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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군에게 찍힌 민폐 황후 입니다-70화 (70/130)

70화 날 정말로 좋아하지 않았구나

벨리타는 겨우 눈을 떴다. 뭣 때문에 깨어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지금 시야에 보이는 것

을 이해하기 어려웠다. 횃불 하나 밝혀진 어두운 방에서 쇠창살 문을 보며 여기가 어디인

지 알 수가 없었다. 밤인지 새벽인지 전혀 알 수 없는 이 공간의 습한 공기가 코로 밀려들

어 왔다. 게다가 모든 것이 싸늘했다.

처음 보는 좁은 침대에 누워 있는 자신도 이해가 되지 않았다. 왜 내가 여기 있나.

손 하나 들어 올릴 힘이 없어 그대로 누운 채 고개만 겨우 돌려 보았다. 아… 여긴… 창문

하나 없는 걸 보니 지하 같았다. 음산하고 습한 공기로 가득 찬 지하.

내가 지하에 갇혔구나.

창살문 너머로 발소리가 점점 멀어졌다. 점검을 하고 떠나는 감시병의 발걸음인가. 그게

뭐였건 별 관심이 없었다. 아무것도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그냥 다시 잠이 들고 싶었다.

“마마….”

누가 들을까 봐 소리를 죽인 아주 작은 목소리가 들렸다. 그러나 바로 헛것을 들은 거라 치

부했다. 이 차가운 방엔 자신 혼자밖에 없었다.

“마마.”

다시 들렸다. 하지만 손 하나 까딱할 수 없을 정도로 지쳐 있었다.

순간, 그녀의 시야에 사람이 하나 나타났다. 어디 숨어 있다 나타난 듯 갑자기 보였다. 아

이 같았다. 몸이 왜소하고 눈이 동그란. 어렸을 때 집에서 키우던 토끼가 떠올랐다. 토끼를

닮은 아이. 그런데 이 아이가 왜 여기에 있을까…. 뭘 했기에 이렇게 흙투성이가 되었을까…

. 어쩌면 이 아이가 자신을 깨운 건지도 모르겠다.

이 토끼 같은 아이가 무슨 힘이 있는지 축 늘어져 있는 자신을 일으켜 세웠다. 보기보다 힘

이 세다. 자신을 기어코 일으켜 세우더니 벽에 기대게 했다. 그것마저도 힘이 들어 벨리타

는 숨을 가쁘게 내쉬었다. 힘은 이 아이가 다 주었는데 자신이 이렇게 힘이 들다니….

아이가 제 입가에 물주머니를 갖다 대 주었다. 물주머니를 잡은 아이의 손톱 밑이 흙으로

새까맣게 짓이겨져 있었다. 마치 땅속에서 튀어나온 듯 머리도 흙이 잔뜩 묻어 있고 입고

있는 옷도 마찬가지였다. 뭘 하다가 이렇게 되었나….

“어서 마시세요.”

목이 탔다. 살려고 하는지, 살고 싶은지 그 물이 마셔졌다. 그러고 보니 아무것도 입에 댄

것이 없었구나. 꿀꺽 물을 넘기면서 벨리타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다.

안톤과 그 일행들이 얼마나 목이 말랐을까, 목뿐만 아니라 온몸이 다 말라 들어가 얼마나

괴롭게 죽어 갔을까, 얼마나 비참하게…. 그런데 자신은 이렇게 살려고 물을 마시고 있다.

그것이 죄스럽고 비통했다.

“마마. 지금은 물밖에 가져오지 못했어요. 금방 다시 올게요.”

아이가 시야에서 금방 사라졌다. 벽 구석 어딘가에서 부스럭 소리가 들려왔지만, 고개를

돌릴 힘도 없었다. 그대로 벽에 기대앉아 있으면서 마치 꿈을 꾼 것 같았다. 이런 곳에 누

가 들어올 수 있을 것 같지 않은데 환상을 본 것인가. 아니면 땅속 요정이 잠시 왔다 간 건

가. 그리고는 다시 멍해졌다. 생각할 힘조차 없었다.

벨리타가 땅속 요정이라 생각한 아이는 다시 땅굴을 통해 죽어라 뛰어가고 있었다.

1시간 전, 자고 있는 자신을 유모가 다급하게 깨웠다. 울며불며 말하는 통에 처음에는 잘

알아듣지 못했지만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알게 되었고 바로 놀라 방에서 튀어 나갔다.

