이 희미하게
보였다.
환한 달을 애타게 올려다보는 그녀의 표정은 점점 슬프고 쓸쓸하게 변해 갔다.
***
칼리크는 바짝바짝 말라 갔다.
먹는 것도, 자는 것도 제대로 하는 게 하나도 없었다. 벌이다 생각하고 달게 받고 있다. 벨
리타는 이보다 더한 고통을 받았다. 먹지도 자지도 못하는 건 아무것도 아니다. 보고 싶은
데 보지 못하는 것이 가장 고통스러웠다.
제 심정과는 반대로 저 밤하늘의 달은 눈부시도록 환하게 둥실 떠 있었다.
저런 달빛을 받으며 서 있던 벨리타가 떠올랐다. 온실에서 천사처럼 그 달빛을 타고 하늘
로 올라갈 것 같은 불안감에 휩싸인 것도 기억났다. 자신에게서 사라질 것 같은 불안감에
그녀의 손을 잡아끌었었다. 혹시 그것이 예언이었던가? 아니면 경고?
모두가 내 탓이다. 아무리 의심스러운 상황으로 진전되었어도 그녀를 믿었어야 했다. 씻을
수 없는 죄를 저질렀다. 거기다가 서쪽 탑에 연금시키기까지 했으니 그녀의 마음을 돌리는
건 어려울 수도 있다. 이젠 기회조차 가질 수 없으니 더 속이 무너졌다.
그대로 살면 안 되었냐고 벨리타를 원망했었지만, 이 모든 걸 망친 건 그녀가 아니라 바로
자신이다.
이런 아픔은 처음이다. 사경을 헤맬 정도로 가슴을 검에 베였을 때보다 더 아팠다. 겉으로
는 아무 상처가 없는데도 고통과 통증은 그것보다 더 심했다. 처음 겪는 일이라 뭐라 설명
이 안 되는 절망감이었다.
그녀가 배신했다고 생각했을 때, 자신한테 한 것이 모두가 거짓이었다고 생각했을 때 느낀
절망감과는 또 달랐다. 그때는 자신이 등을 돌렸다. 자신이 손을 놓았다. 하지만 지금은 벨
리타가 등을 돌린다. 이번에 완전히 그녀를 잃을 것만 같아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이렇게 가슴이 아플 줄은…
커다란 구멍이 뚫려 이렇게 공허할 줄은…
미처 몰랐다. 아니 이런 아픔이 있는 줄도 몰랐다.
말로만, 머리로만 홀리지 않는다고 큰소리쳤지 가슴은 푹 빠져 있었던 거다. 그걸 이제야
깨닫는다. 모든 것이 오만했다. 제 감정도 모르고 혼자 으스대던 꼴이라니. 그릇이 이거밖
에 안 되었던가. 이런데도 그 커다란 호랑이 신수가 자신에게 오다니. 호랑이를 보는 것조
차 미안했다.
그녀에 대한 감정이 많이 컸다. 늦게 깨달은 것뿐 이미 가슴은 알고 있었다. 보고 싶고 행
복해하고. 아버지가 어머니와 같이 있을 때도, 떨어져 있을 때도 늘 행복해했던 그 모습이
자신과 같았었다. 그런데도 제 마음의 크기를 알아차리지 못했다. 이것이 거만했다. 벨리
타가 더 자신을 좋아하고 있다 여기고 싶었던 오만함.
어떻게 해야 다시 그녀를 되돌려 놓을 수 있을까.
하아….
그녀가……. 그립다.
못 본 지 너무 오래되었다. 둥근 달을 쳐다보아도 그 안에 그녀의 얼굴이 보였다. 미소 짓
는 벨리타의 얼굴이 희미하게 보였다. 이러다간 얼굴도 잊어버리게 생겼다. 아니다. 잊기
는커녕 더 선명하게 떠오른다. 그리움에 사무쳐 눈이 다 아려 왔다.
환한 달을 애타게 올려다보는 그의 표정은 점점 슬프고 쓸쓸하게 변해 갔다.
***
서로가 달을 바라보며 그리워하던 괴로운 밤이 무심하게 흘러갔다.
“폐하. 쉬셔야 합니다. 쓰러지지 않은 것이 다행일 정도입니다.”
