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7화 큰일 날 뻔했어
벨리타는 가냘픈 핀핀의 몸을 따뜻하게 안아 주었다. 몽실이를 똑 닮은 토끼같이 착한 핀
핀을 한없이 도닥거려주었다.
고맙다. 정말 고맙다. 핀핀.
앞으로는 내 가까이 있어라. 내가 받은 걸 다 돌려줄게.
네가 날 돌봐 주었듯이 이젠 내가 널 돌봐 줄게.
황후의 방에서는 훈훈한 기운이 넘쳐흘렀다.
황후가 회복됨에 따라 황후궁 분위기는 점점 안정되어 가고 있었다.
***
벨리타는 유모와 마찬가지로 핀핀을 항상 제 곁에 두었다. 손에 난 상처에 고바 기름을 꼼
꼼히 발라 주고 이번에는 등에 딱지가 앉은 상처에까지 발라 주었다.
“이제 곧 상처도 없어질 거야.”
자신이 먼저 이 기름을 발라 봐서 안다. 하루 만에 얼마나 싹 낫는지. 무슨 마법의 액체 같
았다.
연거푸 고맙다고 앵무새처럼 반복하는 핀핀의 모습을 그녀는 세세하게 점검했다. 잘 씻기
고 잘 먹였더니 피부부터 달라졌다. 얼굴도 깨끗해지고. 좀 살이 포동포동 오르면 더 귀여
워질 얼굴이었다. 이제는 자신 앞에서 덜 긴장하는 핀핀의 모습에 뿌듯하기도 했고.
핀핀은 아직 다 회복되지 않으셨는데도 자신을 더 챙기시는 마마님께 한없이 고마웠다. 괜
찮다고 연거푸 말해도 아직 멀었다고 하시며 계속 저를 위해 주셨다. 지나간 세월에 대한
보상은 다 받은 것 같은데 마마님께서 멈추지 않으신다. 요즘엔 너무 행복했다. 뭘 받아서
행복한 것이 아니라 다시 마마님 옆에 있게 되어 너무 행복했다.
***
“마마님께서 여전히 무리십니다.”
유모의 환장할 말에 칼리크는 속이 터졌다.
매일 황후궁에 들렀는데 벨리타의 몸 상태가 안 좋아 안 된다고 계속 퇴짜를 맞고 있었다.
“몸은 좀 어떤가?”
“조금 차도는 있으시나 아직 무리하시면 안 됩니다. 침대에 누워만 계십니다.”
의원인 보좌관 말로도 회복하려면 시일이 꽤 걸릴 거라 했다. 그게 얼마나 걸릴지 몰라 답
답해 미칠 지경이었다. 만나기라도 해야 뭘 하든가 말든가 하지. 아예 그럴 기회조차 주어
지지 않고 있었다.
또다시 씁쓸하게 돌아서던 칼리크는 우뚝 걸음을 멈추었다. 혹시… 만나기 싫어서 이러는
건 아니겠지?
원래 싫은 사람 만나지 않을 핑계로 아프다고 한다던데… 아니다. 예전에도 벨리타는 정말
로 아팠었다. 그때는 제 맘대로 문을 열고 황후 방으로 들어갈 수 있었는데 지금은 그것도
할 수가 없었다. 오로지 지은 죄 때문에. 게다가 보좌관까지 같은 말을 했으니 사실일 것이
다.
다시 걸음을 옮기는 황제의 뒷모습을 보며 유모는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보좌관에게도 신신당부했으니 당분간 폐하는 마마님을 만나지 못할 것이다. 계속 거절할
생각이다. 보좌관과 연락을 자주 주고받다 보니 아주 친해져 설득할 수 있었다.
지금 좀 쉬어야 한다. 바로 만나면 오히려 역효과가 날 수 있다. 폐하를 위한다면 회복이
아주 오래 걸린다고 말해 달라.
마마님에게 시간을 드려야 한다. 이렇게 설득했다. 다행히 고개를 끄덕였다. 최근 보좌관
이 자신의 말을 잘 들어주어 더 괜찮은 사람 같아 보였다. 때로는 자신을 보러 찾아오기도
했다.
유모는 문을 열고 들어가며 핀핀과 소파에 나란히 앉아 차를 마시며 이야기를 나누고 있
는 마마님에게 다가갔다. 혈색도 많이 좋아지시고 기력도 회복해서 누굴 만나지 못할 정도
는 아니었다. 하지만!
