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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군에게 찍힌 민폐 황후 입니다-63화 (63/130)

63화 드디어 왔다

이미 유모에게 부탁한 물건은 벌써 모양을 갖춘 채 잘 보관되어 있었다. 제 드레스 룸에 들

어가 윤기 흐르는 화려한 황금빛 드레스를 유모에게 맡겼었다. 그녀의 지시대로 변신한 물

건은 어제 완성되었는데 정작 중요한 에단에게서 소식이 없다.

칼리크에 대한 마음이 커지면 커질수록 조급해졌다. 초조해졌다. 하루라도 빨리 시작해야

한다. 그런데 왜 이리 느리담. 에단을 기다리는 시간이 애가 탔다. 내일도 감감무소식이면

병사를 풀어야겠다.

그가 오면 바로 움직이도록 하기 위해 먼저 해야 할 일을 계속하기로 했다. 데인 대공을 만

나는 것. 이건 아주 중요한 일이다.

***

데인은 자신의 집무실로 황후가 왜 온다고 한 건지 의아했다. 단 한 번도 걸음한 적이 없는

이곳으로 오는 이유가 뭔지 짐작을 할 수 없었다. 게다가 자신을 황후궁으로 들라 하면 될

것을 왜 직접 오려는 건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예전과는 다르게 달갑지 않거나 거절하고

싶은 마음은 전혀 없었다. 은근 기다려졌다. 무슨 이유인지.

폐하의 결혼식 때 잠깐 꿈꿔 보았던 두 분의 사이를 지금 보고 있다. 꿈이 이뤄졌다고 할

까. 물론 첫 번째 꿈은 호랑이 신수였지만 그다음 꿈도 이루어졌다. 황후가 달라졌다 여겼

지만, 폐하 역시 많이 달라지셨다.

벌써 표정이 편안해지셨고 얼굴빛이 다르셨다. 마냥 솟구치기만 하시던 폐하셨는데, 간혹

불안정해 보이시던 폐하셨는데 지금은 안정과 평온함이 느껴졌다.

그 충만된 단단함 속에서 솟구치는 폐하의 힘은 더 막강했다. 그렇게 도운 것이 황후라는

건 인정하고 감사하는 일이다.

그러니 안톤과 함께 황후에 대한 생각이 점점 달라졌다. 시간은 걸렸다. 지켜보며 자연스

럽게 돌아선 것이다. 그것도 황후가 해낸 것이다. 그러니 지금 황후를 기대되는 마음으로

기다리고 있었다.

***

“무슨 일로 이렇게 저를 찾아오셨습니까?”

거두절미하고 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 황후의 표정이 이곳으로 들어오면서부터 비장하게

보였다.

벨리타는 잠시 데인을 바라보았다. 인사를 나누기가 무섭게 바로 저리 묻는 데인의 표정은

딱딱한 말투와는 다르게 호의적이었다. 다행이었다.

“제가 쓸 수 있는 예산이 어느 정도 되는지 알려 주세요.”

이런.

돈 이야기인 줄은 생각 못 했다. 혹 폐하에 대해 물어볼 것이 있나 싶었는데 그게 아니었

다.

“어디에 사용하실 건가 봅니다.”

예산이 얼마나 되는지 그것만 물어보러 오진 않았을 터. 그냥 빠른 대화로 이끌었다. 황후

가 고개를 끄덕이자 데인은 바로 답을 해 주었다.

“원하시는 만큼요.”

“네?”

벨리타는 정확한 뜻을 몰라 되물을 수밖에 없었다.

“카르탄 제국 재정이 황후마마께서 요구하시는 정도도 없겠습니까? 말씀만 하세요.”

사실 예전 같으면 절대로 이렇게 말하지 않았을 것이다. 뭘 믿고 예산을 퍼 주겠나. 그 많

은 예산으로 오만 남자들이나 거느리던 황후였는데. 하지만 지금의 황후에게는 예산을 요

구하는 타당한 이유가 있을 것이고 거기에 합당한 금액을 요구할 것이다. 충분히 들어줄

수 있는 선이다.

벨리타는 가슴 언저리가 따끈해지는 걸 느꼈다. 대공의 호의적인 말투에 감명받았다고 할

까. 이곳에 오면서 돈을 요구해야 하는 상황이라 긴장했었는데 흔쾌히 얼마건 다 주겠다고

하는 대공에게 감사했다.

