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폭군에게 찍힌 민폐 황후 입니다-69화 (69/130)

69화 죄인을 끌어내라

“남자가 찾아와?”

“예. 그 전에 저에게서 황후궁 예산 중 10만 골드를 가져갔습니다.”

황후궁 예산을?

“그 남자 이름은 에단 스톤. 그 상자를 들고 마차로 황궁을 빠져나갔다 합니다. 그리고 바

로 다음 날, 그 에단은 마을에서 소리 소문 없이 사라졌다 합니다.”

이상한 점은 바로바로 조사하는 것이 데인의 역할이었다.

에단 스톤? 그 남자에게 10만 골드를?

그놈에게 돈으로 사주를 한 건가? 사막에서 처리하라고? 가능성 있다.

정말로 속은 것이다.

완전히 속았다.

칼리크의 두 눈이 시뻘겋게 타올랐다. 자신 앞에서는 그리 헤헤대 놓고 뒤에서는 사악한

뱀처럼 그런 간계를 부리다니. 쿠로보다 더 악랄한 인간이었다.

그런 것한테 마음이 뺏겨 그녀와 함께하는 밤만 기다린 꼴이라니. 남자 경험 풍부한 벨리

타가 자신 같은 남자 하나 유혹하는 건 식은 죽 먹기였을 거다. 자신이 그것밖에 안 되는

놈이었다니. 하늘에서 부모님이 통곡하실 일이었다.

이가 갈렸다.

자신 아래에 누워, 속으로는 독을 품은 뱀처럼 사악한 생각으로 가득 차 있었으면서 얼굴

가득 유혹적인 미소나 흘린 벨리타가 악마처럼 느껴졌다.

“폐하. 냉정하게 판단하셔야 할 때입니다.”

지금 그렇게 하고 있다. 여자에게 홀려 판단력이 흐려졌다. 그 죄로 안톤을 잃었다.

“좀 더 확실하게 조사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그 후에 벌을 하셔도 늦지 않습니다.”

모두가 이번 일에 대한 죗값을 치러야 할 사람은 황후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더 신중해야

한다. 눈으로 본 것들이 많다.

황후의 모습, 표정, 눈빛. 이런 것까지 완벽하게 속일 정도로 치밀한 사람이 아니다. 지금

분노에 휘말려 알고 있는 것까지 왜곡할 우려가 있다. 반드시 황후의 짓이라는 증거가 아

직 없다. 그렇다고 아니라고도 할 수 없다. 황후의 정보에 솔깃해서 바로 추진한 것에 자신

도 한몫했다.

“폐하. 이번 원정대에 안톤이 지원한 겁니다. 그걸 잊지 마소서.”

황후가 안톤을 지명한 것이 아니다. 안톤이 먼저 나섰다.

“그런 일에 안톤이 제일 먼저 나설 거라는 걸 알고 있었겠지.”

그럴까? 폐하의 단언하는 말에 데인은 마음이 더 무거워졌다. 자신도 뭐라 확신을 할 수

없어 더 혼란스러웠다. 폐하의 마음이 완전히 기울어졌다.

“황후를 서쪽 탑에 연금시켜라!”

“폐하.”

데인은 다급한 목소리로 황제에게 다가갔다.

“좀 더 신중히 확실하게 알아보고….”

“연금시키라 했다. 어서!”

더 알아볼 필요도 없다. 안톤이 죽었다. 뭘 알아낸들 죽은 자가 살아 돌아오진 않는다. 그

것이 뭐 중요하다고!

그의 명을 받들어 기사단장이 몇 명의 기사를 이끌고 바로 황궁으로 달려갔다. 데인은 할

수 없이 뒤로 물러났다.

안톤만 생각하면 데인 역시 온몸이 비틀릴 정도로 고통스러웠다. 하지만 정확해야 한다.

이번 일은 더 특히 확실히 증거를 잡아야 한다.

에단 스톤을 찾아내는 것이 급선무다. 황후가 사주했는지 확인하는 과정이 필요하다. 또

한, 어떤 세력과 손을 잡았는지, 펠론국으로 사람을 보내 그 정보가 확실한 건지 알아내야

한다.

어두운 밤하늘에 구름이 잔뜩 껴 있었다. 별 하나 보이지 않는 시커먼 흙탕물처럼 보였다.

이들과 심정이 똑같은 밤하늘을 올려다보는 데인은 무거운 마음을 주체할 수 없었다.

