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5화 만나실 수 없습니다
기사 한 명이 반항하자 무시무시하게 생긴 도적 떼 두목이 바로 도끼 같은 칼로 그의 어깨
를 내리찍었다. 몸을 굴려 간신히 피했지만 스치고 지나가며 어깨에 기다란 상처를 입었
다. 별다른 조치를 취해 주지 않아 그 상처 때문에 고통받고 있던 부하가 점점 위험해졌다.
매일 차례대로 끌려 나가고 있었는데 그날 밤은 안톤 차례였다.
발을 묶은 밧줄만 풀어 줬다 뿐이지 손은 등 뒤로 돌린 채 꽁꽁 묶여 있는 채였다. 20명 남
짓 되는 도적 떼들이 모여 앉아 낄낄거리며 제일 먼저 바닥을 기라고 했다. 커다란 돌 위로
널찍한 나무판을 올려 탁자처럼 만든 그 위에 술병과 먹을 것들이 늘어져 있었다. 어느 정
도 다들 거나하게 취해 있는 상태였다.
오아시스 주변은 모래로 뒤덮인 사막과는 달리 바닥이 딱딱한 흙과 바위투성이였다. 그곳
을 기라고 하니 무릎에 피멍이 들었다. 지금 기회를 잡아야 한다. 이대로 돌아가면 이 비참
한 생활이 언제 끝날지 모른다. 다친 부하가 제일 걱정이 되었다.
안톤은 기면서 널찍한 나무판 근처로 다가가 일부러 비틀거리며 나무판을 엎어 버렸다.
와장창.
그 위에 있던 술병이 깨지는 소리가 요란하게 났고 음식들이 바닥으로 흩어졌다. 사나운
욕지거리가 날아오고 그 위로 쓰러져 있는 안톤을 향해 발길질이 이어졌다.
그래도 참아 냈다. 흥이 깨져 버린 도적 떼들은 맞고 쓰러져 있는 안톤을 질질 끌어다가 다
시 철창에 집어 던졌다. 다시 한번 욕지거리를 하며 침까지 뱉고는 그들이 씩씩거리며 멀
어졌다. 그 안에 갇혀 있던 4명은 걱정이 되어 앉은 채로 기어서 안톤에게 다가왔다.
“난 괜찮다. 한 명은 얼른 망을 보아라.”
다행히 크게 다친 것 같지 않아 안도한 기사들은 그의 명령에 따랐다. 도적 떼 모르게 할
일이 있었다.
안톤은 뒤로 묶인 손을 펴서 그들에게 보여 주었다. 거기에는 깨진 술병의 유리 조각이 놓
여 있었다. 난장판이 된 그 와중에 안톤은 그들 모르게 재빨리 유리 조각 하나를 손에 쥐었
던 것이다.
다른 기사 한 명의 뒤로 돌아가 손에 묶인 밧줄을 유리 조각으로 계속 문질렀다. 다행히 그
물망처럼 단단한 밧줄이 아니라 평범한 것이어서 한참을 그리하자 뚝 끊겼다.
그다음은 빨라졌다. 손이 자유롭게 된 기사가 다른 이들의 밧줄을 모두 끊었다. 하지만 여
전히 묶여 있는 척을 해야 했다. 도적 떼들이 눈치채지 않게 5명 모두 자유로워진 손을 뒤
로 숨긴 채 기회를 기다렸다.
다음 날 밤, 또다시 도적 떼 두 명이 철창문을 열고 들어왔다. 그날도 또 한 명을 끌어내기
위해서 들어온 그때를 노렸다.
5명이 달려들어 도적 둘을 때려눕히고는 그들이 차고 있는 검을 빼 들고 드디어 철창 밖으
로 튀어 나갔다. 이미 거나하게 취한 도적 떼들이 기겁을 하고 덤벼들었으나 고도의 훈련
을 받은 정예 기사들에게는 대적이 되지 않았다. 그들이 모두 쓰러지기까지 그리 긴 시간
이 걸리지 않았다. 그렇게 제압을 하고는 바로 날이 밝자마자 말을 타고 황궁으로 달려온
것이었다.
안톤은 예정된 날짜보다 상당히 늦어져 폐하가 어떤 걱정을 하실지 그게 염려스러웠다. 그
리고 황후가 어찌 되었을지 그것 역시 염려스러워 말의 박차를 가했다.
