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폭군에게 찍힌 민폐 황후 입니다-64화 (64/130)

64화 아름다운 목소리

“지금부터 자칼단은 우리 황실 비밀 조직으로 승격합니다.”

“네?”

점점 더 머리가 멍해질 뿐이었다. 우리가 황실 비밀 조직이 된다고? 우리 같은 평민들 작

은 조직에 관심을 가진 것만도 이상한데 거창한 이름까지 붙여 주겠다니. 무슨 속셈이지?

“자. 이거 받으세요.”

벨리타는 탁자 위에 놓여 있는 검은 벨벳 주머니에서 뭔가를 여러 장 꺼내 에단에게 보여

주었다. 그의 눈이 튀어나올 듯이 커졌다. 그런 반응이 그녀로서는 만족스러웠다.

에단은 여러 번 눈을 껌벅거리면서 믿을 수 없어 했다. 지금 벌어지고 있는 모든 것이 믿을

수 없었지만, 이것을 보고는 더 확실히 깨달았다. 정말 다 알고 있다. 황제가 모두 알고 있

다.

바로 황금빛으로 된 두건이었다. 지금까지 쓰고 활동했던 허접한 것이 아닌, 고급 원단에

눈만 내놓을 수 있게 정교한 마무리를 한 두건이었다. 황실을 상징하는 황금빛. 정말 황실

소속이 되는 건가?

벨리타는 자신이 직접 두건 원단을 정하고 싶어 드레스 룸에서 딱 맞는 옷을 찾아냈다. 디

자인까지 그려 유모에게 비밀리에 움직이도록 부탁했다. 황금빛이 황실을 상징하는 것도

있지만 칼리크의 눈빛을 닮아 결정한 것이었다.

황후의 허락 아래 에단은 장엄하게 보이기까지 하는 두건에 손을 뻗었다. 앞으로 황실의

인정 아래, 황제의 지원 아래 자칼단이 움직인다라. 그동안 사실 황실이나 귀족을 비롯한

높으신 분들에 대해 불만을 품고 있었다. 대륙을 통일하는 것에만 집중해 민생이나 치안엔

구멍이 많았다.

“그대들이 앞으로 해 줘야 할 중대한 일이 있어요.”

중대한 일. 황실, 황제가 전달하는 중대한 일. 에단은 여전히 어리둥절하기만 했다.

사실 황궁이나 황제에 대해 특별히 깊이 생각해 본 적은 없었다. 자칼단을 만들 때는 그런

거창한 생각은 한 적이 없었다.

그저 억울한 일을 당하는 이웃들을 그냥 손 놓고 볼 수가 없어 조금씩 움직이고 있었던 것

뿐이었다. 자칼단 7명 모두가 생업에 종사하며 움직이다 보니 자금도 시간도 부족했다.

저희끼리 하소연도 여러 번 했었다. 누군가 높으신 분이 자신들을 지지해 주었으면 좋겠다

고. 남을 도와주다 단합한 권력에 부딪히면 서민인 자신들은 힘을 쓸 수 없는 현실에 그런

울분도 터트려 보았다.

그런데 지금 그냥 높으신 분도 아닌, 이 나라에서 최고의 권력자를 지지자로 모시게 되었

다. 황제는 민생을 신경 쓰고 있었다는 말이다. 그놈의 귀족들이 문제였던 것이다. 이 얼마

나 다행스러운 일인지. 그동안 황제를 잘못 알고 있었다.

“잘 들어요. 에단. 그대들이 나라를 살릴 수 있는 중요한 일입니다.”

우리가 나라를 살릴 수 있는 일까지 맡다니.

누구보다 강한 의협심이 솟아났다.

무섭도록 자신의 말에 집중하는 에단을 흡족하게 바라보며 그녀는 자신이 짠 계획을 차근

차근 설명하기 시작했다. 어디로 이동해서 무엇을 해야 하는지.

“여길 찾아오는 것처럼 시간을 지체하면 안 됩니다. 빠르게 움직여야 합니다. 알겠죠?”

에단은 고개를 끄덕였다. 점점 더 경건해질 수밖에 없었다. 아니, 경외심마저 들었다. 자칼

단 7명의 직업까지 모두 알고 계시다니. 저를 포함해 4명은 장사를, 나머지 세 명은 집을

짓는 일에, 마차를 고치는 일에, 나무와 돌을 깎아 도구를 만드는 일에 종사하고 있다. 이

모든 것까지 세세하게 다 알고도 우리 같은 보잘것없는 조직에게 이런 중대한 임무를 맡

겨 주시다니.

