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3화 이제 겨우 시작했는데
손을 잡아끌며 그녀를 질질 끌고서라도 그 구멍으로 데리고 가려 했다. 계속해서 쇠창살
문 앞에서 핀핀이 망을 보고 있었다.
“유모.”
조용한 그녀의 목소리가 그 어느 때보다도 단단하게 흘러나왔다.
“네. 마마.”
처음으로 입을 여신 마마에게 납작 엎드려 그다음 말을 기다렸다. 어서 가야 하는데…. 제
발… 빨리요. 지금 대기시켜 놓은 마차에 필요한 건 모두 실어 놓았다. 마마님을 업고 갈 수
만 있다면 그러고 싶었다. 그런데 이 비좁은 땅굴은 그것이 불가능했다. 땅굴만 걸어서 가
주시면 그다음 통로로 이동한 뒤, 거기부터는 업고 달릴 수 있다.
“핀핀도 이리 오렴.”
다람쥐처럼 얼른 뛰어오는 핀핀을 바라보는 그녀의 입가에 슬픈 미소가 지어졌다. 유모도
이 아이도 더 이상 오래 볼 수 없다는 사실에.
“두 사람은 어서 여기서 나가세요.”
유모는 소리 없는 비명을 질렀다. 두 손으로 입을 막으며 고개를 심하게 가로저었다. 안 됩
니다. 그럴 순 없습니다.
“내일이라도 처형이 결정 나면….”
“내가 도망치면 잡힙니다. 반드시. 그러면 유모도 함께 처형될 겁니다. 그럴 순 없습니다.”
차분한 벨리타의 말에 유모와 핀핀은 눈물을 줄줄 흘렸다.
“죽어도 괜찮습니다. 마마님을 여기에 두고 저만 살 수 없습니다. 이러지 마세요. 저한테
이러지 마세요.”
“유모.”
처음이었다. 마마께서 자신을 이렇게 안아 준 것은. 이렇게 애틋하게 감싸 준 것은. 고귀하
신 여신님에게 안긴 느낌이었다. 그러니 더더욱 꼭 구해야 한다.
“유모는 꼭 사셔야 합니다. 저를 위해서. 이건 명령입니다.”
유모는 귓가에 한마디 한마디 힘을 주어 또렷이 말을 건네는 마마님 때문에 온몸으로 흐
느낄 수밖에 없었다.
“그동안 정말 감사했습니다.”
몇 달 안 되는 기간이었지만 너무 고맙습니다. 엄마처럼 의지 많이 했습니다. 덕분에 여기
까지 잘 지낼 수 있었습니다. 조건 없는 이런 큰 사랑도 받아 보았습니다. 제겐 은인이십니
다. 그러니 꼭 살아남으세요.
소리를 낼 수 없어 끅끅대며 유모가 울기 시작했다. 안 된다며 고개를 계속 가로젓기만 했
다. 마마님 없이 못 산다고 소리 죽여 통곡하고 있었다.
“더 잘하지 못해서 정말 죄송합니다. 시간이 더 있을 줄 알았는데 제 잘못입니다.”
벨리타는 포옹을 풀고 유모를 향해 고개를 깊숙이 숙여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는 인사를
했다. 그리고는 핀핀을 시켜 어서 유모를 데리고 나갈 것을 명했다. 아무리 감시병이 막 점
검을 하고 나갔다고는 하나 언제 또 불시에 들어올지 모르는 일이었다. 여기 이렇게 있는
걸 들키는 날엔 어떻게 될지 모른다.
벨리타의 재촉과 명령에도 유모는 안 된다고 우기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핀핀이 유모의
손을 꼭 쥐었다. 마마님의 고집을 꺾을 수가 없었다. 명령도 어길 수가 없었다. 두 사람은
다 죽어 가는 모습을 한 채 땅속으로 억지로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그들을 보내고 홀로 남게 되자 또다시 서늘한 적막함이 쏟아졌다.
이제 결정만 나면 여기서 죽는구나.
어차피 죽을 몸이었다. 조금 연장한 것뿐이었다. 이러든 저러든 죽을 사람은 죽는 것이 여
기 이치인가 보다. 그러니 그걸 바꾸려 한 것이 잘못이었다.
이왕 이렇게 될 거 좀 더 잘할걸.
더 잘해 줄걸. 사람들한테 표현도 많이 해 줄걸.
