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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군에게 찍힌 민폐 황후 입니다-71화 (71/130)

71화 정말 다 거짓이었나?

차라리 나에게 벌을 주지. 아. 그래서 지금 벌을 받는 건가. 그래도 아무도 죽지 않게 해 주

지. 그냥 다 원통했다.

칼리크와도 이런 관계가 되어서는 안 되었나 보다. 이런 행복을 알지 못했다면 이렇게 무

너지는 일도 없었을 텐데.

칼리크가 자신을 미워하는 것이 절망스러웠다. 아니 증오하고 있을 것이다.

안톤… 칼리크….

하염없이 눈물이 흐르며 가슴이, 심장이 너무 아팠다. 그리고… 칼리크가 보고 싶었다. 지

금, 이 순간 미소 짓는 칼리크가 너무 보고 싶었다. 그가 없다는 생각에, 이젠 혼자라는 생

각에, 그를 잃었다는 생각에 살고 싶지도 않았다. 그렇게 살아남으려고 애를 써 놓고 이제

는 별로 살고 싶은 생각이 들지 않았다. 이대로 죽어도 상관없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그렇게 계속 한탄하고 있던 벨리타의 두 눈이 점점 감겼다. 눈꺼풀이 무거워지며 저도 모

르게 이 적막한 곳에서 힘없이 잠이 들고 말았다.

***

“그 약도 다 마셨다니 오늘은 좀 주무실 거다.”

유모는 다시 한번 조금은 안도하며 아이에게 큰일 했다고 칭찬을 했다.

“너 없었으면 큰일 날 뻔했다.”

유모는 마마님이 많이 달라지셔서 기회를 봐 이 아이 일을 말하려고 했지만, 그 기회를 못

잡았다. 그러다 이 지경까지 오게 된 것이다.

이곳으로 이 아이가 내쫓겼을 때 얼마나 마음 아팠는지 모른다. 불같은 마마님에게 뭐라

한마디라도 했다가 자신도 쫓아낼 거라는 말에 입 닫고 살아왔지만 지금이라면 해도 되지

않을까, 계속 재고만 있었다.

“이 일을 하라고 신이 저를 이리로 보낸 것 같아요.”

여전히 맑고 이쁜 아이다. 지하에서 살면서도 저렇게 생각해 주다니. 하긴, 간간이 찾아왔

을 때도 이곳을 신기한 지하 세계라 칭하고는 미로같이 생긴 곳을 탐험하러 다니는 게 재

미있다며 환하게 웃어 주던 아이였다. 1년 가까이 힘든 일을 하면서도 마마님 원망 한번

안 한 아이였다. 마음의 상처를 입었을 텐데도 말이다. 그만큼 마마님을 좋아하고 따랐다.

“이따가 네가 새벽 일 마치면 여기서 다시 만나자.”

기특한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고 유모는 밖으로 나왔다. 다리에 힘이 다 풀렸다. 그래

도 버텨야 한다. 마마님을 위해서라도 죽을힘을 다해 버텨야 한다.

그 차갑고 어두운 방에 누워 계실 마마님을 생각하며 다시 눈물이 흘러나왔다. 하늘도 무

심하시지…. 유모는 마마님 걱정에 훌쩍거리며 제 방으로 돌아갔다. 몸을 보호할 약제를 만

들어 달인 물을 준비하려면 서둘러야 했다.

***

해가 떠오르려 하는지 창밖이 조금씩 밝아지고 있었다. 그러나 칼리크는 안중에 없다는 듯

여전히 똑같은 모습으로 앉아 있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제 안에서 다른 소리가 비집고 나왔다.

정말 다 거짓이었나? 그렇게 완벽하게 표정까지 연기할 수 있나? 내 앞에서 보여 준 눈빛,

목소리, 몸짓 하나하나가 머리로 생각해서 만들어 낸 거란 말인가? 그렇게 연기를 잘할 수

있나?

그럴 수 있다. 그런 연기에 도가 트인 벨리타다. 그러니 딴생각하지 말라. 원래 재미로 그

런 짓을 비일비재하게 저지르며 산 여자다. 보통내기가 아니다. 이토록 당하고도 아직 정

신을 못 차렸다. 정신 차려라. 칼리크.

그래도 말이다. 원래 사악하고 차디찬 여자가 연기를 했다면, 그것이 다 거짓말이었다면

어떻게 그리 따뜻하고 사랑스럽게 느꼈던 거지? 사람 하나 꿰뚫어 보는 건 자신하는데. 그

런 나를 속일 수 있다고? 진심으로 하는 것만 받아들이는 나를 속인다고? 절대 못 알아챌

리 없다.