칼리크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그 어떤 것도 생각할 수 없었다. 목이 타들어 가며 죽어

갔을 제 충신들만 떠올랐다. 그 쓰러진 몸 위로 뜨거운 사막 모래가 뒤덮이는 모습이 눈에

아른거렸다. 그렇게 미쳐 가기 시작했다.

***

만 이틀 만에 겨우 눈을 뜬 벨리타는 여전히 눈동자에 초점이 돌아오지 않은 채 산송장처

럼 누워 있었다.

그것만도 다행이라며 가슴을 쓸어내린 유모는 미음이라도 먹이려고 애를 썼다. 그러나 아

무것도 드시지 않았다. 모든 걸 거부하고 움직이지도 않으셨다. 약초 물 한 모금만 사정사

정해서 겨우 넘기시게 하고는 팔다리를 쉬지 않고 주물러 드렸다. 모든 시녀가 다 달려들

어 차디차게 식어 가는 황후의 몸에 온기를 불어넣기 위해 고군분투했다.

그런데 밤늦게 느닷없이 기사단장이 부기사단장과 기사단을 이끌고 황후궁으로 음산한

분위기를 풍기며 쳐들어왔다. 말 그대로 쳐들어와 다짜고짜 방문을 열어젖혔다.

“죄인을 끌어내라.”

유모는 비명을 지르며 마마를 끌어안고 막아섰다. 이게 뭐 하는 짓이냐며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몸으로 말리며 소리를 지르던 유모는 기사단의 손에 마마에게서 강제로 떨어져 벽

쪽으로 끌려갔다. 머리가 산발이 되도록 울부짖으며 일어나지도 못하는 마마가 그들의 손

에 바닥에 주저앉혀지는 모습을 보아야만 했다.

마마… 마마….

유모가 부르짖고 시녀들이 울어 댔다. 황후궁 전체가 들썩였고 모두가 어리둥절할 뿐이었

다. 마마님을 왜? 무슨 죄가 있다고? 다들 영문을 알 수 없어 부기사단장과 기사단에게 질

질 끌려가는 마마의 뒤에서 발을 동동 구르기만 했다.

여전히 정신이 돌아오지 않은 벨리타는 그들 손에 의해 차디찬 서쪽 탑 지하에 갇히고 말

았다. 쓰러진 채 아무 느낌도 받지 못했다. 어떤 상황인지 인지도 못 하는 상태로 그냥 죽

은 듯이 널브러져 있었다.

안으로 들어가지 못하게 하는 기사단 앞에서 주저앉아 땅을 치며 통곡하는 유모의 울음소

리가 그녀의 귀에도 들려왔다. 하지만 물속에 잠겨 있는 듯 그 소리가 멍멍하게 들릴 뿐 누

구의 울음소리인지, 왜 저리 울고 있는지 전혀 알지 못한 채 두 눈을 스르르 감고 말았다.

***

“폐…하. 저러다 돌아가시옵니다. 통촉하여 주십시오.”

어떤 심정으로 황궁에 돌아왔는데, 바로 이런 소리를 듣고 있자니 칼리크의 눈에 핏발이

섰다.

“어제 쓰러지셔서 몸도 추스르지 못한 상태이옵니다. 물 한 모금 마시지 못하셨습니다. 폐

하. 마마님을 구해 주시옵소서.”

“듣기 싫다!”

유모는 한 가닥 희망을 품고 폐하에게 매달렸으나 돌아오는 건 매몰찬 대답뿐이었다. 그래

도 포기하지 않고 매달렸다. 손발이 달달 떨렸고 목소리마저 제대로 나오지 않아 더듬더듬

계속 읍소하기만 했다. 이러시면 안 됩니다. 이러다 돌아가십니다. 유모는 꺽꺽 우느라 이

젠 목소리조차 나오지 않고 있었다.

“돌아가라.”

폐하는 유모에게서 싸늘하게 돌아섰다. 이젠 다 귀찮다. 다 꺼지란 말이다.

“아끼시지 않으셨습니까. 폐하. 왜 이렇게 하십니까….”

유모의 그 말에 황제는 가던 발걸음을 멈추고 이를 악물었다.

아꼈지. 많이 아꼈지.

구름 위에 있었다. 그 위에서 땅바닥으로 바로 곤두박질쳤다. 온몸이 박살 나고 피고름이

흘러내린다.