칼리크한테도.
더… 많이 좋아해 줄걸. 더 행복하게 해 줄걸.
지나고 나니 모든 게 아쉽고 후회만 남았다.
처형이 결정 난다면.
죽기 전에 한 번만 볼 수 없을까…. 처음으로 마음을 주었던 칼리크의 얼굴을 한 번만, 딱
한 번만이라도 더 보고 싶었다.
더 이상 흘러내릴 눈물이 없을 줄 알았는데 다시 그녀의 두 눈에서 눈물이 폭포수처럼 줄
줄 흘러내려 아래로 뚝뚝 떨어졌다. 걷잡을 수 없는 감정에 그녀는 양손에 얼굴을 파묻어
버렸다.
이대로… 살고 싶었는데.
이렇게 될 거였으면 그런 행복 따위 알지 못했던 예전이 더 나았다. 그런 행복감을 맛보았
는데 그것을 잃고 곧 죽어야 한다니.
이제 겨우 시작했는데.
시작하자마자 끝나 버린 셈이었다. 이렇게 혼자 있는 것이 힘들었다. 늘 같이 있었던 것 같
은데. 왜… 왜… 이렇게 되어 버렸나.
답답했다.
암담했다.
허탈했다.
오늘까지만 괴로워하자. 그리고 내일부터는 다 내려놓고 담담하게 죽음을 기다리자.
침대에 누운 벨리타는 두 눈을 꼭 감아 버렸다. 안팎으로 너무 지쳐 있어서 그런지 잠이 밀
려왔다. 잠자는 시간 만큼은 아무런 생각도 하지 않을 수 있으니 오히려 더 다행이라 여기
며 까무룩 잠에 빠져들었다.
***
유모는 가슴이 벌렁거리고 손발이 계속 떨려 진정할 수가 없었다. 이렇게 보낼 수는 없었
다. 명을 거역할 수 없어 물러났지만, 세상이 뒤집히는 일이었다.
곧 주무실 것이다. 미음하고 같이 드시게 한 약초 물은 몸을 보호하면서도 잠이 들게 하는
약이었다. 괴로운 생각 없이 잠이라도 푹 주무셔야 몸이 버티기 때문에 그렇게 준비했다.
그러니 지금도 조금 있으면 곧 주무실 것이다. 편히 주무시게 자신이 돌봐 드렸으면 좋겠
는데, 그거 하나도 못 해 드리는 지금 심정이 말이 아니었다.
겁도 많으신데 처형 소리를 직접 전하고 왔으니 지금 얼마나 두려우실까. 그러니 계속 주
무시는 것이 나을 것이다.
“핀핀. 서너 시간 후에 마마님이 깨실 것이야. 그때 이 물을 한 번 더 드시게 해라. 그러면
아침까지 푹 주무실 수 있을 거다.”
고개를 끄덕이고 병을 받아 든 핀핀도 얼굴에 슬픔이 가득했다. 언제나 씩씩하게 웃던 아
이인데 지금은 갈 길 잃은 강아지처럼 눈동자에 두려움과 슬픔이 짙게 가라앉아 있었다.
***
회의장에 모인 귀족들은 누구 하나 입을 먼저 여는 사람이 없었다. 숨소리 하나 들리지 않
을 정도로 회의장은 쥐 죽은 듯 고요하기만 했다.
폐하의 얼굴에 쓰여 있다. 다 들으셨다.
이럴 때 용감하게 나서는 귀족이 한 명은 있었다.
“황후를 속히 처단하셔야 합니다.”
마치 물꼬를 튼 것마냥 그 뒤를 이어 다들 또다시 한마디씩 하기 시작했다.
“황제 폐하를 건드린 일입니다. 서둘러 주십시오.”
“속히 결정을 내려 주십시오.”
“이대로 두어서는 안 됩니다. 먼저 폐위부터 하셔야 합니다.”
“하루라도 빨리 처형하여 본보기를 보이셔야 합니다.”
황제는 자리에서 사납게 일어섰다.
순식간에 회의장은 차가운 얼음 바람이 부는 듯 얼어붙어 버렸다. 한 명 한 명 쳐다보는 황
제의 시선에는 그들을 향한 분노가 여실히 드러나 있었다.