이건 불가능하다. 내 앞에서 진심이었다. 그 순간만큼은 진심이었다.

그의 안에서 두 방향으로 갈라진 생각이 서로 으르렁대고 있었다.

말도 안 된다. 아직도 등신같이 굴고 있다. 몸 섞을 때 진심이었으면 그게 뭐? 그걸 얼마나

밝히는 여자였는지 몰랐나? 잠자리가 좋긴 했나 보지. 지금 안톤이 죽은 마당에 그 여자에

게 면죄부를 주려 하는 건가. 부질없다. 그런 쪽으론 생각하지도 마라.

그럼 뭐 하러 그렇게 열심히 했지? 나를 위해 땀 흘려 가며 다리를 주무르고 노래를 하고

시키는 대로 다 하고. 왜 그런 수고를 다한 거지?

손쉽게 더 빠른 방법으로 해를 입힐 수 있었을 텐데. 안톤을 제거하면 그다음엔 더 경계가

철저해져 데인이나 자신은 건드릴 수도 없을 텐데 그렇게 아둔한가? 그럼 그 아둔한 여자

가 이렇게 치밀한 계획 아래 긴 시간 동안 희생한다? 어딘가 말이 맞지 않는다.

안 맞긴? 한 명이라도 없애는 게 목적이었다면 그럴 수도 있지. 그리고 혼을 다 빼놔 빠지

게 만든 다음 이렇게 높은 곳에서 뚝 떨어뜨려 박살 내려고 했던 거지. 그런데도 아직 미련

이 남아 있다?

그는 자신에게 욕을 퍼부었다.

가슴이 찢어졌다. 피고름이 줄줄 흘러내렸다…. 안톤과 원정대의 사망으로 암울한 가운데

가슴 밑바닥에서 다른 아픔도 올라왔다. 그런데 자세히 알고 싶지 않았다. 의도적으로 생

각을 막았다. 지금은 안톤과 내가 잃은 기사들만 생각해야 한다.

창밖은 점점 환해지고 있는데 칼리크는 더 어둡게 절망의 늪으로 가라앉고 있었다.

***

폐하가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무표정. 아무런 감정도 느끼지 못하는 바위 같은 표정

으로 돌아왔다. 데인은 평상시대로 업무를 진행하는 폐하를 보며 더 노심초사했다. 차라리

표정에라도 나타나면 좋으련만 저렇게 꾹꾹 눌러 놓고 아슬아슬하게 그 위에 서 있는 폐

하가 걱정되어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다.

“폐하. 에단 스톤이 사라질 때 다른 몇몇 이들도 같이 황도를 떠났다 합니다. 어디로 향했

는지는 계속 찾는 중입니다.”

칼리크에게는 별로 중요한 사항이 아니었다. 찾아내기야 하겠지. 그때 그들에게 죗값을 치

르게 하면 된다. 하지만 그런다 한들 안톤과 기사들의 희생이 없던 걸로 되지는 않는다.

“폐하. 황후는 일단 탑에서 풀어 주시는 것이 어떠하신지요.”

서쪽 탑 지하에 찾아가 직접 본 황후의 상태가 그리 좋지 않아 보였다. 하지만 폐하는 입을

꾹 다물고 그 어떤 말도 하지 않았다.

“폐하….”

데인은 여러 가지가 걱정이 되어 다시 입을 열었다.

“나가 보시오.”

딱 자르신다.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말라 경고하신다. 데인은 고개를 숙이고는 황제의 집

무실에서 나올 수밖에 없었다. 여전히 자꾸 찜찜했다. 황후의 음모라는 것이 확실히 밝혀

진 후에 연금해도 되지 않을까 싶어 말씀드렸는데 폐하의 결정을 바꿀 수가 없었다.

칼리크는 제 결정을 번복하지 않았다. 자신 안에서 망설이려는 기미가 보여 단호히 차단한

것이었다. 데인과 안톤을 제외하고는 사람에 대해 신경을 써 본 적이 없는데 이번 일은 제

안에서 고민을 하는 것 자체가 용서되지 않았다.

홀리긴 제대로 홀렸나 보다. 귀신에게 홀렸건 마녀에게 홀렸건 홀렸었다. 인정할 건 인정

한다. 이번 일로 자신이 이렇게 나약하고 한심한 존재였던가 개탄스러웠다. 그런 한심한

자신이 고개도 내밀지 못하게 차단할 생각이다. 더 이상 추락하지 않을 것이다.

