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4화 꿈일까 두렵구나
왜 이리 꼬이기만 하는지. 겨우 안정을 찾으셨는데 다시 원점으로 돌아갔다. 아니 상황은
더 악화되었다. 폐하께서 잘 이겨 내시기만을 바랄 수밖에 없다. 그것이 안타까워 안톤의
죽음을 원통해하면서도 이곳에 왔던 것이다. 하지만 부질없는 짓이었다.
데인은 그러고도 한참을 더 황후 앞에 서 있다 몸을 돌렸다. 지금으로서는 자신이 할 수 있
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그래도 저들이 주장하는 처형만은 막고 싶었다.
안톤….
음산한 밤하늘이 그를 무겁게 내리눌렀다. 시신이라도 찾아 좋은 자리에 묻어 주기라도 했
으면 좋으련만.
황궁을 빠져나가는 데인의 어깨는 한없이 축 처져 있었다.
***
처형당하는 건 시간문제라 생각했다. 오늘이 아니면 내일이 될지 모른다. 그런데도 칼리크
는 단 한 번도 이곳에 오질 않았다. 자신을 처형하라 명하는 건 원망스럽지 않은데 한 번도
여길 찾아오지 않는 것은 아팠다. 사람 마음이 참 묘했다. 정말 보고 싶은데. 한 번만 보면
좋겠는데. 생각보다 더 많이 마음을 준 모양이었다. 이렇게 그리운 걸 보니.
그냥 접자. 처형당하게 되면 먼저 간 안톤과 기사들에게 가서 사죄하자.
그런데 시간이 지날수록 두려움이 커져 갔다. 처형이라는 말만 들었지 어떻게 죽는 건지
알지 못했다. 소설에서 목이 잘려 죽었으니 그렇게 죽으려나? 끔찍하긴 했다. 아니면 목매
달아 죽는 건가? 독을 마시나?
담담하게 있으려고 했지만, 사람인지라 두려운 건 어쩔 수 없었다. 얼마나 시간이 남아 있
는 걸까? 지하라 빛이 들어오지 않으니 지금이 어느 때인지 알 수가 없었다. 아… 뭔가 해
보고 싶었는데 다 쓸데없는 짓이었다. 오히려 자신뿐만 아니라 여럿을 죽게 만들었다. 이
젠 끝낼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
황제는 감시병에게 보고받은 걸 묵인했다.
“누군가 드나드는 것 같습니다. 못 보던 담요와 약초 냄새도 났습니다. 어떻게 할까요?”
당연히 그 누군가는 벨리타의 유모다. 유모가 가만히 있을 리 없다.
어차피 탑 지하에 연금된 몸, 모른 척해 주는 건 어렵지 않았다.
“그냥 두어라.”
칼리크는 그렇게 묵인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분노가 느슨해지는 탓일까.
[폐하. 그냥 황후 자리를 폐하시고 펠론국으로 돌려보내는 건 어떠하신지요?]
아침에 만난 데인의 제안을 생각해 보고 있는 중이었다. 자신의 최측근 대다수가 황후의
처단을 원한다. 그럴 만한 명분도 있다. 하지만 죽이는 건 안 된다. 이것만 보아도 벨리타
를 완전히 놓지 못하고 있다. 생각보다 더 많이 빠져 있었다. 이 정도인 줄은 몰랐다. 안 빠
지고 즐기기만 한다고 자신하더니 꼴좋다.
집무실로 돌아가는 그는 여전히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있었다.
“폐하. 명령만 다시 내려 주시면 제가 모든 준비를 하겠습니다.”
데인이 다시 찾아와 펠론국으로 황후를 보낼 마차와 서신을 다 준비하겠노라 설득하기 시
작했다. 황제로서는 죗값을 치르게 하는 것이 맞다. 하지만 남편으로서는….
망설여진다.
“폐하.”
데인에게 묻어 가려는 비겁한 자신을 발견했다. 아니 오히려 데인에게 고마워했다. 이러고
도 황제 자격이 있는 건가.
한숨을 내쉬던 황제는 드디어 데인의 손을 들어주었다.
“조용히 진행하도록 하겠습니다.”
데인은 이것이 최선의 방법이라 여겼다. 폐하가 어렵게나마 결정을 내려 주신 것도 다행이
었다. 뭔가 한시름 놓은 기분으로 서둘러 진행하기 위해 몸을 돌렸다.