마마님을 위해 문을 열어 주지 않을 것이다. 폐하께서도 한번 고생 좀 해 보셔야 한다. 마
마님이 겪은 고생엔 어림도 없겠지만 그거라도 해야 한다. 유모는 아주 한이 맺혀 있었다.
“마마. 약 드실 시간입니다.”
유모는 약초 달인 물을 건네주며 아주 흡족하게 미소를 지었다. 좋은 거란 좋은 건 지금 다
해 드리고 있다. 이제는 안심해도 되는 단계였다. 그러나 폐하는 더, 아주 더 기다리셔야
할 것이다. 유모의 미소는 더 깊어지기만 했다.
***
“안톤. 좀 더 쉬지 않고 나왔는가?”
데인은 자신의 집무실에 나타난 안톤에게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그 힘든 일을 하고
돌아왔는데, 며칠은 더 푹 쉬라고 폐하께서도 말씀하셨는데 바로 이렇게 나오다니. 여러모
로 걱정이 되었다.
“아시잖습니까. 저는 여기에 있는 것이 쉬는 겁니다.”
안톤을 누가 말리겠는가.
빙그레 웃던 데인은 이내 얼굴이 심각해졌다.
“황후마마 일입니까?”
고개를 끄덕이는 데인을 보며 안톤도 마음이 무거워졌다. 폐하와 벌어진 틈이 전혀 메워지
지 않고 있어 안타까운 마음뿐이었다.
“오늘 펠론국으로 보낸 기사에게 답을 들었네.”
아. 황후마마가 전해 준 그 정보?
“이거야 원….”
“왜 그러십니까?”
데인은 난감한 얼굴이 되어 안톤을 잠시 쳐다보고만 있었다.
“우리 둘이서 의논 좀 하세.”
비밀이라는 소리다. 그거야 문제없다.
“그 오아시스. 펠론국에서는 전혀 모르는 일일세.”
안톤의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이게 다 어떻게 된 일이지?
“황후마마가 그건 거짓으로 말한 거였네.”
그래야만 하는 이유를 안톤은 알지 못했다. 이어 데인이 그 답을 해 주었다.
“그래야만 정말 어디서 그 정보를 얻었는지 감출 수 있고 우리가 믿어 줄 테니 그리하셨던
것 같네.”
그래도 오아시스가 있다는 건 사실이었으니 그건 별로 중요한 일은 아니지 않은가. 안톤은
그리 생각했다.
“감춘 이유가 뭘까….”
“다른 사람들이 알면 안 되는 이유겠죠.”
“맞아. 혹 다른 남자한테 알아낸 거라든가.”
안톤도 그제야 이해가 되었다. 폐하가 알면 안 되었기에 펠론국에서 들었다고 꾸며 낸 것
이라는 걸. 수많은 남자를 만났던 황후다. 그러니 그중에 비밀을 털어놓은 사람도 있었을
것이다. 시종부터 다른 나라에서 온 대사, 왕자까지 황후가 손댄 남자가 셀 수 없이 많았다
는 건 두 사람 다 너무나 잘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두 사람은 다른 나라 왕자나 대사 같은 사람에게서 알아낸 정보라는 결론을 내렸다.
“큰일 날 뻔했어. 자네가 돌아오지 않았다면 황후마마는….”
데인은 고개를 빠르게 저었다. 생각하기도 싫은 부분이었다.
“자네가 돌아오지 않았는데 이 사실을 고했더라면 그 자리에서 처형하라 하셨을 걸세.”
그러고도 남는다.
안톤이 죽은 마당에 펠론국도 모르는 오아시스 이야기는 완전한 거짓말이 되는 것이다. 그
러니 함정이고 계략이라고 더 몰고 갔을 것이다. 지금보다 상황이 더 나빠졌을 테고 끔찍
한 일이 벌어졌을 것이다. 그렇게 되지 않은 건 천만다행이었다.
“그러니 폐하께는 고하지 말까 하네. 어찌 생각하나?”
“저도 같은 생각입니다. 지금도 사이가 나빠지셨는데 황후마마의 남자관계를 들추는 꼴이
될 것 같습니다. 누구에게 들었건 오아시스는 분명 찾았으니 그건 덮는 게 맞다 봅니다.”
