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8화 남자가 찾아와?
설마…. 아니죠? 뭔가 의심하는 건 아니죠? 칼…리크?
자신은 틀리지 않았다. 잘못하지 않았다. 그러니 그가 의심할 리가 없다. 우리가 어떤 사이
가 되었는데. 절대 그럴 사람이 아니다.
안톤만 돌아오면 다 해결된다. 그러니 제발….
자신과 같이 있지 않고 떨어져 있으려 한 칼리크에게 서운함이 들었지만 이내 밀어 버렸
다. 지금 그런 하찮은 감정을 느낄 타이밍이 아니다. 안톤과 원정대의 목숨이 달려 있는 일
을 앞에 두고 있다.
벨리타는 칼리크보다 더 죽어 가는 모습으로 애타게 원정대를 기다리며 황후궁 제 방에서
빌고 또 빌었다. 간절히 빌며 눈물이 다 흘러내렸다. 울지 마. 그들은 꼭 돌아올 거야. 그러
니 울지 마.
원래 늘 떨어져 있었던 사이였는데 최근 계속 같이 지내다 보니 그의 빈 자리가 너무 휑했
다. 그의 옆에서 힘을 보태 줄 수가 없어 그것이 가슴 아팠다. 그래도 그가 자신을 밀어 내
는 것만 아니라면 다 이해한다. 그는 더 괴로울 것이다. 안톤이 잘못될까 봐. 아니다. 절대
잘못되지 않는다.
벨리타는 아무리 닦아도 계속 흘러내리는 눈물을 포기하고는 밤새 창가에서 계속 빌기만
했다.
***
황궁 안 전체가 초주검이 된 듯 황량하고 음산했다. 날이 밝아 와도 아무 소식이 없자 칼리
크는 사막과 접한 곳으로 가기 위해 준비를 명했다.
그들의 목숨이 이제 경각에 달렸다. 아직도 사막에서 헤매고 있는 거라면.
신수를 불러내 도움을 받아야겠다. 하지만 한계는 있다. 신수는 주인을 지키는 것이 가장
우선시되기 때문에 주인에게서 그리 멀리 떨어지지는 못한다. 그 넓은 사막을 다 뒤질 수
있다면 벌써 신수를 동원했을 텐데 이 점이 개탄스러울 뿐이었다. 그래도 그 정도만이라도
탐색을 시킬 작정이다.
“칼리크. 나도 갈게요.”
벨리타는 당연히 그래야 한다 여겼고 그도 그걸 원할 거라 믿었다. 자신의 얼굴도 말이 아
니었지만 칼리크의 무너진 얼굴은 보는 것만으로도 눈물이 나려 했다.
아…. 안톤과 원정대를 생각하면 숨이 끊어지는 듯했다.
“아니오. 그대는 여기 남으시오.”
그녀의 눈동자가 얼어붙어 버렸다. 칼리크가…. 이렇게 나올 줄은 진정 몰랐다. 왜?
“아…니에요. 저도 같이 가야….”
“여기 남으라 했소!”
그의 강한 어조에 그녀는 주춤 뒤로 물러나야만 했다. 그의 목소리에 한 방 얻어맞은 듯 호
흡마저 멈춰 버렸다. 그가 자신을 밀어 낸다. 강력하게 멀리 밀어 낸다. 그의 목소리뿐만
아니라 표정과 시선에서 확연히 느낄 수 있었다. 얼음보다 더한 차가움에 온몸이, 심장이
얼어붙는 것 같았다.
데인과 최측근 몇몇만 데리고 급히 말을 타고 떠나는 황제 일행을 망연하게 보고 있던 벨
리타는 그들이 다 사라지고 났는데도 그 자리를 떠나지 않았다. 망부석이 된 듯 전혀 움직
이지도 않았다.
칼리크… 왜… 혼자서만….
자신을 버리고 간 것만 같았다. 버려진 것만 같았다.
칼리크… 칼리크….
속으로 목 놓아 그 이름만 수십 번을 불렀다. 부르고 또 불렀다. 칼리….
더 이상 부르지 못하고 무너졌다.
그 자리에서 쓰러지듯 주저앉았다. 다리에 힘이 풀리고 미약하나마 남아 있던 모든 기운이
다 빠져나가 껍데기만 남아 버렸다.
