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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군에게 찍힌 민폐 황후 입니다-65화 (65/130)

65화 아담과 이브처럼

보드라운 잔디 위에 누워 있는 것 같은 벨리타의 모습이 보였다. 들판에서 잠시 쉬고 있는

나비 같은 모습으로, 가장 유혹적인 나비의 모습으로 자신을 부르고 있었다. 얼른 잡지 않

으면 곧 다른 곳으로 날아갈 듯이 보이는 그녀의 모습에 갑자기 초조감과 불안감이 찾아

왔다. 이 분위기에 어울리지 않게 말이다.

너무 가슴 뛰고 흥분이 되어 그런 느낌이 잠시 들었다 가볍게 치부하며 그는 어제보다도

더 사랑스러워 보이는 벨리타에게 다가갔다.

“느림보.”

그녀의 말에 그는 환하게 미소를 지었다. 늦었다고 타박을 하는 것인가. 기다리다 지쳤다

고 뭐라 하는 것인가. 뭐가 되었건 기분은 다 좋았다.

“근사해.”

이곳도 벨리타도.

벨리타는 진심으로 다행이라 여겼다. 여기가 처음에 어떤 모습인지 그가 모르는 게 다행이

었다. 그러니 이런 감탄도 하지. 진작에 여기를 싹 다 바꾼 것이 잘한 일이었다. 이렇게 그

가 좋아하는 것 하나만으로도 모두 보상받는 기분이었다.

“나비인 줄 알았더니 꽃사슴이었네.”

가끔씩 이렇게 오글거리는 말을 하는 칼리크의 표정은 한없이 진지했다. 진심이라는 소리

인데 듣는 그녀는 부끄러웠다.

그것도 잠시, 은근하게 몸을 겹쳐 오는 그의 행동에 부끄러움은 이내 달아나고 뜨거운 열

기만이 가득했다. 방 안인데도 마치 탁 트인 들판에서 사랑을 나누는 것 같은 자유로움과

해방감이 더해졌다. 그것이 더 두 사람을 흥분되게 만들었다. 그렇게 자신들이 만든 환상

적인 세상에서 마음껏 뛰어놀다 드높이 훨훨 날아다녔다.

***

또 칼리크보다 늦게 일어났다. 혼자서 눈을 뜬 벨리타는 침대 위에서 한껏 기지개를 켰다.

은은한 초록색 카펫에 발을 디디며 어제 이곳을 택한 것에 대한 칭찬을 스스로에게 하고

있었다. 그와 함께 또 새로운 경험을 맛보았다.

어젯밤 사랑을 나눈 뒤, 칼리크가 이곳 온실을 구경하고 싶다 했다. 사실 벨리타도 온전히

다 구경하지 못했었다.

자리에서 일어나 그대로 나가려 하는 칼리크를 말렸다. 아무것도 걸치지 않고 알몸인 상태

로 나가려 했다. 식겁했다.

아무리 보는 사람이 없다 해도 여기까지는 아직 무리였다. 얼른 수건을 하나 들고 와 그의

허리춤에 잘 둘러 여며 주고는 자신도 가슴과 엉덩이를 가리듯이 수건을 둘렀다.

피식, 웃는 칼리크는 정말로 알몸이라도 상관없었나 보다. 조각상처럼 근사한 몸을 가지고

있는 건 인정하지만 알몸으로 걸어 다니는 건 말려야 했다.

그가 알몸이면 자신도 알몸으로 다니길 강요할 것이 뻔했기 때문이다. 겨우 그 사태는 면

한 뒤 두 사람은 손을 잡고 느긋하게 넓은 온실 안을 거닐기 시작했다.

온실 안이라 공기가 따뜻해서 거의 벗고 있었지만, 전혀 춥지 않았다. 높은 창으로 쏟아져

들어오는 달빛 덕분에 온실 풍경이 더 신비롭게 보여 마냥 신기하기만 했다.

높디높은 나무들을 올려다보고 낮게 피어 있는 작은 꽃에 감탄하며 이 모든 순간을 함께

나누었다. 같은 걸 보고 같은 생각을 하는 것이 참으로 사람을 행복하게 만들어 주었다. 수

건만 둘렀다 뿐이지 자신들이 자연 속을 거니는 아담과 이브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나뭇잎 사이로 달빛이 빗살무늬처럼 쏟아지는 곳에 당도하자 너무나 환상적이라 그녀는

온몸에 달빛 비를 맞으며 고개를 들었다. 둥글게 떠 있는 달이 저 위로 보였다. 얼굴 가득

쏟아지는 달빛이 따사롭게까지 느껴졌다. 손을 꼭 잡고 있던 칼리크가 저의 손을 다소 강

하게 끌었다. 다른 곳으로 가자는 신호였다. 그녀는 흔쾌히 그곳에서 벗어나 걸음을 옮겼

다.