데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개인적으로 그 정보는 사라진 에단 스톤과 연관이 있지 않을까
싶었다. 어찌 되었건 우리 제국에 이로운 정보였다. 에단 스톤에 대해서는 더 조사해 보면
될 일.
“그래. 황후마마가 굳이 감추려 한 걸 들출 필요는 없을 것 같네.”
두 사람은 조용히 이 사실은 묻기로 했다. 어찌 되었건 그 중요한 사실을 전해 주었고 오아
시스를 찾았으니 큰 공을 세운 것이다.
황후가 폐하를 마음에 두고 있지 않았다면 이런 일을 할 이유가 없다. 적극적으로 나섰다.
폐하를 위해 그 정보를 알려 주려고 엄청나게 달려왔다. 그건 진심이라는 소리다. 폐하를
생각하는 마음이 그만큼 크다는 소리다. 그러니 사이가 더 벌어질 일은 만들지 않는 것이
옳다.
데인은 살짝 의문이 가는 건 있었다. 예전 황후는 오아시스 같은 그런 정보에 관심이 아예
없었다. 나라가 어찌 돌아가는지, 예산을 어떻게 써야 하는지 그 어떤 것도 신경 쓰지 않았
다.
놀고 즐기는 일 외에는 나라가 망해도 신경 쓰지 않을 것 같은 사람이었다. 그런데 그런 관
심도 없는 이야기를 귀담아들었고 짧은 내용도 아니었는데 세세한 방법까지 자세히 기억
하고 있다니.
그것이 의문이긴 했다. 어찌 되었건 폐하와의 일만 원만히 해결된다면 이보다 더 좋을 순
없다. 폐하가 얼마나 지금 속을 끓이고 계실지 그것만 생각하면 갑갑할 뿐이었다.
***
벨리타는 창가에 앉아 핀핀과 밤하늘에 둥실 떠 있는 둥근 달을 바라보며 조용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이제 저녁에는 핀핀이 그녀와 같이 이 방에서 생활한다.
같이 잔다는 말이다. 침대를 하나 더 들여놓았다. 이렇게 하니 유모가 훨씬 편해졌을 것이
다. 너무 밤낮으로 고생만 해서 늘 안쓰러웠는데 낮에는 유모가 곁에 있고 밤에는 핀핀이
곁에 있는 걸로 정했다. 이제부터는 밤에 유모도 제 방으로 돌아가 편히 쉴 수 있을 것이
다.
유모는 핀핀이라면 믿고 맡겨도 안심이 되기에 마마님 명에 따랐다. 이렇게 배려해 주시는
마마님이 한없이 고마웠다. 그렇게 한가해진 저녁 시간을 유용하게 사용할 수 있었다.
“마마. 펠론국이 그립진 않으세요?”
그냥 침묵했다. 거짓을 말할 수도 없고 아니라고 할 수도 없고. 그냥 자연스럽게 넘어갔다.
알지도 못하는 펠론국이 그리울 이유는 없다. 그리운 건 따로 있다.
저런 달빛을 받으며 칼리크가 자신을 업어 줬는데. 온실에서 참 좋았는데.
온통 칼리크 생각만 하고 있었다. 그때로 돌아갔으면….
핀핀이 눈치 빠르게 더 이상 묻지 않아 그것도 기특했다.
지금 탑에서 나온 지 일주일째인데 칼리크는 찾아오지도 않는다. 무슨 생각을 하느라 오지
도 않는 걸까? 너무 미안해서?
미안할 거다. 아주 많이 미안할 거다. 그런데 그 사과가 하기 싫어 이리도 모른 척하는 건
아니겠지? 그렇게 비겁하려고.
그럼 뭐지?
유클로와의 전쟁에 중요한 문제를 해결했으니 거기에 몰두하느라 나 같은 건 잊었나? 다
시 전쟁광으로 돌아갔나? 이러다 바로 출정하는 건 아니겠지?
그게 아니면 혹시… 사과할 줄을 모르나? 지금까지 누구한테 사과해 본 적이 없을 테니 어
떻게 해야 하는지 모를 수도 있다. 그렇다고 지금까지 안 와? 지하에 갇혀 있을 때도 외면
하더니 지금도 이런단 말이지.
너무한다.
이렇게 가슴이 아픈데….
커다란 구멍이 뚫려 이렇게 공허한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