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6화 울고 싶은 만큼 다 울어
저지르지도 않은 죄 때문에 지금 마마님이 어떤 지경에 이르렀는지 생각만 해도 억장이
무너진다. 거기다가 물 한 모금 먹이지 말라 명한 황제였다.
그렇게 해 놓고는 지금 와서 뭐 하러 만나려 하는지, 우리 마마님을 뭘로 보고. 절대로 만
나게 할 생각이 없다. 철통같이 막아 내고 말 것이다. 마마님이 지금 가장 만나기 싫은 사
람이 누구겠는가. 유모는 점점 더 비장한 눈빛이 되어만 갔다.
***
벨리타는 조금씩 회복되어 가고 있었다. 유모가 정성 들여 달인 약초 물 덕분에 이제는 오
래 앉아 있을 수 있을 정도로 기운을 차리고 있었다.
처음 쓰러져 있던 지하에서 다시 누군가에게 업혀 황후궁으로 돌아왔을 때는 잠에 취해
있어 잘 기억이 나질 않았다.
어렵게 눈을 떴을 때 자신이 꿈을 꾸고 있다 여겼다. 바로 눈앞에서 눈물만 줄줄 흘리며 흐
느끼는 유모를 위시해 자신이 깨어났음을 기뻐하는 시녀들까지 보이고 있어 당연히 꿈이
라 생각했다.
그 와중에도 그 아이, 핀핀을 찾았다. 보이지 않았다. 어디 갔지…. 아. 꿈이라 보이지 않는
건가…. 거기까지를 끝으로 또다시 잠이 들었다. 심신이 지쳐 있어서 그런지 오랫동안 잠에
빠져들었다.
다음 날은 겨우겨우 안톤 대장을 접견하고 다시 누워 안정을 취했다. 안톤이 돌아가고 나
서도 얼마나 많이 눈물을 흘렸는지 모른다. 자신이 틀리지 않았다는 것이 마음의 짐을 다
덜어 냈다. 안톤과 원정대도 무사하다니 이젠 다 됐다. 그렇게 안심이 되어서인지 그녀의
회복이 점점 빨라졌다. 물론 유모와 시녀들이 지극정성으로 보필한 것도 한몫했다.
다음 날은 앉아서 제 손으로 미음을 떠먹을 수 있을 정도까지 되었다. 유모가 먹여 주려 했
지만 스스로 한다 했다. 작은 것이라도 더 이상 자신으로 인해 고생하지 않기를 바랐다.
유모는 마마님의 그 고마운 인사를 절대 잊지 못한다.
[유모는 꼭 사셔야 합니다. 저를 위해서. 이건 명령입니다.
그동안 정말 감사했습니다.
더 잘하지 못해서 정말 죄송합니다. 시간이 더 있을 줄 알았는데 제 잘못입니다.]
그 말씀은 너무나 고마웠다. 하지만 하늘이 무너지는 기분이었다. 이대로 정말 큰일이 날
까 봐 뼈와 살이 다 타들어 가는 시간이었다. 이제는 위기를 모면했으니 더 잘 모실 것이
다. 더한 충성으로 마마님을 목숨 바쳐 보호할 것이다.
그런 유모의 정성 덕분에 다음 날은 부축을 받으며 방 안을 살살 걸어 다닐 수 있을 정도
까지 되었다. 깨끗한 목욕물에 제대로 씻고 나오니 좀 어지럽기는 했지만 개운했다. 이제
는 조금 더 걸쭉한 미음을 먹으며 혈색도 조금씩 돌아오고 있었다.
“유모. 핀핀은…?”
그 아이부터 물어보았다. 어느 정도 기력을 회복하자 핀핀이 보고 싶었다. 가장 암울할 때,
참담한 장소에서 유일하게 저를 돌봐 주었던 핀핀. 제 옆에 있어 주었던 핀핀이 보고 싶었
다.
“마마….”
전부터 말씀드리려고 했는데 지금 마마님의 상태도 걱정이 되어 유모는 다소 망설였다.
“핀핀은 누군가요? 왜 거기에 나타난 거죠?”
대답하기 앞서 좀 전보다 더 조심스러워하는 유모의 태도가 의아했다. 그 아이에 대해 너
무나 궁금해진 벨리타는 눈으로 재촉했다.
그때 그 느낌이었다. 언젠가 유모가 말할 듯, 말 듯 하다가 안 했던 것을 기억해 냈다.