“이 일을 성공리에 끝나게 힘써 준다면 훗날 7인 모두 황실 기사단으로 임명하겠습니다.”

더 이상 놀랄 일도 없을 거라 여겼는데 아직도 남아 있었다. 입이 떡 벌어지는 제안이었다.

우리 자칼단은 그저 하루 벌어 하루 살아가는 평민에 불과하다. 그런데 귀족 자제들이나

들어갈 수 있는 황실 기사단이라니.

내가, 우리가 황실 기사단이 된다고?

“또한. 거기에 맞는 저택과 토지, 작위까지 주어질 겁니다.”

세상에.

이건 하늘이 내려 주신 행운이다. 빈곤하게 사는 저희가 이런 걸 받게 된다니.

“모든 것은 황제 폐하의 덕입니다.”

아차. 황제 폐하께서 내려 주신 행운이다. 제 생각을 꿰뚫어 보는 듯한 황후의 말에 바로

생각을 정정했다. 상당히 예리하게 보신다. 황후가 다시 보였다. 지금까지 들리던 소문 중

헛소문들이 많았던 모양이다. 이런 분을 두고 그런 음해하는 말들이 난무했으니. 자신은

눈으로 직접 본 것을 믿는다.

에단은 비장한 눈빛으로 고개를 숙였다. 하지만 이번 일을 이행하려면 한 가지 걱정되는

게 있었다.

“폐하께서 그대들에게 내리는 약속의 증표입니다.”

이것 역시 입이 다 벌어질 정도였다. 계속 입이 다물어지지 않는 일만 터진다.

생각하기가 무섭게 바로 조건을 제시하는 황후가 예사로 보이진 않았다. 생각보다 더 뛰어

난 사람이라는 생각에 자세를 똑바로 했다.

발밑에 있던 나무 상자를 황후가 열어 보이자 안에 가득한 금화가 눈에 들어왔다. 놀라움

의 연속이란 지금을 두고 하는 말이었다. 단 한 가지 걱정되는 것은 자금이었다. 하긴 황실

에서, 폐하께서 주도하시는데 자금을 생각 못 할 리 없다. 저의 생각이 또 짧았다.

“이 돈으로 충분할 겁니다.”

이 정도면 임무를 수행하기에 충분했다.

“뭐 하나 여쭤봅니다.”

놀라기만 하던 에단이 정신을 차렸는지 입을 열었다.

“저를 어찌 믿고 이런 큰돈까지 맡기시는지요.”

사람은 돈 앞에서 변하기 마련이다. 뒤로 빼돌릴 거라는 생각은 하지 않는 건가?

“믿으니까요. 괜히 자칼단 우두머리겠습니까?”

확고하고 확신에 찬 황후의 목소리. 흔들림 없는 눈빛. 그 자태만으로도 고귀한 분이심이

온몸으로 느껴졌다. 이분이 이 정도니 황제 폐하는 어느 정도로 높으시고 큰 분이실지 살

떨리는 경외감이 다시금 밀려왔다.

“폐하께서는 자칼단의 떡잎부터 알아보신 겁니다. 크게 될 인물들이라는 걸, 나라를 위해

그 누구보다도 폐하를 위해 움직여 줄 것이라는 걸.”

에단은 고개를 비장하게 깊이 숙였다. 가슴이 터질 듯이 먹먹해졌다. 이렇게 앉아 있을 수

가 없었다. 에단은 자리에서 일어나 바닥에 무릎을 세워 낮은 자세로 황후마마를 응시했

다. 힘차게 쥔 주먹을 제 가슴에 올리며 맹세했다.

“황제 폐하께 충성을 다하겠습니다!”

네. 꼭. 반드시 그렇게 해야 합니다. 당신을 믿겠습니다. 벨리타는 그를 독려하고는 마차를

태워 돌려보내고 난 뒤, 그제야 한숨을 돌렸다.

첫 단추는 잘 끼웠다. 지금 에단이 해낼 일도 대단히 중요한 일이었지만 더 중요한 건 황제

에 대한 태도였다. 이렇게 되면 저 에단은 황제 편이 되는 것이다. 지금 자신은 소설의 흐

름을 바꾸기 시작했다. 사람이 달라질 수 있듯이 소설도 달라질 수 있을 것이다. 해 보는

데까지는 다 해 볼 생각이다.