지하에서 작은 쪽방에 살고 있는 아이는 이 지하가 미로처럼 사방팔방으로 연결되어 있다

는 걸 알고 있었다.

다람쥐처럼 늘 뛰어다니고 탐색하기 좋아하는 성격 탓에 1년 정도 여기 살면서 지하 통로

들을 손바닥 보듯이 다 꿰차고 있었다. 이곳에 살면서 견뎌 내기 위해 혼자 탐험가라 생각

하고 이 통로들을 다람쥐처럼 탐색하고 돌아다녔다.

그런데 비밀도 알게 되었다. 통로와 통로가 이어지지 않는 곳들도 있다는 걸. 그 통로들 사

이로 검은빛 도는 바위가 하나 있었는데 그 바위를 밀면 구멍이 생기고 거기를 통해 다른

통로로 나아갈 수 있다는 것까지 알게 되었다.

그 바위는 혼자서 들 수 있을 정도였고 다시 구멍에 맞춰 끼워 놓으면 감쪽같이 보였다. 병

사들이 그곳을 통해 왕래하며 얘기를 하거나 뭘 나눠 먹고 하는 걸 몰래 숨어서 지켜본 덕

에 알 수 있었다. 이곳은 정말신기하고 탐색할 것이 무궁무진했다.

게다가 얼마 전, 새벽에 통로를 돌아다니다 벽 저쪽으로 사람들 소리가 웅성거리는 걸 듣

고는 걸음을 멈추었다.

남자 여럿이 말하는 소리가 들려 벽에 바짝 귀를 갖다 대고 염탐했다. 이런 경우는 드물어

또 하나의 재밋거리였다.

서쪽 탑 지하까지… 에무르… 거의 다 왔다… 이런 말들이 들렸다. 땅 파는 소리까지 들려

그때는 그냥 누군가의 지시로 서쪽 탑까지 또 통로를 만드는구나, 이렇게만 여기고는 그

자리를 떠났는데 유모가 뛰어와 마마님이지하에 갇혔다고 말했을 때 그 일이 떠올랐다.

작은 삽을 하나씩 들고 유모와 아이는 그 소리가 나던 곳의 흙벽을 파기 시작했다. 30여

분 정도 파내자 구멍이 뻥 뚫리며 그때 그 남자들이 새로 만든 땅굴과 연결되었다.

유모는 그곳에 남고 아이 혼자 새로 판 구멍으로 기어 들어가 그 통로를 따라 탑 쪽으로

부리나케 달렸다. 유모가 챙겨 준 물주머니만 허리에 차고 죽을힘을 다해 뛰었다.

그 통로가 끝날 때쯤 위로 구멍 일부가 보였다. 쏟아진 흙무더기가 진입을 방해하고 있어

손으로 파헤쳐야 했다.

열심히 흙을 치우고 올려다보니 구멍이 온전히 보였고 그 위로 뭔가가 놓여 있는 듯 막혀

있었다. 가만가만 들어 밀어 보니 커다란 단지였다. 누군가 입구를 가리기 위해 단지를 끌

어다 막아 놓았던 것이다. 그렇게 위로 올라와 마마님 곁으로 다가갈 수 있었다.

입술이 하얗게 들뜬 마마님에게 겨우 물만 먹이고 다시 유모를 만나기 위해 그 통로를 빠

져나왔다.

“다행이다. 다행이야.”

눈물 섞인 그 말만을 되뇌던 유모는 부리나케 다른 준비를 하러 달려 나갔다.

그동안 아이는 흙투성이가 된 몸을 씻고 옷도 갈아입었다. 이렇게 더러워진 손으로 물주머

니를 마마님에게 내밀었을 때 안 드시면 어쩌나 걱정도 되었었다.

워낙 깔끔하고 까탈스러운 분이라 더럽다고 거부하실까 염려스러웠지만, 다행히 아무 내

색 없이 물을 드셨다.

예전이라면 상상도 못 할 일이었다. 그릇에 티끌 하나 묻어도 집어 던지는 분이셨다. 유모

가 간간이 와서 들려준 말대로 많이 변하신 모양이었다.

그런데 그렇게 사납게 굴던 분이 저렇게 축 처져 있으니 더 안쓰러웠다. 소리라도 지르고

길길이 날뛸 때는 그래도 건강하셨는데 지금은… 다 죽어 가는 환자 같았다. 그것이 마음

이 아팠다.

