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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군에게 찍힌 민폐 황후 입니다-72화 (72/130)

72화 그대로 살면 안 되는 거였소?

“이러다 쓰러지십니다. 조금이라도 주무셔야 합니다.”

데인은 아침에 황제의 집무실로 들어가자마자 놀라서 소리를 높였다. 어제 자신이 나온 뒤

지금까지 계속 폐하가 여기 계셨다는 걸 한눈에 알 수 있었다.

저의 안달에도 묵묵히 계속 서류를 잡고 있는 폐하에게 다가가 손에 들고 있는 걸 다 빼앗

아 탁자 위에 내려놓았다.

“일어나십시오. 폐하.”

폐하가 퀭한 눈으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아… 그 눈빛이 울고 있었다. 나 좀 그냥 내버려 두

면 안 되냐고 호소하며 슬픈 눈빛으로 자신을 보고 있었다. 눈물은 흐르지 않았지만 더한

슬픔이 폐하의 두 눈에서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보좌관을 소리쳐 불렀다. 그리고는 둘이서 합심을 하여 자리에서 일어나게 양쪽에서 끌어

올렸다. 쓰러질 듯 휘청하는 황제의 몸을 부축하며 집무실 한쪽에 마련된 침상으로 얼른

이동했다.

칼리크는 그들의 손에 의해 얼떨결에 누웠지만 천장이 빙글빙글 돌았다. 어지러웠다. 모든

것이 어지럽고 몸은 한없이 아래로 꺼져 드는 것 같았다.

눈을 감았다. 그들의 성화가 듣기 싫어 억지로 눈을 감았다. 몇 날 며칠 잠을 자지 못해서

그런가 뻑뻑한 눈꺼풀이 닫히자 소용돌이 속에 빠져드는 듯 잠 속으로 빠져들었다.

잠 속으로 완전히 빠져들기 직전, 그 끝에 안톤의 얼굴이 보였다. 우직하고 듬직한 제 그림

자 같던 안톤의 얼굴이 스쳐 지나갔다. 그 뒤를 이어…… 다른 얼굴이 다가왔다. 그만!!! 강

제로 차단시킨 칼리크는 바로 어두운 잠의 세계로 들어갔다.

***

안톤!

안톤이 너무도 씩씩한 모습으로 말을 타고 달려왔다. 그럼 그렇지. 지금까지 악몽을 꾸었

던 거다. 지독하게 끔찍한 악몽.

하얀 백마에서 내리는 안톤에게 칼리크는 빠르게 다가갔다. 늘 타고 다니던 흑마가 아니라

백마를 타고 온 것이 살짝 의아하긴 했어도 반가운 마음에 서둘러 다가갔다.

한 번도 그런 적 없었지만, 그에게 다가가자마자 힘차게 포옹을 했다. 왜 이제야 오는 것이

냐. 칼리크는 무너진 가슴을 쓸어내리며 장한 안톤의 어깨를 힘차게 두드려 주었다. 내리

쬐는 햇살마저 따사롭게 느껴졌다. 모든 것이 눈이 부실 정도로 환하고 정겨웠다. 아… 저

멀리서 또 누군가 뛰어온다. 나비처럼 훨훨 날아온다. 붉은 머리가 그녀 뒤로 넘실넘실 춤

을 춘다.

안톤을 힘주어 다시 한번 안아 주고는 그리로 향했다. 칼리크…. 뛰어오는 모습만큼 사랑스

러운 목소리로 자신의 이름을 부르며 환한 얼굴로 뛰어오고 있었다. 그 모습이 너무 어여

뻐 넋을 잃을 지경이었다. 그녀 주변으로 오색 무지개가 펼쳐졌다. 그녀가 딛는 발걸음 하

나하나에 들풀이 돋아나고 주변이 들판처럼 드넓게 펼쳐졌다.

벨리타.

그녀 뒤 하늘에는 자신의 호랑이 신수가 기분 좋게 뛰어다니고 있었다. 사람들에게 눈에

띄면 안 되는데도 이 순간만큼은 그것이 신경 쓰이지 않고 흐뭇하기만 했다. 벨리타 덕분

에 호랑이 신수도 만날 수 있었으니 그걸 절대 잊어서는 안 된다.

칼리크….

드디어 그녀를 품에 안았다. 아… 너무 괴로운 꿈이었다. 안톤도 살아 있고 이렇게 벨리타

도 안을 수 있는 지금이 현실이다. 하마터면 큰일 날 뻔했다. 세상이 다 무너지는 줄 알았

다. 다행이다. 그것이 꿈이어서 정말 다행이다.