그는 일에 파묻혔다. 일부러 더 결재할 서류에 집중했다. 오늘 하루를 버티기 위해서라도

필요한 일이었다. 그렇게 죽어라 밤이 새도록 집무실에서 나오지 않았다.

***

유모가 챙겨 준 미음과 약초 물을 아이는 열심히 마마님에게 먹이고 돌아왔다. 그리고 또

준비해 준 걸 가지고 몰래 다시 찾아가고. 하루에도 여러 번 그리 왔다 갔다 했다.

감시병들을 피해 몰래몰래 하느라 매 순간이 긴장의 연속이었다. 아무도 없는 걸 확인하고

구멍에서 올라와 마마님에게 다가갔다.

그래도 자신이 먹여 드리는 걸 잘 받아드셔서 얼마나 다행인지 모르겠다. 이곳에 먹을 것

이 나오긴 하겠지만 기운 없는 마마님이 혼자 드실 리 없고 드신다고 해도 잘 넘기지도 못

하셨을 것이다.

벨리타는 계속해서 저를 찾아오는 이 아이가 참으로 고마웠다. 이곳을 관리하는 사람 외엔

아무도 찾지 않는 자신에게 이 아이만은 여전히 나타나 보살펴 주고 죽지 않게 자꾸 뭘 먹

여 주었다. 기계적으로 먹었다. 이 아이가 기특하기도 했지만, 정말은 자신도 죽기는 싫었

나 보다.

“이름이….”

아이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놀란다. 처음 입을 열고 말을 해서 그런 듯싶었다.

“핀핀…이라고 합니다. 마마.”

그렇게 대답을 하는 핀핀의 얼굴이 무척이나 어둡고 슬프게 보였다. 그러지 말라고, 내가

이리 고마워한다고 알려 주고 싶었다. 힘겹게 손을 올려 핀핀의 머리를 살며시 쓰다듬어

주었다. 내가 여기서 네 덕분에 버틸 수 있구나. 고맙다. 핀핀.

핀핀의 토끼 같은 눈망울에 눈물이 맺혔다. 결국, 주르륵 양 볼을 타고 흘러내리자 벨리타

는 가만가만 그 눈물을 손등으로 닦아 주었다. 울지 마라. 내가 울어야지 네가 왜 울어….

너는 나에게 고마운 사람이다.

핀핀이 왜 이렇게 하는지는 모르겠다. 요정이 아니라 사람이라는 건 알게 되었다. 누구인

지 기억에는 없지만, 그냥 다 고마웠다. 혼자 이곳에서 몸도 마음도 얼어 가고 있는데 따뜻

한 온기를 전해 주고 있는 핀핀이 너무 고마웠다. 이 보답을 할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

까. 여기서 살아 나갈 수 있을지 그것조차 알 수 없으니 핀핀에게 뭘 해 줄 수도 없었다.

“고맙다….”

그저 이런 말밖에는 할 수 없었다. 그러자 핀핀은 더 펑펑 울기 시작했다. 고개를 가로저으

며 그냥 울기만 했다.

삐걱.

갑자기 감시병이 들어오는 소리가 들렸다. 울다가 화들짝 놀란 핀핀이 당황하여 펄쩍펄쩍

안절부절못하다가, 구멍으로 숨기에는 시간이 부족해 다급하게 마마님의 넓은 드레스 속

으로 숨어 버렸다. 풍성하게 퍼지는 드레스여서 작은 몸의 핀핀이 납작 엎드려 그 속으로

숨어 버렸어도 별로 표가 나지 않았다. 가져온 주머니도 안으로 끌어당겼다.

감시병이 문의 창살을 통해 방을 한 번 둘러보고는 다시 밖으로 향했다.

놀란 가슴을 쓸어내리며 다시 치마 밖으로 나온 핀핀은 가슴이 너무 아팠다. 마마님이 기

억을 잃었다고 하시더니 정말 자기 이름도 잊어버리셨다. 제 머리를 쓰다듬어 주시고 온화

한 눈빛으로 쳐다봐 주시니 예전 어릴 때로 돌아간 듯해 눈물이 하염없이 솟구쳤다.

또 오겠다고 하고는 방을 떠나며 핀핀은 얼굴이 시커메지도록 소매로 눈물을 닦아 냈다.

또 그렇게 안타까운 밤이 무정하게 흘러가기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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