“10만 골드가 필요해요.”

데인의 호의적인 태도에 힘입어 벨리타는 정확한 금액을 이야기했다.

“더 필요하시면 언제든지 말씀하세요. 지난번 미스터 카르탄 대회 예산 50만 골드도 폐하

께서 황후궁 예산으로 넣어 두라 하셨습니다.”

칼리크….

그건 빙의하고 얼마 안 됐을 때였는데, 그 거절한 예산을 도로 넣어 주다니. 그때는 이런

관계가 아니었는데 어떻게 된 거지? 그 대답은 바로 데인이 해 주었다.

“폐하께서는 천재지변이 일어나지 않는 한, 그 어떤 것도 한번 결정하신 건 절대 바꾸지

않습니다. 그러니 신중하게 결정하시지요.”

그래서 원래 황후궁 예산으로 정한 것이니 대회를 취소해도 그대로 황후궁 앞으로 남겨

놓았던 거구나. 칼리크답다.

“차 한잔하실까요?”

데인은 집무실에서 그 누구하고도 차를 마시지 않았다. 시간이 없어 바쁜 몸이었다. 하지

만 황후에게서 폐하와 같은 분위기가 느껴졌다. 안정되고 편안한 분위기. 이런 황후에게

그 정도 시간을 내는 것이 가치 있게 여겨졌다.

벨리타는 기쁜 마음으로 그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처음 와 보는 대공의 집무실. 칼리크 못

지않게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벽 한쪽에 커다란 지도가 붙어 있는 것까지 훑어본 벨리타는 고개를 돌리다가 다시 걸려

있는 지도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유클로 왕국과 접해 있는 지형의 지도.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유클로 왕국 주변을 사막이 에워싸고 있으니까. 역시 이것이 제일 문제긴 하구나.

곧이어 차를 들고 들어온 시종에게 눈을 돌리며 그녀의 생각은 거기에서 멈추었다.

처음으로 대공과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 차 한 잔까지 마시며 일상적인 대화도 나누고

그 방을 나왔다. 벨리타는 황궁 안 사람들의 시선부터 저에 대한 달라진 태도를 확실히 실

감할 수 있었다.

이젠 만나는 사람마다 공손히 인사를 한다. 시선도 차갑지 않았다. 아니, 멀찍이 떨어져 있

어도 뛰어와서 인사하고 가는 사람들이 더 많아졌다. 기뻤다. 흐뭇했다. 이제야 자기 자리

가 확실히 서 있는 것 같았다.

그녀가 돌아오고 곧 현금 상자가 도착했다. 가로세로 50cm 정도 되는 중후한 오크색 나무

상자에 가득 10만 골드가 담겨 있었다. 이젠 준비가 다 끝났다. 무대는 완벽하게 준비를 마

쳤다. 이제 주인공만 등장하면 완성이다.

조금 있으면 어두워질 텐데 애가 탔다. 정말 내일 잡으러 가야 하나…. 지금 며칠째인데 이

리 늦나. 이렇게 굼뜨게 구는 건 하등 도움이 되지 않는다. 만나게 되면 이것부터 못 박고

시작해야겠다. 그것도 그가 와야 뭘 하든가 하지. 속이 타들어 가는 벨리타는 제 방에서 안

절부절 계속 왔다 갔다 할 뿐이었다.

***

왔다.

드디어 왔다.

다행이다. 정말 다행이다.

이제라도 에단이 왔으니 지금까지 속 끓이게 한 건 다 용서할 수 있었다.

밖이 어둑어둑해지자 거의 포기하고 있던 벨리타에게 시녀가 와서 고했다. 누가 만나고 싶

다 하며 찾아왔다고. 물론, 그 말만 듣고 황후궁 출입을 허한 것은 아니었다. 시녀가 내민

팔찌를 받아 들면서 1층 응접실로 어서 모시라 전했다. 자신이 에단에게 건네준 팔찌였다.

그가 정말로 왔다.

1층 응접실로 들어오는 에단의 표정은 한껏 굳어 있었다. 황궁은 처음 들어오는 그로서는

모든 것이 어리둥절할 것이다. 다 이해한다.

벨리타는 예를 갖추며 인사를 하는 에단에게 서둘러 제 앞에 있는 소파에 앉으라 권했다.