그는 벨리타를 번쩍 안아 들었다. 그녀 입에서 귀가 호강하는 맑은 웃음소리가 터져 나왔

다. 그도 한껏 미소를 지으며 그녀를 빙글빙글 공중에서 돌렸다. 매일 이렇게 살았는데 그

럴 리가 없지. 나의 벨리타가 그런 배신을 할 리가 없다. 이렇게 사랑스럽게 자신을 올려다

보는 벨리타가 자신한테 그런 짓은 절대 하지 못한다.

벨리타. 전부 진심인 거지? 내가 좋은 거지? 거짓은 없는 거지?

말 없는 물음에 그녀가 그의 목을 끌어안으며 더 가까이 안겨 왔다. 그리고는 귓가에 더할

나위 없는 감미로운 목소리로 속삭였다.

“칼리크. 당신을 사랑해요.”

아… 그래. 그래. 안다. 잘 안다.

그래야지. 그래야 내 벨리타지.

다시 맛보는 행복감에 취해 칼리크는 열정적으로 사랑스러운 그녀의 입술을 찾았다. 이제

야 비로소 모든 것이 정상으로 돌아간다. 몸도 마음도 행복하게 충만하다. 이게 맞다. 지금

이 현실이다. 너무나 끔찍한 악몽을 꾼 것뿐이다.

벨리타… 이제 어디도 가지 마. 내 옆에 딱 붙어 있어.

그녀의 입술은 언제나 황홀했다. 이렇게 둘만 있으면 항상 환상적인 세계가 펼쳐졌다. 그

가 처음 가져 보는 완벽한 행복이었다.

키스를 끝낸 그는 그녀를 향해 환한 미소를 지었다. 우리 계속 이렇게만 살자. 벨리타. 그

에게 응답하듯 그녀가 소리 내어 맑은 웃음을 터트렸다. 그녀의 즐거운 웃음소리에 전염이

된 듯 그의 입에서도 호탕한 웃음소리가 흘러나왔다.

하하하.

하하하.

“벨리타….”

그 이름을 애타게 중얼거리며 칼리크는 잠에서 깨어나고 있었다.

눈을 뜨니 자신이 어두운 방 안에 누워 있음을 바로 알아차렸다.

이럴 순 없다.

그게 꿈이었다니. 안톤과 벨리타를 만난 것이 꿈이었다. 지금이 현실이다. 끔찍한 현실.

하아….

꿈과 현실이 뒤바뀌었다면. 차라리 꿈에서 깨어나지 말지.

아직도 제 입술 끝에 조금 묻어 있는 미소가 빠르게 굳어 갔다. 일부러 생각하지 않으려 했

던 그 이름. 그 이름을 부르며 잠에서 깨어났다.

벨리타.

어둠 속에서 등불도 켜지 않은 채 그대로 잠시 앉아 있었다. 온통 시커멓게 가라앉은 어둠

이 그를 다시 집어삼키려 했다. 그 무게에 짓눌려 그는 양손에 얼굴을 파묻어 버렸다.

왜…. 그대로 살면 안 되는 거였소?

이럴 거였으면 그런 행복 따위 전혀 알지 못했던 예전이 더 나았다. 그런 행복감을 맛보았

는데 그것을 잃고 아쉽지 않다는 듯이 거짓으로 살아가야만 하는가.

하늘로 치솟던 분노를 걷어 내자 그 아래 짓눌려 있던 다른 감정이 그를 자꾸 괴롭혔다.

그리움. 벨리타에 대한 그리움이 그를 서서히 죽어 가게 했다.

이제 겨우 시작했는데.

시작하자마자 끝나 버린 셈이었다. 이렇게 혼자 있는 것이 힘들었다. 죄를 지은 벨리타를

용서할 수 없는데. 왜… 왜…

이렇게 보고 싶을까.

답답했다.

암담했다.

허탈했다.

두 사람을 한꺼번에 잃었다. 충신과 아내를.

괴롭다. 너무 괴롭다. 제 감정이 버거워 그는 일어나 창문을 활짝 열었다. 차가운 밤공기가

거칠게 밀려 들어왔다. 차가운 공기를 크게 들이마시며 냉정해지려고 했다. 저 멀리 궁정

너머 벨리타가 갇힌 서쪽 탑이 어둠에 싸여 괴기스럽게 서 있는 것이 보였다. 저 안에 있

다. 벨리타가.

죽여 버리고 싶은 벨리타가.

그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금빛 눈동자가 점점 혼탁하게 변해 갔다.