그렇게 그들은 돌아왔다.
그날 밤은 모두가 축제 분위기였다. 대단한 업적을 이루고 돌아온 영웅들의 환영 파티였
다.
그러나 진정한 영웅은 따로 있었다. 이 모든 정보의 제공자. 벨리타.
벨리타 문제만 빼고는 모든 것이 축복이었다.
안톤은 데인에게 모든 사정을 듣고는 안타까워했다. 본의 아니게 도적 떼한테 잡히는 바람
에 돌아오는 것이 늦어져서 이 사달이 난 것이다. 제때 맞춰 돌아왔더라면 이 자리에 황후
까지 참석하여 그야말로 대축제의 밤이 되었을 텐데, 모든 것이 자신의 불찰 같아 가시방
석이었다. 그는 자신의 책임이 크다는 것을 통감하며 어찌해야 하나 심각하게 고민했다.
***
“아무도 들이지 말라 하셨지만 근위대장님은 특별히 허락하셨습니다.”
황후궁 전체가 어둡게 가라앉아 있다는 건 안톤이 들어설 때부터 알아차렸다. 날이 밝자
가장 먼저 황후궁에 찾아온 안톤은 다행히 황후가 저를 만나 줄 의향이 있다는 걸 전해 듣
고 안도부터 했다.
“지금 몸 상태가 많이 안 좋으셔서 누워 계십니다. 그 점은 이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저를 안내하는 시녀의 목소리가 심히 딱딱하고 고자세였다. 반기지 않는다는 내색을 풀풀
풍기고 있었지만 지금 그런 걸 생각할 여유 같은 건 없었다.
다소 어둡게 해 놓은 황후 방으로 들어간 안톤은 잠시 문 앞에 서 있었다. 일어날 힘도 없
어 보이는 황후가 유모의 도움으로 겨우 침대에 기대앉는 모습을 숨죽이며 지켜보아야 했
다. 어깨까지 들썩이며 숨을 몰아쉬는 황후의 상태가 나빠 보여도 너무 나빠 보였다. 이 모
든 것이 자신 탓이라는 생각에 안톤은 조심스럽게 다가가 황후 앞에서 몸을 낮추었다.
“황후마마. 모든 것이 제 불찰입니다. 용서하여 주십시오.”
진심이었다. 이분이 어떤 분인데 이런 고초를 겪어야 했다니. 돌아오면서 황후에 대한 생
각이 완전히 바뀌었다. 지금 어떤 일을 해냈는지 어서 돌아가 폐하에 이어 황후에게도 충
성을 맹세할 생각이었다. 그런데 이번 일로 그 좋던 두 분 사이마저 틀어져 버렸다. 어마어
마한 불충을 저질렀다.
안톤은 고개를 숙인 채 움직이지 않았다.
“고개를… 드세요.”
말하기조차 힘들어 겨우 목소리를 내고 있는 황후를 안톤은 죄스러운 마음으로 올려다보
았다.
세상에. 이런 몰골이 되다니.
가까이서 본 황후의 얼굴은 말이 아니었다. 눈가는 시커멓게 그늘져 있었고 말라비틀어진
입술은 허옇게 일어나 있었다. 얼굴빛도 칙칙하게 죽어 있었고 무엇보다 황후의 눈빛이 죽
은 자의 그것처럼 탁하게 흐려져 있었다. 마치 오늘내일하는 사람처럼 보였다. 가슴이 미
어졌다. 감정에 휩싸이는 편이 아닌데도 불구하고 이런 황후의 모습에 죄책감이 들었다.
“살아… 돌아온 것만도… 고맙습니다.”
그러니 죄송하다는 말은 하지 마세요. 정말 고맙습니다.
황후가 미처 다하지 못한 그 뒷말도 안톤의 귀에 들리는 듯했다. 가슴이 먹먹해진 안톤은
시간이 지체된 사정을 간단히 황후에게 설명했다. 그리고는 다시 한번 머리를 조아렸다.
“이 모든 것은 황후마마의 덕입니다. 이 한 몸 황후마마님을 위해 충성을 다하겠습니다. 맹
세가 늦어 죄송할 뿐입니다. 그러니 어서 쾌차하십시오.”