의원직을 겸하고 있는 보좌관은 황제를 진찰하고는 심각한 표정으로 말했다. 정말 이러다
간 큰일 난다. 어제보다 너무 확 나빠지셨다.
생기 잃은 눈동자, 시커먼 눈 주위, 홀쭉해진 양 볼과 더 날카롭게 보이는 턱선. 입술은 다
갈라져 허옇게 말라 있고. 입고 있으신 정복만 아니었으면 폐하인지 못 알아볼 정도였다.
아침에 일찍 황제 집무실로 나온 데인은 아니나 다를까, 폐하가 책상에 앉아 일하는 모습
을 보고는 기겁을 했다. 지금 막 시작하신 게 아니라 몇 시간 전부터 저러고 계셨다는 걸
직감으로 알 수 있었다. 얼른 보좌관을 불러 진찰을 시키고는 집무실 침상에 눕혔다.
“쉬셔야 합니다. 나머지 일은 제가 하겠습니다.”
데인의 강압에 못 이겨 눕긴 누웠다만 칼리크는 정말로 자신이 어떻게 해야 쉴 수 있는지
알고 있었다. 지난번에도 쉬려고 나갔다가 어디로 향했는지, 제대로 기분 전환 하고 돌아
온 곳이 어디인지, 아니 누가 자신의 심신을 쉬게 해 주었는지 잘 알고 있었다.
가자.
다시 자리에서 일어나는 황제를 데인과 보좌관이 말렸지만 거부했다.
“황후궁으로 갈 것이오.”
두 사람을 지나쳐 그는 비척거리는 발걸음으로 집무실을 빠져나갔다.
***
“비켜라!”
다시 자신을 막아선 유모에게 서늘하게 명령했다. 이미 참아 줄 한계를 넘어섰다.
황제의 목소리 하나만으로도 유모는 온몸이 쪼그라들어 뒤로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이번
엔 다르시다. 그동안 허탈하게 돌아가시던 모습이 아닌, 원래의 황제 모습으로 돌아가 있
었다. 여기서 잘못 덤볐다간 죽을 수도 있다.
바로 위험을 감지한 유모는 서둘러 달려 황제보다 더 먼저 황후 방에 도착했다.
“마마님. 어서 준비해야 해요.”
느긋하게 아침 식사를 하려고 하던 벨리타는 헐레벌떡 뛰어와 소리치는 유모를 의아한 듯
바라볼 뿐이었다.
“어서 누우세요. 침대에서 일어나지도 못한 사람처럼 누워 계셔야 해요.”
그녀를 일으켜 끌면서 유모가 속사포처럼 계속 떠들어 댔다.
폐하가 오시는 중이다, 회복이 안 되었다 하고 계속 방문을 거절했다, 회복 안 된 것처럼
구셔야 한다, 더 오래 막지 못해서 죄송하다….
“잠깐. 유모.”
이게 다 무슨 소리인지.
“그럼 칼리크가 매일 왔다는 말이에요?”
벨리타의 날카로운 목소리에 유모는 찔끔했다. 할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지만, 또 큰 실수
를 한 듯해 마마님 앞에서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벨리타는 시키는 대로 침대에 누웠지만, 머릿속은 복잡했다. 그동안 오지도 않는다고 원망
했는데 그게 아니었다는 말이다. 매일 찾아왔었다고 한다. 유모에게 뭐라 하진 않을 것이
다. 저를 위해 그리했을 것이다. 자신의 속마음을 몰라서 그랬겠지. 누가 되었건 쉽게 보고
싶진 않을 것이다. 이해한다. 하지만 그동안 속이 타들어 가던 시간이 또다시 억울해지긴
했다.
아!
그런 감정도 잠시 바로 문을 열고 황제가 방으로 성큼 들어왔다. 방 안에 있던 유모와 시녀
들은 도망치듯 밖으로 부리나케 달려 나갔다.
그리고는 문이 살며시 닫혔다.
쿵.
문 닫히는 소리가 들리지 않았는데도 한 공간에 둘만 남게 되자 심장 떨어지는 소리가 칼
리크의 귓가에 크게 들렸다.
저기… 저 침대 위에… 있다.
벨리타가 있다.
얼마 만에 보는 건지 다시 눈이 아려 왔다. 요즘 자주 눈이 아프다. 그래서인가 눈이 침침
해졌는지 저 멀리 누워 있는 그녀가 선명하게 보이지 않는다.