그래도… 보…고 싶다.

죽이고 싶은데 보고 싶다. 아니, 죽도록 그립다. 여전히 등신처럼 구는 자신이 한심해 그는

열어 놓은 창문을 거칠게 쾅, 닫아 버렸다. 무겁게 떨어지는 창문 닫히는 소리에 제 마음도

그렇게 닫아 버렸다.

***

“대역 죄인은 하루라도 빨리 처형하는 것이 옳습니다.”

“황후의 죄를 가벼이 여기면 안 될 것이오.”

이번 일을 알고 있는 황제의 최측근 대신들만이 모인 회의장에서 모두가 하나같이 시끄럽

게 떠들어 대기 시작했다. 모두 합쳐 10명 남짓. 회의장에 모인 귀족들은 이 문제에 대해

할 말이 많은 듯했다. 폐하를 기다리며 그들은 저마다 한마디씩 쏟아 냈다.

웅성웅성, 회의장 안이 시끌시끌했다. 먼저 와 있던 데인의 얼굴은 한없이 찌푸려졌다. 저

말에 동조하는 귀족들이 더 많다는 것이 문제였다. 동조하지 않아도 지금 상황을 썩 마음

에 들어 하지 않는 귀족들이 대부분이었다.

“그런 큰 결정은 신중하게 하는 것이 옳습니다.”

반대 의견도 나왔지만 소수라 힘을 받지는 못했다.

“황후의 만행에 치가 떨립니다. 속히 결단을 내려야 합니다.”

“모두에게 본을 보여야 합니다.”

“내일이라도 처형을 해야….”

[황제 폐하 드십니다.]

그렇게 시끄럽던 회의장이 순식간에 조용해졌다.

***

“마마. 여기 계셨다간 위험합니다. 지금 회의장에서 마마의 처형이 거론됐다 합니다. 그 전

에 어서 도망치셔야 합니다.”

들키면 큰일인데도 사안이 사안인지라 핀핀과 유모가 같이 벨리타에게 찾아와 바로 읍소

하기 시작했다. 누가 알겠는가. 내일 바로 처형이 결정 날지. 회의장에 도착한 보좌관은 폐

하와 문밖에서 이 이야기를 다 들은 뒤 폐하가 입장하는 것까지 보고는 재빨리 유모에게

뛰어와 비밀리에 알려 주었다.

유모는 그 소식을 듣고 혼절하는 줄 알았다. 황제 측 귀족들이 마마님 처형을 거론했다는

건 정말로 그렇게 될 수도 있다는 말이다. 가뜩이나 폐하가 극노한 상태이고 많은 이들이

원하면 처형은 바로 결정 날 것이다. 어서 구해야 한다. 도망을 쳐서라도 펠론국으로 피신

해야 한다. 여기서 죽게 놔둘 수는 없다. 절대로 안 된다.

핀핀이 감시병과 하녀들이 다녀가는 시간을 대충 알아냈기에 그 시간을 피해 유모가 따라

나섰다. 숨 막히고 좁은 땅굴을 지나가는 것이 아무리 힘들어도 마마님을 살려야 했기에

더 속도를 내어 빠져나왔다.

“지금 저와 같이 도망쳐요. 마차도 비밀리에 다 준비해서 가시기만 하면 됩니다. 밤새 달리

면 나중에 알아차리더라도 우릴 쫓아오긴 늦을 겁니다. 펠론국에만 도착하면 안전해요. 그

러니 어서 가요.”

시간이 없었다. 빨리 저 구멍으로 들어가 빠져나가야 한다.

벨리타는 제대로 알아들었다. 내가 죽을 수도 있구나. 처형당할 수도 있는 거구나. 그가 명

령만 하면 난 죽는구나.

모든 게 다 무너졌다 여겼는데 아직도 뭐가 남아 있었는지 우르르 더 깊은 아래로 무너졌

다. 정말로 다 끝났다.

어차피 한 번 죽어 빙의한 몸, 또 죽는다고 뭐가 대수겠는가. 그런데 뭐 하러 처음에는 그

렇게 살려고 아등바등 기를 썼던가.

다 내려놓으면 되었을 것을. 지금은 그렇게 살아야 할 이유가 없어졌다. 그러니 차라리 죽

는 것이 더 나을지도 모르겠다. 그리 생각하니 마음속이 잔잔해졌다. 모든 걸 포기하고 나

니 오히려 평온해졌다.

앉은 자리에서 꿈쩍도 안 하는 마마 때문에 유모는 제정신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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