뒤에서 걱정 어린 시선으로 그녀를 지켜보던 시녀들과 유모가 비명을 지르며 달려왔다. 넋
이 나가 퀭한 눈으로 어디를 보고 있는지 초점까지 흐려진 그녀를 보고 난리를 쳤다. 모두
가 달려들어 그녀를 일으켜 보려 했으나 땅으로 꺼질 듯 축 늘어진 그녀의 몸이 들어 올려
지지 않았다. 안 되겠다 싶어 유모가 그녀의 앞에 앉았다. 그녀를 업으려 했다.
그것을 끝으로 세상이 새하얘졌고 그녀는 까무룩 정신을 놓았다.
쓰러지는 그녀의 몸을 시녀들이 끌어안고 간신히 유모의 등으로 옮겼다. 모두가 힘을 합쳐
유모가 일어서는 걸 도왔다.
“어서 의원을 불러와.”
가뜩이나 살얼음 위를 걷는 듯한 황궁이 더 다급하게 돌아갔다.
핏기 하나 없는 얼굴로 죽은 듯이 움직이지도 않는 벨리타를 진찰한 의원은 할 말이 없었
다. 기력을 다 소진해서 탈진한 것이라고 했다. 심장도 미약하게 뛰고 있고 숨도 겨우겨우
쉬고 있는 벨리타의 입술이 점점 새파랗게 변해 가고 있었다.
이러다 돌아가시게 생겼다며 유모와 시녀는 울며불며 벨리타를 돌보았다. 급히 약초 달인
물을 가져와 누워 있는 벨리타의 입술 안으로 떠먹였으나 삼켜지지 않고 입술 밖으로 줄
줄 흘러내리기만 할 뿐이었다. 스푼을 든 유모의 손이 달달 떨렸다.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계속 몸을 문질러 주며 따뜻하게 보온시켜 주는 수밖에.
아침에 그렇게 쓰러진 벨리타는 밤이 되도록 깨어나질 않았다. 그녀 옆에서 유모의 울음소
리는 점점 커져 가기만 했다.
***
사막이 시작되는 곳으로 이동한 칼리크는 참담한 시선으로 뜨거운 태양 빛에 이글이글 타
오르는 사막을 바라보았다. 안톤… 내 기사들.
자신이 사지로 내몰았다. 이제 한 가닥에 희망이라도 잡고 싶었다. 보는 눈들이 있어 호랑
이 신수를 투명한 채로 불러냈다. 소문이 흘러 유클로 쪽으로 들어가면 안 되었다. 신수는
아직 드러내서는 안 되었다.
투명한 호랑이 신수는 주인이 말하지 않아도 이내 몸을 돌려 사막 쪽으로 달려 나갔다. 찾
아라. 꼭 찾아와라. 이제 너밖에 없다.
칼리크는 무너지지 않으려 있는 힘을 다했다. 어디 있는지 알면 바로 찾으러 갈 텐데 이 넓
은 사막으로 무작정 들어가기란 무리였다. 설사 자신이 그런다 해도 다들 말리고 나설 것
이다.
사막을 바라보며 칼리크는 물 한 모금 마시지 않았다. 지금 그들이 어떤 고통을 받고 있는
데 그게 넘어가겠는가. 살아만 있어 다오. 죽지 마라. 안 된다. 죽지 마.
피맺힌 절규가 그의 안에서 쏟아졌다.
그렇게 사지가 뒤틀리는 시간이 흐른 뒤, 호랑이 신수가 돌아왔다. 칼리크는 두 눈을 질끈
감았다. 이미 알고 있었다. 신수가 다가오는 기미를 느꼈을 때 아무 소득이 없다는 걸 바로
알아차렸다.
안톤. 이러지 마라. 나한테 이러지 마.
돌아와. 안톤. 기사들을 데리고 내 눈앞에 나타나란 말이다.
꼭 감은 그의 두 눈에 물기가 맺혀 갔다. 이렇게 잃을 순 없다. 나한테 어떤 충신인데. 이렇
게 가지 마라. 제발.
칼리크의 가슴에는 피눈물이 흘러내렸다. 그렇게 암담한 시간이 속절없이 흘러가고 있었
다.
비통함에 젖어 있는 황제에게서 울분 섞인 절규가 터져 나오는 것만 같았다.
그의 주변 사람들도 같은 심정으로 고개를 떨구며 애통해했다.
***
처참하게 무너진 밤이 지나고 날이 밝았다. 이젠 가망이 없다. 모두가 그리 생각하면서도
감히 누구도 입 밖에 내는 사람이 없었다.
대신 하나가 폐하의 옥체를 생각해 그만 돌아가시는 게 어떠냐고 말해 보았지만 요지부동
이었다. 그렇게 물 한 모금 먹지 않고 같은 자리에서 두 번째 밤을 지새우고 있었다.