유모가 곧 뭘 바리바리 싸 왔다. 흘리지 않게 뚜껑 달린 병에 미음과 약초 달인 물을 넣어

왔다. 그 주머니를 어깨에 두르고는 다시 통로로 향했다.

다행히 새벽이라 감시병들이 돌아다니질 않아 구멍을 통해 무사히 다시 올라올 수 있었다.

다시 갔다 오는 동안 그 자리 그대로 앉아 있는 마마님의 모습이 축 늘어진 인형처럼 보였

다.

서둘러 다가가 마마님에게 미음을 조금씩 떠서 먹여 드렸다. 초점 없는 눈으로 입도 벌리

지 않으셔서 무례를 무릅쓰고 손으로 턱을 벌려 입을 열었다. 그리고는 미음을 그 안으로

흘려 넣었다. 다행히도 마마님이 그걸 삼키셨다. 그렇게 여러 번 반복했다.

벨리타는 그저 제 앞에서 열심히 뭔가를 하고 있는 눈이 초롱초롱한 아이를 멍하니 바라

보았다. 자신이 뭘 먹고 있다는 인지도 하지 못한 채, 이 요정 아이가 또 나타났다고 여겼

다. 아까처럼 흙은 묻어 있지 않고 말쑥한 모습이었다. 흙먼지가 없어지니 참 귀여운 아이

였다. 요정이라도 지금 누군가 옆에 있다는 것이 큰 위안이 되었다.

“마마. 좀 주무셔야 해요. 이러다간 큰일 나요. 감시병들 피해 아침에 다시 올게요. 제가 있

으니 걱정 마세요.”

뭐라고 자꾸 말하는데 멍한 상태라 잘 알아듣지 못하겠다. 자신의 얼굴과 손발까지 깨끗한

천으로 닦아 주며 요정이 계속 움직였다. 언제 눕혔는지 발끝까지 담요로 꼼꼼히 감싸 준

요정 아이가 조금씩 멀어져 갔다. 아… 안 가면 안 되나. 손으로 그 아이를 잡으려 했지만,

마음만 그랬지 손은 움직이지 않고 그대로 축 늘어져 있기만 했다.

요정 아이가 어디론가 가 버리고 나자 갑자기 조용해졌다. 어둑한 방 안이 텅 빈 음습한 공

간이 되었다. 기괴한 고요함이 축축하게 그녀의 몸을 짓누르며 가라앉았다. 그러지 않아도

몸이 땅속으로 가라앉을 것처럼 무겁고 괴로웠는데 더 푹푹 파묻히는 것 같았다.

그냥… 세상을 다 잃은 것 같았다. 칼리크를 잃었다. 결국, 안톤은 돌아오지 않은 것이다.

안톤이 죽었구나. 그럴 리가 없는데 어디서 뭐가 잘못되었는지 살아 돌아오지 못했다. 그

래서 칼리크가 자신을 여기 가두었고. 그래. 이해한다. 그럴 수 있다. 자신을 의심하고 벌할

수 있다. 하지만 너무 억울하다. 억울하고 원통해 눈물만 흘러내렸다.

칼리크….

그 생각 외에는 아무것도 중요하지 않았다. 그를 못 본 며칠이 몇 달은 된 것 같았다. 자신

을 이런 곳에 가두었지만 그가… 그가… 보고 싶다.

나한테 한 번만 물어보지. 설명할 수 있는 데까지 다 해 줬을 텐데. 이렇게 오해하게 두지

않았을 텐데. 아… 아닌가. 어쨌건 안톤이 죽었으니 무슨 설명을 한들 소용없는 것인가. 그

래. 나라도 이렇게 했을 것이다. 아니 당장 죽이지 않은 것에 감사해야 할 정도다. 칼리크

를 원망하지 않는다. 이해한다.

머리로는 다 이해하는데 아팠다. 날 정말로 좋아하지 않았구나. 그냥 이 몸만 좋아했구나.

그러니 미련 없이 이렇게 싹 돌아섰지. 난 그에게 아무것도 아니었구나.

눈물이 흘러내렸다. 너무나 행복했는데 하루아침에 지옥 속으로 떨어졌다. 어디부터 잘못

된 것일까. 모든 걸 바꿔 보겠다고 나선 것이 화근이었을까. 순리대로 흘러가야 하는 걸 중

간에서 틀려고 했으니 신이 노한 걸까. 죽어야 할 사람, 살아야 할 사람을 바꾸려 한 것이

신의 영역을 침범한 것일까. 그래서 애꿎은 안톤과 기사들이 죽은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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