계속 떠들어 대던 이들의 입 역시 봉한 듯 딱 붙어 버렸다. 눈도 못 마주치고 슬금슬금 시
선을 외면하며 고개를 떨구었다. 황제는 살벌한 바람을 일으키며 더 이상 듣기 싫다는 듯
회의장을 빠져나갔다. 숨이 다 막혔다. 아무리 최측근들이라고 해도. 어디서 감히. 누구 맘
대로 황후의 목숨을 자신 앞에서 거론해.
황제의 가슴속에 한차례 폭풍우가 휘몰아쳤다.
***
핀핀은 유모가 시키는 대로 3시간쯤 후 다시 그 방 아래에 도달했다. 혹시라도 감시병이
지나다닐지 모르니 지금이 가장 조심해야 할 때였다.
소리 나지 않게 구멍을 막고 있는 단지를 옆으로 밀고는 소리에 집중했다. 발소리 같은 것
이 들리진 않는지 주의 깊게 귀를 기울였다.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그래도 방심해서는 안 된다. 살짝 눈만 내밀어 직접 동태를 살
펴야 한다. 이렇게 아무 소리도 없을 때는 십중팔구 아무도 없을… 헉.
바로 머리를 내리고는 구멍 아래에 몸을 말고 주저앉았다. 있다. 누가 있다. 감시병이 뭘
살피는 중인가 보다. 하마터면 큰일 날 뻔했다. 들킬 뻔했다.
떨리는 가슴을 진정시키며 모든 소리에 다시 집중했다. 문을 열고 들어오지 않는 이상 안
쪽에 있는 이 비밀 통로가 들킬 위험은 없다. 그러니 숨죽여 잘 숨어만 있으면 괜찮다. 피
가 마르는 시간이 그렇게 자꾸 흘러갔다.
계속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고 있으니 그 감시병이 갔는지 안 갔는지 알 수가 없었다. 핀핀
은 위험을 무릅쓰고 다시 한번 동태를 살피기로 마음먹었다. 살금살금 구멍 위로 눈만 내
민 순간. 다시 한번 눈이 휘둥그레졌다.
아니! 저… 저분은!
미동도 없이 아까와 똑같은 모습으로 문밖에 서 있었다. 한참 동안 저러고 계신 것 같은데
언제까지 저기 서 계시려나. 핀핀은 난감했다. 어떻게 해야 하는지 잘 모르겠다. 중요한 건
이 약을 마마님에게 먹여 드려야 한다는 것이다. 그럼 기다려야 한다. 저분이 가시기까지
기다려야 한다.
그 구멍 아래 핀핀은 쭈그리고 앉았다.
***
데인은 씁쓸하게 지하에서 올라오고 있었다. 묻고 싶었다. 왜 그랬는지. 아니, 정말로 안톤
을 죽이려 이 모든 술수를 부린 것인지. 이번에는 직접 물어볼 생각이었다.
그런데 기절한 듯 누워 미동도 하지 않는 황후를 내려다보며 그 마음을 접었다. 그것을 물
어본들 과연 사실대로 답해 줄까? 결백을 주장하고 나올 텐데 그 말을 믿을 것인가? 아니
다. 확실한 증거도 없지만, 황후가 아니라고 주장해도 자신이 믿을 것 같지는 않았다.
황후가 결백하고 누명을 쓴 거라고 해도 안톤과 원정대는 죽었다. 살려 내지 못한다. 자신
이 이곳에 두 번째 온 이유는 단 하나다. 폐하를 위해서다.
폐하가 얼마나 황후에게 마음을 빼앗기고 계셨는지 모르면 바보다. 누구보다 더 잘 알고
있다. 최근 그토록 행복해하시던 폐하 때문에 이곳에 왔다. 혹 조금이라도 실수를 하는 건
없는지, 다시 폐하를 행복하게 해 드릴 수 있는 방법이 없는지. 그것을 찾고자 왔다. 하지
만 무리다.
황후가 어떤 대답을 하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건 안톤이 죽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폐하를 생각하면 이 상황이 너무나 안타까웠다.
왜 이런 일이 벌어져 이 지경까지 왔는지. 그냥 조용히 폐하와 잘 지내고 있으면 되었는데.
그렇다. 왜 황후가 나섰는지 그것이 안타까울 뿐이었다. 그리고 확실한 증거를 아직 잡아
내지 못한 것이 계속 마음을 무겁게 했다. 다시 돌이킬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