이제부터가 중요한 순간이다.

“많이 놀라셨나요?”

당연한 거였지만 예의상 물었다.

“송구하오나 설명을 해 주실 수 있으시겠습니까?”

마음에 들었다. 굳은 자세로 앉아 있어도 눈빛은 절대 주눅 들지 않았다. 당당하고 강한 그

의 눈빛이 무엇보다도 마음에 들었다.

“저를 자세히 보세요.”

살짝 당황한 에단은 이내 진지하게 벨리타를 살펴보기 시작했다. 황후의 얼굴은 처음 본

다. 소문대로 아름답기는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살아 있는 사람인지 의심이 갈 정도로.

이렇게 아름다운 여인은 처음 본다. 하지만 왜 이러고 있어야 하는지 모르겠다. 황후의 만

행은 익히 들어서 알고 있다. 그런데 전혀 그런 분위기가 아니었다. 다 헛소문일 리는 없을

텐데 완전히 다른 사람처럼 보였다.

“저를 알아보겠습니까?”

에단은 황후의 말에 미간을 찌푸렸다. 이런 사람을 만난 적이 있다고? 절대 없다. 만났다면

절대 기억 못 할 리가… 어라?

그렇게 확신하던 에단의 시선이 그녀의 입술에 고정되었다. 저 입술… 야무지게 보이는 저

입술…. 눈에 익다. 장사를 해서 그런지 눈썰미 하나는 기가 막히게 좋았다.

설마.

“그… 토끼 가면?”

맞다면 황후가 왜 그런 차림으로 돌아다녔지? 아니 그런 몰골로? 사람들이 알고 있는 황후

는 죽었다 깨어나도 그런 꼴을 하고 나다니진 않을 인물인데.

벨리타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이자 에단을 바로 머리를 조아렸다. 큰 결례를 저질렀

다. 그런 몰골의 여자를 황후라 누가 생각하겠는가.

에단은 황궁으로 오기 전까지 자칼단과 의논의 의논을 거듭했다. 가야 한다, 가면 죽는다,

의견이 분분했다.

하지만 가 보기나 해 보자로 의견이 좁혀져 이곳에 오게 된 것이었다. 팔찌도 할아버지에

게 감정받아 보니 진짜였다.

어마어마한 가격의 물건이었다. 그러니 이것을 팔면 죽은 목숨이라 협박한 거였다. 난감한

가운데 과감히 결정을 하고는 단신으로 이곳에 들어왔다. 만약 잘못되더라도 저 혼자 감당

할 생각이었다. 이렇게 되고 보니 할아버지의 말이 모두 맞았다. 정말로 이 팔찌의 주인을

만나게 된 것이다.

“이곳은 비밀 유지가 되는 방이니 마음 놓고 이야기할게요.”

황후가 먼저 말을 시작했다. 안 그래도 그것이 가장 궁금했다. 왜 자신을 여기로 불렀는지.

“자칼단의 의협심을 황제 폐하께서 높이 평가하셨습니다. 이 일을 제게 대신 일임 하신 거

고요.”

칼리크와 에단의 관계를 시작 단계부터 좋게 만들어야 한다.

“전폭적인 지지와 후원을 할 생각입니다.”

에단은 여기까지만 듣고도 머리가 어지러웠다. 자칼단이 들통난 것도 모자라 황제가 알고

있다고? 그런데 지지와 후원? 뭐가 뭔지 그 영특한 머리가 잘 돌아가지 않고 있었다.

며칠 전, 팔찌를 감정받을 때 황실 황후의 것이라고 말해 주는 할아버지 앞에서 크게 놀랐

었다. 비싼 물건이라는 걸 안 것만도 놀라운데 황후의 것이라니?

팔찌 앞의 방패 모양은 황실의 상징 문양이고 이런 팔찌는 황제 폐하 내외만이 할 수 있다

며 여자의 것이기 때문에 황후 것이 틀림없다고 할아버지가 설명해 주었다.

다만 그때는 이 팔찌를 건네준, 얼굴이 얼룩덜룩한 여자를 황후와 연결 지어 생각하지 못

했기에 황후의 물건을 왜 그 여자가 가지고 있었는지 모든 것이 의문투성이였다. 이제야

모든 것이 이해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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