이젠 인정해야 한다.
안톤이 살아올 확률은 희박하다는 걸. 아니, 불가능하다는 걸.
시신이라도 찾아 장례라도 잘 지내 줬으면 좋으련만 그것도 할 수 없다. 왜 이 지경으로 만
들었나. 그래도 벨리타를 의심하지 않으려 했다. 아니라고 믿고 싶었다.
다 내 탓이다. 오만했던 자신 탓이다. 벨리타의 말을 그대로 믿은 내 탓이다!
그의 황금빛 눈동자가 서서히 붉어지기 시작했다.
세상에 가장 등신 같은 놈이었다. 바로 자신이. 벨리타에게 넘어가지 않을 자신이 있다고
장담한 머저리가 바로 자신이다. 아무리 그녀가 교활하게 술수를 부렸다 해도 걸려들지 말
았어야 했다. 그렇게 경계를 했는데도 허물어뜨리고 파고들어 온 벨리타가 요물은 요물이
다.
평소에도 벨리타는 자신을 끔찍이 싫어했다. 정확한 이유를 알지 못했지만, 그녀는 그랬
다. 싫어함을 넘어서 저주까지 퍼부어 대던 여자였다. 그런데 한순간에 바뀌어 자신에게
접근한 것이다. 분명 숨은 의도가 있다. 절대 혼자서 저지른 일이 아니다. 그 누군가와 손
잡고 가장 큰 고통을 주기 위해 영악하게 머리를 굴렸다.
자신이 가장 아끼는 안톤을 건드린 것이다. 기사단의 존경을 받는 안톤을 황제가 사지로
몰아넣음으로써 황제를 정치적으로 고립시키려 한 것이다. 그러기 위해 자신의 비위를 억
지로 맞춰 가며 친밀하게 다가왔던 거다. 거기에 넘어간 거고.
전날도 뜬금없이 온실에서 보자고 했을 때 뭔가 이상하다 여겨야 했다. 먼저 야자수를 가
리키며 보게 하고 오아시스를 떠올리게 한 뒤, 다음 날 바로 그런 정보를 터트렸다. 머릿속
에 사막에 오아시스라도 있다면 좋겠다는 염원을 심어 준 뒤 바로 터트렸으니 절실한 입
장에서는 솔깃해 그대로 믿어 버린 것이다.
마녀가 맞다.
그렇지 않고는 이런 대단한 세뇌를 시킬 수가 없다. 사람을 마음대로 가지고 노는 황후로
유명했던 이유가 있었다. 자신도 똑같이 그녀의 손에 놀아났다. 자신도 별것 아닌 남자였
다. 오만했다. 방심했다. 그녀에게 온전히 마음을 연 자신 탓이다.
어떻게 그리 연기를 할 수 있었던 거지? 얼마나 자신을 증오했기에 그런 짓을 하면서까지
접근해 안톤을 제거할 생각을 한 거지? 자신의 수족을 하나하나 제거할 꿍꿍이였던가? 맨
처음 그녀가 달라졌을 때 경계했었는데. 무슨 꿍꿍이인지 파악해야 한다고. 그래 놓고는
그녀의 유혹에 지고 말았다. 지금 뒤에서 얼마나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좋아하고 있을까.
그녀가 사악하게 계획을 짰다고 해도 거기에 응한 건 자신이다. 내 죄가 가장 크다. 고작
그런 여자의 간계에 장단을 맞춰 준 건 나다. 빌어먹을.
“제1 대공의 보호를 더 철저히 한다.”
그를 따라온 기사단 단장에게 명했다. 안톤에 이어 다음은 데인이다. 바로 자신을 치지 않
고 이렇게 피를 말린 다음에 치려는 수작이다. 누군가와 손잡았다. 쿠로인가? 아니면 에무
르? 펠론국도 있다. 혹시 셋이 다 같이 한 패인가? 그럴 가능성도 있다.
데인은 조심스럽게 보고했다. 이제는 그 일을 알려 드려야 했다. 안톤이 가망 없음에 기울
어지자 그 역시 모든 걸 더 냉정하게 봐야 했다. 안톤이 떠나기 바로 직전 황후가 한 일을
폐하도 아셔야 했다. 그때는 이런 일이 벌어질 줄 몰랐기에 그냥 지켜볼 수 있었지만, 지금
은 상황이 달라졌다. 그래서 설명을 드렸다.
“남자가 찾아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