가까이 보고 싶은 마음에 그는 그녀에게 한 발 다가갔다.
“멈추세요!”
멈칫.
벨리타의 차가운 목소리가 그의 발끝에 꽂히듯 날아왔다. 황제인 자신한테 움직이지 말라
요구하고 있다. 다가오지 말라 명령하고 있다. 그 누구도 자신에게 이런 명령은 한 적이 없
다. 들어 본 적도 없는 말이다.
하지만 다 괜찮았다. 자신한테 말을 걸어 주었다는 사실, 목소리에 그래도 힘이 들어가 있
다는 사실, 생각보다 조금은 회복되어 보인다는 사실이 그를 안도하게 했다.
이미 보좌관이 벨리타의 몸 상태에 대해 경고해 주었는데 정말 다행이었다. 그녀가 눈앞에
보이자 들이마시는 공기마저 다르게 느껴졌다. 맑은 숲속에 들어와 있는 듯한 청량감이 느
껴져 숨이 제대로 쉬어졌다.
하지만 아무것도 해결된 것은 없다. 그저 얼굴을 본 것밖에는 없다. 자신은 아직 아무것도
시도하지 않았다.
“음… 몸은 어떻소?”
말 한마디 건네기가 너무나 어색했다. 그동안의 공백이 너무 컸다. 그냥 공백도 아니고 어
마어마한 죄를 짓고 그녀에게 가늠할 수 없는 큰 상처까지 주었다.
자신의 물음에 벨리타는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말조차 주고받고 싶지 않을 것이다. 다 이
해한다. 지금 얼굴을 보여 준 것만도 어디인가.
“식사는…. 잠은? 잘 자고?”
자신이 이렇게 말을 못 했던가 싶었다. 남들처럼 부드럽게 말할 줄도 모른다는 것도, 무뚝
뚝한 말만 던진다는 것도 새삼 깨달았다. 스스로 난감해 그다음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찾느
라 잠시 침묵이 흘렀다.
이렇게 간이 쪼그라드는 듯한 느낌도 처음이다. 눈치를 보고 있다. 생전 처음 누군가의 눈
치를 보고 있다. 다른 때 같았으면 기가 막히고 가당치도 않은 일이었지만 지금은 무엇이
되었건 다 상관없었다.
그녀가 돌아서 주기만 한다면.
“어디…… 상처 난 곳은… 약 잘 먹었고?”
벨리타는 잠시 적응할 시간이 필요했다. 칼리크가 이젠 앞뒤 맞지도 않게 말까지 버벅거린
다. 지은 죄가 있으니 당연하다.
몸? 식사? 잠? 누가 누구한테 물어보는 건지.
이런 걸 물어보는 칼리크에게 오히려 거울을 보여 주고 싶었다. 이런 몰골을 하고 나타나
다니. 자신이 알고 있던 칼리크의 얼굴이 아니었다. 판다로 오해받을 정도로 눈 주위가 시
커멓다. 그 잘생긴 얼굴이 아주 못나졌다. 이것 역시 자업자득이다.
“벨리타… 정말 미안하오.”
이 말부터 먼저 해야 했는데 당황했나 보다. 칼리크는 기사가 맹세하듯 몸을 낮춰 한쪽 무
릎을 세우고 바닥에 앉았다.
“정말 미안하오.”
그리고는 고개까지 숙였다. 황제로서 가장 큰 속죄 방법이었다. 누구에게도 자세를 낮춰
예를 갖춘 적은, 고개까지 숙인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벨리타는 황제로서 할 수 있는 최고의 사과를 하는 칼리크를 향해 시선을 고정시켰다. 고
개까지 숙일 줄은 몰랐다. 하지만.
사과는 당연한 거다.
“용서해 주시오.”
이 정도로 상처를 받고 보니 알겠다. 용서가 참으로 복잡하다는 것을 이제야 알겠다. 저 말
을 듣고 지금 용서해 준다고 하면 바로 하하 호호 할 수 있다는 말인가? 저렇게 말로 한 번
하고 용서해 주면 이대로 죄지은 사람은 속죄하고 죄가 사라지는 건가? 그럼 상처 입고 아
파했던 자신의 마음은?
처음 마음을 주고 사랑까지 나눈 남자라 쉽게 놓지 못한 건 사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