벨리타의 눈빛에 용기를 얻은 유모는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예전 기억이 흐릿한 마마님이 충격을 받지 않을까 망설였지만 지금 설명해 드리기로 마음
먹었다.
***
벨리타는 유모가 전해 준 말을 다시 떠올리며 조용히 기다렸다.
핀핀.
펠론국에서 이 나라로 같이 온 하녀. 유모와 함께 벨리타가 강력히 주장해서 데리고 온 하
녀였다고 한다. 그녀가 5살 때 말동무로 들어온 동갑내기 어린 하녀로 벨리타가 침대에서
같이 잘 정도로 엄청나게 아꼈다고 한다.
원래 이름은 피니. 벨리타가 어릴 때 핀핀이라 부르는 통에 그냥 핀핀이 되어 버렸단다. 그
런 그녀를 1년 전쯤 벨리타가 얼씬도 못 하게 내쳤다 한다.
어머니가 손수 만들어 주신, 벨리타가 가장 아끼는 드레스를 핀핀이 찢어 버려 제정신이
아니었다 한다. 대노한 벨리타가 누구 말도 듣지 않은 채 그날 바로 제일 고된 빨래방 일과
꿇어앉아 바닥을 닦아야 하는 일을 하라 내쳤단다.
목숨을 살려 주는 것만으로도 고마워하라면서. 물론 엄청나게 매질을 당한 후에 실려 나갔
다는 말까지 유모는 친절하게 덧붙였다. 그 뒤로 핀핀은 매일매일 그 일을 하며 마마 눈에
띄지 않게 미로같이 생긴 지하에서 묵고 있다 알려 주었다.
“절대로 핀핀이 한 일이 아닙니다.”
설명을 마친 유모가 조금 전 확신에 찬 목소리로 벨리타에게 그렇게 말했다.
지금의 벨리타에겐 전혀 알 수 없는 일이었지만 유모는 핀핀이 누명을 쓴 거라 말하고 있
었다. 그 당시에는 유모도 말 한마디 건넬 수 없었다고. 오죽 길길이 날뛰었으면 그랬을지
안 봐도 훤했다.
핀핀이 놀라 그 찢어진 드레스를 손에 들고 있었을 뿐 절대 찢지 않았다고, 또한 그 방에
다른 시녀 두 명이 더 있었다고 한다. 엘라와 리자.
엘라는 그냥 소심하고 나서기 싫어하는, 조용한 성격이었다. 그리고 리자.
흠…….
뭔가 냄새가 났지만 내색은 하지 않았다.
“마마. 핀핀을 데리고 왔습니다.”
유모의 목소리에 이어 문이 열리고 있었다.
드디어.
벨리타는 기대에 찬 눈으로 들어오는 사람을 쳐다보았다. 고개를 푹 숙인 채 주눅이 든 모
습으로 유모 뒤를 따라 들어오는 핀핀은 너무 왜소해 보였다.
그때는 제정신이 아니어서 몰랐는데 팔다리도 가늘고 바람에 날아갈 정도로 말랐다. 훨씬
어리게 보았는데, 그래서 처음엔 아이라 여겼는데 저와 동갑이라니. 저 몸으로 땅속을 헤
치며 달려와 저를 보살펴 주었던가. 너무나 고마운 핀핀이었다.
몸에 두른 앞치마 앞에 두 손을 꼭 쥐고 핀핀은 한껏 굳어 있었다.
오래간만에 들어오는 황후궁이라 그런지 핀핀은 너무 긴장되었다. 이곳으로 오면서 옆방
에 앉아 있던 리자와 눈이 마주쳐서 더 그런지도 모르겠다. 자신을 이렇게 만든 사람이 누
구인지는 알고 있었다.
“핀핀. 어서 정식으로 인사드리지 않고 뭐 하는 거냐?”
유모의 핀잔에 흠칫 놀란 핀핀이 개미만 한 목소리로 겨우 인사를 했다.
“그냥 이리 와 보아라.”
잔뜩 움츠린 핀핀이 그녀의 말에 쭈뼛쭈뼛 고개를 천천히 들어 올렸다.
정말 몽실이를 똑 닮았다. 지하에서도 그렇게 여겼지만 새까만 눈동자에 동그란 눈매, 오
밀조밀한 눈코입이 제가 전생에서 애지중지 키우던 애완 토끼 몽실이를 닮았다. 그래서인
가 더 정이 갔다.
“지하에서는 펄펄 날아다니더니 여기서는 왜 이리 긴장해 있느냐.”