그때였다.
[폐하! 황제 폐하!]
창밖에서 우렁찬 목소리가 들려오며 요란한 말굽 소리가 울려 퍼졌다.
황제와 데인은 놀라움을 넘어서 충격받은 얼굴로 서로를 쳐다보았다. 분명 들렸다. 혼자만
들었으면 헛것이 들렸다 생각했겠지만 데인도 들었다.
이 목소리는!
부리나케 중정이 보이는 창가로 달려갔다. 체통이고 뭐고 다 집어던지고 허겁지겁 뛰어갔
다.
이럴 수가!
믿을 수가 없다. 지금 눈에 보이는 것이 도저히 믿어지지 않았다.
“데…인. 보이는가?”
숨이 쉬어지지 않았다. 이것이 정녕 꿈이 아니란 말인가. 꿈일까 봐 다시 두려워지기 시작
했다.
“보…입니다. 폐하.”
데인이 우는 건 두 번째로 본다.
“정말이지?”
“네. 틀림없이 보입니다.”
‘폐하!’를 계속 불러 대며 말에서 내리고 있는 남자가 확실히 보였다.
아! 신이시여.
안톤이 돌아왔다. 살아서 돌아왔다. 지금 돌아왔다.
두 사람은 번개처럼 밖으로 튀어 나갔다. 떨리는 가슴으로 뛰어가는 칼리크 뒤로 눈물 콧
물을 닦아 가며 데인이 쫓아 나갔다.
곧이어 만난 세 사람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그저 부둥켜안았다. 죽었다고 생각한 안톤
이 살아 돌아왔으니 받아들일 시간이 필요했다.
칼리크는 안톤의 어깨와 팔, 등을 만져 보며 그가 살아 있음을 확인했다.
“정말 안톤인가?”
다소 초췌한 얼굴의 안톤이 고개를 끄덕이며 무릎을 꿇고 앉아 예를 갖추었다.
“다소 늦어진 것을 용서해 주십시오. 문제를 해결하고 오느라 이렇게 늦었습니다. 죄송합
니다.”
죄송하긴.
살아서 이렇게 나타난 것만도 신의 축복인데.
황제는 서둘러 안톤을 일으켜 세웠다. 여전히 믿어지지 않았다.
“꿈일까 두렵구나.”
자신의 속내를 솔직하게 밝혔다. 얼마 전 꾼 꿈의 영향도 있었다.
“절대 꿈이 아닙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황제는 그렇게 말하는 안톤이 너무 듬직해 그의 얼굴을 두 손으로 만지며 확인을 했다. 꿈
이 아니라 정말로 살아 있다는 확인이 재차 필요했다.
“폐하. 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지금 자네가 살아 돌아온 것보다 더 중요한 건 없느니라.
황제는 이제야 겨우 숨이 제대로 쉬어졌다.
“폐하. 오아시스가 있었습니다. 이제 승리는 우리 것입니다.”
헉!
다시 숨이 콱 막혔다.
칼리크는 그 자리에서 주저앉을 것 같았다. 아… 이 일을 어쩌면 좋단 말인가. 고대하던 희
소식으로 기뻐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그리 염원하던 대륙 통일의 길이 열린 엄청난 사실을
접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마냥 기뻐할 수 없었다.
벨리타….
뒤에 서 있던 원정대 기사들이 증거로 가져온 야자수 잎과 커다란 열매를 황제 앞에 내려
놓았다. 온실에서 그녀와 함께 본 것과 똑같은 것들이었다.
황제는 서둘러 데인을 쳐다보았다. 이미 무슨 뜻인지 알아본 데인은 고개를 숙이고는 바로
달려갔다. 황후가 갇혀 있는 지하로.
칼리크는 만감이 교차했다. 자신에게 축복이 쏟아졌다. 이제 가장 염원하던 대업이 코앞으
로 다가왔다. 하지만.
벨리타와의 일은 어떻게 수습해야 하는지, 또다시 암담해졌다. 자신이 무슨 짓을 저질렀는
지 깨닫게 되자 머릿속에서 폭풍우가 몰아쳤다.