칼리크는 신비롭게 쏟아지는 달빛을 고스란히 맞고 있는 벨리타를 넋 놓고 바라보다 눈동

자가 흔들리기 시작했다. 또 불안감이 엄습했다. 왜 지금 이렇게 행복한 순간 이런 느낌이

들었는지는 모르겠다.

하늘에서 내려온 듯 천사 같은 벨리타가 달빛을 향해 고개를 들고 만끽하는 모습에서 그

달빛을 타고 하늘로 올라가 버릴 것만 같은 불안감이 들었다. 눈동자가 마구 흔들렸다. 그

래서 바로 손을 잡아끌었다. 다른 곳으로 가자고.

장소를 바꾸자 불안감은 바로 사라졌다. 문득문득 찾아오는 이 불안감이 달갑지 않았지만

처음 느껴 보는 행복이라 그런 거라 여겼다.

“우와. 저 야자수 좀 보세요.”

벨리타가 온실에서 가장 키가 큰 나무를 손으로 가리켰다. 높은 나무 위에 새 깃털처럼 삐

죽삐죽한 잎들이 모여 붙어 있고 그 아래 열매도 매달려 있었다. 코코넛 열매인가. 야자수

가 여러 그루 모여 있으니 그곳만 순간적으로 오아시스같이 보였다. 신기한 장소였다.

“우리가 사막을 지나온 건가?”

칼리크의 농담에 그녀는 까르르 소리를 내며 웃음을 터트렸다. 점점 재미있어지는 그가 더

좋아지려 한다. 여기서 더 좋아지면 어떡하려고 이러는지 모르겠다.

칼리크는 농담이 아니었다. 벨리타와 이런 세상을 맛보는 것이 마치 메마른 사막을 지나

오아시스에 당도한 느낌이었다. 몸과 마음이 적셔지고 안정되어 간다. 시퍼런 파도만 일렁

이던 자신의 내면이 잔잔한 물결이 흐르는 것처럼 고요해진다. 진정한 휴식. 자신만의 오

아시스, 벨리타.

이렇게 평온했던 적이 있었던가. 항상 고민과 걱정으로 일관된 삶이었다. 이런 오아시스가

절대적으로 필요했다. 제대로 휴식을 취해야 더 잘 나아갈 수 있는 법. 쉼 없이 달려가기만

하다가 지쳐 나가떨어질 뻔했다. 이렇게 평온함을 맛보고 나니 이전 생활로는 돌아가고 싶

지 않았다. 아니 돌아가는 것이 불가능할 정도로 이 매력적인 세상에 푹 빠져 버렸다.

“이 꽃은 새를 닮았어요.”

길고 넓은 나뭇잎 사이로 커다란 꽃이 우뚝 솟아 있는데 멀리서 보니 정말로 새처럼 생겼

다. 화려한 붉은색의 꽃. 극락조화 앞에서도 감탄을 한 두 사람은 이제 슬슬 돌아가기로 했

다. 들판에 놓인 침대로.

“업어 줄게.”

그녀는 말없이 눈만 동그랗게 뜨며 갑자기 뜬금없이 그 말이 왜 나오는지 눈으로 물었다.

“지난번에는 입고 있는 옷 때문에 못 업어 줬으니 지금 해 주겠소.”

역시 포기를 모르는 남자다. 온실 속 수많은 꽃들보다 더 화사한 미소가 그녀의 입가에 피

어올랐다.

“대신, 수건은 벗기.”

입가에 걸렸던 미소가 그대로 굳어 버렸다. 네에?

벨리타는 난감한 눈으로 이미 몸을 돌리고 업을 준비를 하고 서 있는 칼리크의 널찍한 등

을 바라보았다. 개구쟁이 악동. 그럼 그렇지. 그냥 평범하게 업을 리가 없지.

그가 재촉하니 할 수 없이 그녀는 구릿빛 그의 등에 업혔다.

“그건 다음번에요.”

그의 귓가에 살며시 속삭였다. 그가 다음번엔 그렇게 한다는 것에 집중한 건지 지금은 입

이 찢어져라 미소를 지으며 그냥 넘어갔다. 다행이었다.