그녀가 그렇게 말을 하자 유모가 핀핀의 등을 떠밀다시피 하여 벨리타에게 가까이 다가가
게 했다.
소파에 앉아 있던 벨리타의 눈에 꼭 틀어쥐고 있는 핀핀의 두 손이 보였다. 가까이서 보니
터지고 갈라져 손이 엉망이 되어 있었다. 이것도 보지 못했었다.
“지하에서는 항상 가까이 잘 다가오더니 여긴 낯설어서 그러나?”
벨리타는 핀핀의 손을 가만히 쥐어 자신에게 끌어당겼다.
손에 쥐고 보니 거칠기는 또 얼마나 거친지. 손으로 가만히 핀핀의 손등을 쓸었다. 눈이 휘
둥그레진 핀핀의 얼굴을 안쓰럽게 올려다보는 벨리타의 가슴이 미어졌다.
핀핀은 다시 이렇게 기력을 회복한 마마님의 모습만으로도 감사하고 행복했다. 그런데 제
거친 손등을 쓰다듬어 주시는 마마님 손길에 감정이 북받쳐 올라왔다.
“핀핀. 너무 고마웠다.”
뚝.
투둑.
벨리타의 눈물이 아니었다. 마주 잡은 손으로 하염없이 떨어지는 눈물은 핀핀의 것이었다.
“마…마…….”
울먹이느라 말도 제대로 하지 못하는 핀핀의 모습이 가슴 아팠다. 이 토끼같이 연약하게
생긴 핀핀한테까지 무슨 짓을 한 건지. 뭐라 말을 건네려 했지만, 그녀 역시 목이 잠겨 몇
번이고 목을 가다듬어야 했다.
“그동안 고생 많이 했다.”
겨우 그 말밖에 하지 못했다.
핀핀이 크게 울음을 터트리며 바닥으로 쓰러지듯 꿇어앉았다. 그리고는 맞잡은 벨리타의
손등에 눈물 젖은 얼굴을 비비며 너무나 서럽게 울기 시작했다.
“어허. 핀핀. 이게 무슨 짓…….”
벨리타는 뒤에서 질책하려는 유모를 눈짓으로 멈추게 했다. 유모 또한 두 눈에 물기가 어
려 있었다. 핀핀이 얼마나 고생을 많이 했는지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어서였다.
벨리타는 손을 올려 엉엉 울고 있는 핀핀의 머리를 가만가만 쓰다듬어 주었다.
그래. 다 울어.
울고 싶은 만큼 다 울어.
내가 앞으로 잘할게.
그럴 기회가 없을까 봐 지하에서는 너무나 안타까웠는데 신이 도와주셨다.
핀핀과 어릴 때부터 어떻게 지내 왔는지 기억에 전혀 없다. 하지만 가슴으로 느낄 수 있었
다. 최소한 핀핀이 어떤 아이인지, 천성이 얼마나 착한 아이인지, 그렇게 매몰차게 내친 이
몸에게 그 위험을 무릅쓰고 얼마나 잘했는지 그걸 모른다면 사람도 아니다.
리자 같은 애는 곁에 두고 이런 핀핀 같은 애는 홀대하고. 잘하는 짓이다. 벨리타.
핀핀이 당했을 고통을 생각하자 벨리타의 눈에서도 눈물이 조용히 흘러내렸다.
유모는 그동안 마마님이 다른 이들에게 사랑받는 존재가 되게 해 달라고, 존경받는 존재가
되게 해 달라고 그렇게나 많이 빌었다. 그 소원이 이루어졌다. 고개를 들어 눈을 꼭 감고
신에게 감사를 드렸다.
“유모. 먹을 것 좀 가지고 와요.”
제대로 먹지도 못하고 살았던 게 분명한 핀핀의 얼굴을 벨리타는 진심을 다해 쓰다듬어
주었다. 눈물에 젖은 핀핀의 뺨을 닦아 주며 미안하다, 미안하다 속삭였다. 눈물을 그치게
하려고 애쓰고 있는데 오히려 벨리타의 말에 핀핀은 더한 눈물을 쏟아 냈다.
핀핀은 그동안의 설움과 고통스러웠던 나날들이 한꺼번에 씻어 내려가는 것 같았다. 지하
방에서는 워낙 상황이 좋지 않았고 마마님이 황후궁으로 돌아가신 걸 알았을 때도 회복하
시기까지 오래 걸릴 거라 여겼었다. 그런데 이렇게 일찍 불러 주실 줄은 몰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