그녀는 아무 죄가 없었다. 오히려 칭송받을, 어마어마하게 큰일을 했다. 그것도 모르고 탑
지하에 가두고 저 고통을 주었으니. 게다가 처형을 명할 수도 있었다. 물론 조금 전 펠론국
으로 보내기로 마음을 먹었지만 자신이 그런 결정을 했다는 건 아직 아무도 모른다.
가장 큰 희열과 고통이 한꺼번에 그를 덮쳤다.
벨리타에 대한 감정이 더 우세했다. 희열보다 고통이 더 커졌다. 배신했다 생각한 벨리타
가 오히려 영웅이었다. 자신을 무자비하게 배신했다 여긴 벨리타가 가장 큰 소원을 이루게
해 주었다. 이 죄를 어찌 갚나….
이제는 벨리타가 자신을 용서해 주지 않을 텐데…. 그 걱정으로 머리가 부서질 것 같았다.
어찌해야 좋단 말인가.
또 다른 두려움이 엄습했다. 벨리타… 그녀에게 당장 가 보고 싶었지만 일단 눈앞에 안톤
이 있었다. 대의를 위해 희생을 감수하고 지원한 이들을, 성공적으로 목적을 이루고 장하
게 돌아온 이들을 치하해야 한다.
칼리크는 의원을 불러 그들을 치료하라 명했다. 그 험한 일을 하고 돌아온 몸이다. 여기저
기 입은 상처들을 낫게 하는 것이 우선이었다.
돌아온 5인 중 기사 한 명의 어깨에 깊은 자상이 있었고 나머지도 발목 부분에 큰 상처가
있었다. 그 치료부터 우선해야 했다.
그사이 칼리크는 서둘러 황후궁으로 달려갔다. 하지만 그대로 발길을 돌려야만 했다.
“지금 방금 모셨고 아직 눈도 못 뜨고 계십니다.”
무척이나 싸늘한 태도로 유모가 그리 말하는데 할 수 없이 돌아서야 했다. 안타까운 마음
으로 돌아왔지만 가슴에 무거운 바윗돌이 그를 짓눌러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모두가
다 축제 분위기로 돌아섰는데 황제만은 즐길 수가 없었다.
하지만 살아서 돌아온 이들에게 푸짐한 음식을 대접하며 그 공을 높이 샀다. 이들은 더한
대접을 받을 자격이 있다.
모두가 황제가 친히 하사한 음식을 감격스러워하며 즐겼다. 그리고는 지금까지 어떻게 된
일인지 안톤은 폐하께 소상히 아뢰었다.
“황후마마 말씀이 정확했습니다. 시키는 대로 두 번의 밤을 달려 저 멀리 커다란오아시스
를 발견했을 때는 다 같이 함성을 질렀습니다.
거기까지 문제점은 전혀 없었습니다. 너무 쉽게 발견한 듯해 모두가 기쁨에 들떠 있었습니
다. 그런데 그것이 화근이었습니다.
너무 기쁜 나머지 판단력이 흐려졌습니다. 그 오아시스에 도적 떼가 주둔하고 있었을 줄은
꿈에도 생각 못 한 저의 불찰입니다. 처음 보는 오아시스에 홀려 보이지 않게 쳐 놓은 천막
들을 미처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안톤의 설명은 계속 이어졌다.
원정대의 함성을 들은 도적 떼들이 신속히 전투태세로 돌입했고 그들은 그것도 모르고 오
아시스로 들어가 말에서 내려 물가로 다가갔다. 그런데 물가 모래 속에 촘촘히 파묻어 놓
은 덫에 발목이 끼어 버렸다. 거기에 공중에서 갑자기 거대한 그물망까지 날아왔다.
어이없게도 그 그물망에 잡혀 버린 원정대들은 그물을 잘라 내려 검을 빼려 했으나 움직
일 수가 없었다. 그렇게 도적 떼에게 잡혀 감옥에 갇혔다. 동물을 가두어 두는 철창 감옥이
었다.
짐승 취급 받으며 순간순간 목숨을 위협받는 일도 있었지만, 용케 버텨 냈다. 손발이 밧줄
로 꽁꽁 묶인 채 그들은 겨우 물만 마실 수 있었다. 그렇게 꼼짝없이 며칠을 보내야만 했
다. 게다가 밤마다 한 명씩 끌려가 그들의 재미를 위해 온갖 수모를 당해야 했다. 기면 기
어야 했고 짖으라 하면 짖어야 했다. 이를 악물고 해야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