번쩍 그녀를 업어 들고는 저벅저벅 걸어가는 그의 목을 꼭 끌어안고 강인한 어깨에 살포

시 머리를 기대었다. 다음번엔 과감하게 그의 요구를 들어줘야 할 것 같았다.

수건을 둘렀어도 팽팽한 그의 피부와 보들보들한 그녀의 살결이 맞닿자 심장이 가장 먼저

빠르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의 숨결이 점점 거칠어지고 뜨거워졌다. 그런 모습에 기분이

한껏 고조되었다.

칼리크는 등에 와 닿는 그녀의 보드라운 살결에 몸이 뻐근해졌다. 단순히 그녀를 업어 주

기 위함이었는데 새로운 유혹을 자신의 등이 당하고 있었다. 그녀의 굴곡이 그대로 느껴지

는 그 느낌이 사람을 다시 몽롱하게 만들었다. 자연 거친 숨을 내뱉으며 그의 발걸음이 빨

라졌다.

다시 도착한 침대 위에서 두 사람은 다급하게 서로를 찾았다. 열렬히 불태우며 또 한 번 정

점을 향해 높이, 좀 전보다 더 드높이 비상했다. 그리고는 오래 머물렀다. 그 높은 곳에서

서로를 놓아주기 싫어 더 오래 머물며 천천히 지상으로 내려왔다.

한참을 그가 자신을 품에 꼭 안고 여운을 즐겼다.

그리고는 진지하게 말했다.

당분간은 매일 밤 사랑을 나눌 거라고. 마음 같아서는 낮에도 만나고 싶은데 그럴 수 없으

니 밤엔 꼭 만나야 한다고. 눈에 힘을 주며 강조하듯 주장하는 그가 귀엽게 느껴지는 건 왜

일까. 그만큼 그가 좋다는 증거겠지? 그에 대한 사랑이 나날이 커져만 간다. 이 기분이 너

무 좋았다. 그 기분 그대로 행복하게 잠이 들었다.

이젠 익숙해지려 한다. 노곤해진 몸을 이끌고 제 방으로 돌아가는 것이. 조용히 곁을 따르

는 유모와 함께 온실을 빠져나가고 있었다. 그러다 문득 야자수 앞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어젯밤에 이 앞에서 같이 서 있던 칼리크의 모습이 눈에 선하게 그려졌다. 벌써 보고 싶어

졌나? 이것도 좋은 현상이라 여겨졌다.

[우리가 사막을 지나온 건가?]

그가 한 농담도 귓가에 다시 들려오는 것만 같았다. 목소리도 얼마나 근사한지.

어제 에단과의 일을 잘 진행시킨 뒤 그 뿌듯함에 그와의 밤이 더 열렬했던 것 같았다. 에단

과 자칼단이 커지기 전에 만난 것이 신의 한 수였다. 천만다행이다. 여기서 더 커지면 그들

이 은신처를 사막으로 옮기게 되는데 그럴 일은 없을… 앗!

잠깐만 잠깐만.

이게 뭐지?

벨리타는 머릿속으로 마구 떠오르는 단어와 정보들을 제대로 맞추기 위해서 정신을 똑바

로 차려야만 했다. 그녀의 눈동자가 파랗게 초롱초롱해지기 시작했다.

에단. 사막으로 은신처 옮김.

유일한 오아시스를 찾아내 은신처로 삼음.

유클로 왕국을 둘러싼 사막.

데인 대공 집무실에도 붙어 있던 사막 지도.

그곳을 진입하기 위해 방법을 고심하는 칼리크.

이거다!

벨리타는 흩어져 있는 생각의 퍼즐을 완벽하게 맞추자 온몸에 소름이 다 돋았다.

제 생각이 맞았다. 소설 안에 길이 있었다. 드디어 찾았다.

가슴 앞에서 주먹을 불끈 쥐며 감격해 했다. 유모만 없었다면 소리를 지르며 펄쩍펄쩍 뛰

었을 것이다.

이거라면 칼리크가 이길 수 있다. 그러면 살 수 있다.

그가 죽게 되는 가장 큰 원인인 유클로 왕국과의 전쟁. 여기에서 이기고 살아남을 수 있다.

이걸 바로 생각해 내지 못한 것이 바보 같았다. 더 빨리 생각해 낼 수 있었는데… 아니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다.

어서 알려 줘야 한다.

얼른 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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