진심을 다해 그는 황후를 섬겼다. 고개를 든 그의 눈에 황후가, 파리하게 쓰러질 듯 자리에
앉아 있는 황후가 말없이 눈물을 흘리는 것이 보였다. 어찌해야 하나 당혹스러웠다.
벨리타는 숨 쉬기도 힘든 상태에서도 안톤에 대한 고마움이 앞섰다.
그랬구나. 내가 틀리지 않았구나.
소설에 자칼단이 오아시스에 터를 잡을 때 그곳에 먼저 진을 치고 있던 도적 떼를 소탕하
고 나서 자리를 잡는다는 구절이 있었다. 특히 끔찍하게 생긴 그 두목이 악명 높았다.
이걸 내가 간과했구나. 그 도적 떼를 잊고 있었구나. 내 잘못이구나.
큰일 날 뻔했다. 이들이 오아시스를 찾고서도 그 도적 떼에게 죽임을 당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더 깊이 생각하지 못한 자신의 탓이 크다. 자신도 자신이지만 이들이 얼마나 고
생을 했을까. 그래도 이렇게 무사히 귀환해 주어서 그저 감사할 뿐이었다.
“고맙…습니다.”
감정이 격해지니 호흡이 더 거칠어졌다. 그 말을 끝으로, 그녀 옆에 딱 붙어 있던 유모가
굳은 얼굴로 그만 면담을 끝내야겠다며 안톤을 일어서게 만들었다.
인사를 정중히 한 뒤, 안톤은 아쉬움을 남기고 방에서 나왔다. 황후를 알현은 했으나 안타
까운 심정은 풀리지 않고 여전히 안에서 그를 괴롭혔다.
더 이상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어찌하면 좋은지 데인과 상의해 봐야 할 것 같다. 데인 역
시 속이 타들어 가고 있을 것이다. 후… 절로 한숨이 새어 나왔다.
***
“어제도 그러더니 오늘도 같은 소리인 것이냐.”
다음 날 칼리크가 다시 황후궁을 찾았을 때 유모는 어제와 똑같이 아직 누구를 만날 상황
이 아니라는 말만 되풀이했다.
안톤이 만나고 돌아왔다는 소식을 접해 희망을 품고 달려왔는데 자신은 안 된다고 한다.
그래. 아직 회복되려면 시간이 걸릴 것이다. 그만큼 고초를 겪었으니 쉽게 회복되지 못할
것이다.
잘 알고 있지만 그래도 얼굴 한 번만 보고 나오면 되는데 그것조차 할 수가 없었다. 그날도
목적을 이루지 못하고 씁쓸히 되돌아와야만 했다.
만나든가 해야 사죄를 하기라도 하지. 어떻게 해야 할지는 모르겠다. 만나서 그녀의 맘이
풀어질 때까지 사죄할 생각뿐이었다.
그 어떤 것으로도 자신이 그녀에게 한 행동은 용서가 되지 않을 거라는 것도 안다. 하지만
빌고 또 빌 준비가 되어 있었다. 황제인 자신이 처음으로 그런 마음까지 먹었다. 하지만 만
날 수도 없으니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다음 날은 안 되겠다 싶었다. 누워 있는 얼굴이라도 보고 나올 생각이었다. 유모에게 억지
로 명령을 해서라도 그리할 생각이었다.
“오늘은 꼭 봐야겠다. 비켜라.”
가로막고 선 유모에게 단호히 명령했다.
“안 됩니다. 지금 그 누구도 만나실 수 없습니다.”
“황제의 명도 무시하는 게냐.”
“폐하께서 무리하게 요구하시는 것입니다. 저에게는 마마님이 우선입니다.”
유모가 평상시답지 않게 강한 어조로 황제를 상대로 팽팽하게 맞서고 나왔다.
자신의 명령을 따르지 않는 유모가 어이없었지만 벨리타에게 지은 죄가 있어 마음먹은 대
로 밀고 나가지 못했다. 또 유모가 울며 매달린 그날 자신은 지금 유모가 하는 것보다 더
매몰차게 대했다. 아무리 그때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다고 해도 지금 그것이 오판이었다
는 게 드러났다. 그러니 유모가 이러는 것도 이해되지 않는 건 아니었다.
다시 씁쓸하게 돌아가는 황제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유모의 눈빛은 더욱더 싸늘해졌다. 죽
기 살기로 매달리는 자신에게 어떻게 했는지 절대로 잊을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