제 생각이 맞았다. 시기도 아주 적절했다. 아직 에단이 우두머리로서 강하게 성장하지 않

은 상태였다. 이제 막 시작한 단계. 이런 상태이니 제가 하는 말에 고개를 숙이고 따르지,

조금만 더 강해졌더라면 제 말을 듣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누구에게도 지배받지 않는 우두

머리로 순식간에 성장하는 인물이 바로 에단이었다.

축제에 가지 않았다면 큰일 날 뻔했다. 저 에단을 만나지 못했다면 이런 결심도 하지 못했

을 것이다.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오늘 밤 칼리크를 다른 곳으로 초대했기에 잠시만 쉬고는 다시 서둘러 준비를 시작했다.

이렇게 홀가분한 마음으로 칼리크를 만날 수 있게 된 것이 너무나 감사했다. 희망이 보였

다.

***

칼리크는 저녁 식사 후에 자신의 백마를 보러 갔다. 회복력도 빠른 기특한 녀석이었다. 주

인을 반기는 백마의 모습에 기분 좋은 웃음이 마구간 안에 울려 퍼졌다. 원 없이 백마를 쓰

다듬어 준 뒤 자신의 침실로 향했다. 벨리타가 다른 곳으로 자신을 초대했기 때문에 그곳

으로 가기 전 비밀리에 연습을 하기 위해서였다. 신수를 불러내는 연습.

아직은 호랑이 신수의 모습이 신기하기만 했다. 적응하려면 시간이 더 필요했다. 자신의

부름에 바로 응답하며 나타난 호랑이 신수가 너무 기특했다. 제 주변에 기특한 존재가 이

렇게 많아지고 있다.

자신의 넓은 침대에 호랑이 신수와 마주 보고 엎드리고는 서로의 얼굴을 끊임없이 바라보

았다. 손으로는 연신 호랑이의 얼굴을 쓰다듬어 주며 제 분신을 확인하고 또 확인하였다.

그리고는 눈으로 여러 가지를 명령했다. 완벽하게 자신과 같이 움직여야 할 신수이기에 연

습이 필요했다.

그가 시키는 대로 호랑이 신수가 입을 쩍 벌리기도 하고 일어나 한 바퀴 빙 돌기도 하며

정확히 이행하는 모습에 계속해서 감격하고 있었다. 신수가 발현되고는 무한한 연습이 필

요하다. 그런데 벌써 완벽하게 자신과 일심동체가 된 호랑이 신수가 한없이 경이롭고 고마

웠다.

이제 이쯤 하고 또 경이롭고 신비로운 사람을 만나러 가야 한다. 바로 자신의 아내 벨리타

를 만나기 위해 황제궁을 나서는 칼리크는 다시금 가슴이 설렜다. 상쾌한 저녁 공기가 그

를 감쌌다. 제 발걸음을 재촉하며 그는 그녀가 기다리고 있을 온실로 서둘러 다가갔다.

***

처음 와 보는 황후의 온실. 그동안은 이런 것이 있는지 관심조차 두지 않았다. 들어와 보니

풍경이 장관이었다.

거대한 나무들과 꽃들이 온실 안 가득 들어차 있었다. 칼리크는 크게 심호흡을 해 보았다.

신선하고 맑은 공기가 제 안으로 깊게 들어와 심장을 더 강하게 뛰게 했다. 이곳 어딘가에

벨리타가 있다. 은은한 불빛만 밝혀진 온실 저 안쪽에 환한 불빛이 보인다. 저곳이다.

칼리크는 기대감을 잔뜩 안고 빠르게 그곳으로 다가갔다.

밝은 빛이 새어 나오는 곳에 당도하고 보니 나뭇가지들이 그 입구를 미묘하게 막고 뻗어

있었다. 하지만 사람 하나 들어갈 공간은 있었다. 몸을 굽혀 그 안으로 들어가자 그의 황금

빛 눈동자가 또 다른 놀라움에 살짝 커졌다.

온통 초록색이었다. 온실과 조화롭게 꾸며진 숨겨진 방이 나왔다. 신기한 방이었다. 나무

와 꽃을 지나 들판에 들어선 느낌이었다. 그저 놀라울 뿐이었다.

“칼리크.”

거기에 이 아름다운 목소리가 침대에서 들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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