“시끄럽다. 너도 감옥에 갇히고 싶으냐.”

“네. 저도 마마님과 같이 지하에 집어넣어 주소서. 제가 가서 돌보겠습니다.”

끈질겼다. 이 유모가 또다시 환장하게 군다. 지금 이따위 일에 신경 쓸 여유가 없다. 어떤

일을 당했는데.

“끌어내라. 다신 내 눈에 띄지 마라.”

매몰차게 돌아선 그는 사나운 발걸음으로 황제궁 안으로 들어갔다. 다 쓸어 버리지 않은

걸 다행으로 여겨라. 그의 안에서 들끓는 분노가 모든 것을 잠식해 버렸다. 벨리타를 향한

분노와 자기 자신에 대한 원망이 그의 눈을 가려 버렸다. 그의 붉어진 눈동자가 점점 더 새

빨갛게 변할 뿐이었다.

***

유모는 텅 비어 있는 마마의 방에 주저앉아 실성한 사람처럼 통곡을 멈추지 않았다. 이러

다가 제 손으로 마마님을 묻게 생겼다.

이러려고 지금까지 애지중지 보필한 것이 아니었다. 이럴 순 없었다. 이렇게 만나지도 못

하게 할 수는 없었다. 겨우 약초 물 한 모금만 넘기고 아무것도 드시지 못했는데 지하에 연

금이라니. 그런 곳에서 버텨 낼 몸이 아니시다. 이 일을 어쩌면 좋단 말인가.

바닥을 손으로 내리치며 엉엉 울어 댔다. 몸으로 밀치고라도 탑 지하로 내려가 보려 시도

했지만, 그 앞을 지키고 있는 기사단들은 철벽같았다. 뭐라도 드셔야 하는데… 뭐라도! 자

신은 안 돼도 누가 가지고 들어갈 수만 있다면….

유모는 사지가 끊어지는 고통에 몸을 제대로 가눌 수조차 없었다. 쓰러지려는 자신의 몸을

간신히 지탱하며 힘을 냈다. 여기서 자신이 쓰러지면 마마님은 큰일 난다. 그 지하에, 차가

운 방에 홀로 쓰러져 계신 마마님을 위해 뭐라도 묘책을 강구해야 하는데… 아!

그 아이.

갑자기 방법이 떠올랐다. 급하다. 마음이 급하다. 사력을 다해 그 아이에게 뛰어가는 유모

는 여전히 제정신이 아니었다.

***

칼리크는 어두운 방 안에서 등불 하나 켜지 않고 한가운데 있는 소파에 앉아 있었다. 말 그

대로 그저 앉아만 있었다. 심정이 복잡하다. 지금까지 돌아오지 않는 안톤과 원정대에 대

한 분노와 비탄에 빠져 시야가 뿌옇게 보일 정도였다. 머릿속마저 안개에 싸인 듯 흐리고

어지러웠다.

[폐하. 냉정하게 판단하셔야 할 때입니다.]

데인의 목소리가 다시 떠올랐다. 그래. 냉정하게 판단한 것이다. 황제를 기만하고 황실 근

위대장을 해한 죄로 벨리타를 지하에 연금시켰다. 같이 머리를 맞댄 공범까지 잡아낼 것이

다. 모두 살아남지 못할 것이다. 그녀의 계략에 죽어 간 안톤과 기사들을 생각하면 피가 거

꾸로 솟는다.

하지만 속은 자도 잘못이다. 오만했던 내 잘못도 크다. 그러니 어떻게 참회를 해야 할지….

숨만 쉬고 있지 거의 죽어 가고 있었다. 죽음. 가슴을 검에 베이고 죽음의 문턱까지 갔다

와 봐서 안다. 그것이 얼마나 두렵고 어마어마한 위력을 발휘하는지.

누가 죽고 싶겠나. 그것도 이렇게 개죽음을. 판단 하나 잘못한 죗값이 너무 크다. 그것도

아무 죄 없는 안톤이 희생된 것이. 차라리 잘못한 자가 그 죗값을 받아야 하는데 이건 잘못

되었다. 잘못되어도 한참 잘못되었다. 대신 죽은 거다.

나 대신 죽은 것이다.

이것이 용서가 되지 않았다. 넘어간 자신도, 이 모든 걸 주도한 벨리타도.

굳어 돌이 된 것처럼 칼리크는 미동도 없이 피눈물을 흘리며 그 밤을 지새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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