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화 절대 안 죽어
이젠 비일비재해서 바로 알아차린다. 이 대공의 태도와 말투를 보니 이 남자하고도 뭔가
관계가 있었음이 뻔했다. 이 몸이 저지른 짓이 해도 해도 너무해 쓰디쓴 신물이 올라왔지
만, 이 남자를 처리하는 것이 급선무다. 예전에야 이 몸이 어떻게 굴러먹었건 지금 이 몸의
주인은 나다!
“비켜.”
그녀의 명령에 쿠로의 입술이 야비하게 비틀어지고 있었다. 같잖았다.
“꼴값 떠네. 하하 호호, 거기다가 노래까지. 지금 누구 흉내 내고 있는 거야? 아주 역겹군.”
역겨운 건 너다. 별거 아닌 신수로 황제를 압박하고 있는 더 별것도 아닌 자.
“감옥에 갇히고 싶은가 보지?”
지지 않았다. 위대한 칼리크와 사랑하는 사이가 된 지금, 예전과는 다른 자신감이 샘솟았
다. 게다가 난 황후다!
“하! 보기만 해도 밥맛 떨어지는 칼리크하고 붙어먹더니 보이는 게 없지?”
“어.”
너 같은 건 보이지 않는다. 그리고 칼리크 앞에서는 밥맛이 더 좋아진다.
쿠로는 거침없는 벨리타의 태도에 뚜껑이 확 열렸다. 가뜩이나 산티노 같은 놈과 같이 저
몸을 공유했다는 게 구역질 났었는데 겨우 만난 자신한테 이따위로 구는 이년이 아주 더
럽게 보였다.
“이 건방진 년!”
짝!
벨리타의 고개가 순식간에 돌아갔다. 그리곤 다시 땅으로 쓰러졌다. 지금 무슨 일이 벌어
졌는지 잠시 인지할 시간이 필요했다.
따귀를 맞았네….
고작 저런 인간한테, 예전 벨리타와 오십보백보인 자한테 맞았다. 꽤나 아팠다. 칼리크도
조심조심 만지는 자신의 뺨을 감히 네까짓 게. 벨리타는 이렇게 분노해 보기도 처음이었
다. 쓰러진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그녀는 당당히 쿠로와 마주 섰다. 다시 일어선 그녀의 눈
에 쿠로가 비열하게 다시 손을 올리는 것이 보였다.
쫘악!
이번에도 고개가 돌아갔다.
벨리타가 아닌 쿠로의 고개가!
“더는 그 손 올리지 못할 거다. 여긴 황궁이다.”
생전 처음 뺨을 맞아 본 쿠로는 분에 못 이겨 씩씩거렸다. 아파도 더럽게 아팠다. 뺨이 날
아가는 줄 알았다.
게다가 칼리크 못지않게 압박하는 목소리가 재수 없다. 하지만 맞다. 더 휘두르고 싶었지
만, 황궁이라는 게 원통할 뿐이었다. 그래도 이년은 날 감옥에 집어넣지 못한다. 이년에게
뒤집어씌우면 그만이다. 날 유혹했다고. 이년도 그렇게 되면 불리하다는 걸 잘 알고 있다.
에무르에 이어 칼리크. 이런 별것도 아닌 놈들보다 내가 못한 게 뭔데?
쿠로는 배배 꼬여 있어서 자신이 남자로서 질투하고 있다는 걸 깨닫지 못했다. 그것들보다
아래로 취급받고 뺨까지 맞은 것이 견디기 치욕스러워 힘껏 쥔 두 주먹을 부들부들 떨 뿐
이었다.
순간, 전에 보았던 알몸인 에무르의 다리 사이가 떠올랐다. 자신보다 큰…. 더 부글부글 끓
어올랐다.
“칼리크가 큰가 보지? 큰 게 그렇게 좋냐? 이 밝히는 년아.”
상스럽기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대공이나 된 자의 입이 똥통이었다. 뱉어 내는 것마다 똥
같은 것만 쏟아져 나왔다.
“당연히 크지. 어마어마하게 크지.”
“뭐… 뭐어?”
이게 돌았나. 저런 표현을 쓰며 거침없이 맞받아치는 벨리타의 목이라도 조르고 싶었다.
“너와는 다르지. 그릇이 커도 너무 큰 위대한 황제니까.”
아예 겁을 상실한 벨리타에게 쿠로는 무섭게 쏘아붙였다.
“황제는 나지. 그놈은 죽을 놈이고.”
“안 죽어!”
벨리타는 더 당당하게 맹세하듯 소리를 높였다.
절대 안 죽어. 웃기지 마. 내가 옆에 있으니까 꼭 살릴 거다.
“그놈은 곧 위험해질 거다. 그 옆에 붙어서 어디 똥줄 타 봐라.”
벨리타는 어이가 없었다. 소설에서 이 쿠로는 신수 하나 믿고 까불었다는 것 정도밖에는
잘 기억이 나지 않았다. 그다음 어떻게 되는지 기억에 없는 걸 보니 그 신수도 주인을 닮아
별거 아니었을 것이다. 비중도 없는 하찮은 악당. 그런 자가 감히 황후에게 이런 짓을 해!
“위험해지는 건 너일 텐데.”
이 자리가 더럽고 열받아 몸을 돌리던 쿠로는 다시 그녀에게 휙 몸을 돌렸다. 이게… 왜 저
런 확신에 찬 말을 하지?
“네 신수 걱정이나 하지?”
헉.
순간적으로 쿠로의 가면이 벗겨졌다.
이게… 뭘 아나? 아니다. 절대 아니다. 그건 불가능하다. 아무도 알지 못한다. 지금 자신의
신수의 상태를.
벨리타는 직감적으로 깨달았다. 뭔가 자신이 건드렸다는 걸. 그러니 표정이 저렇게 변하
지.
“조심하는 게 좋을 거야. 칼리크는 모든 걸 다 알고 있으니까.”
다 알고 있는 건 나다. 그걸 모두 알려 줄 거니 이건 틀린 말이 아니다.
두 눈이 휘둥그레진 쿠로는 부리나케 그 자리를 떠났다. 패잔병의 뒷모습을 한 채. 정말로
다 알고 있다는 소리인가? 그건 아닐 것이다. 신이라면 몰라도. 그래도 구렸다. 모든 것이
구렸다.
이런 개같은 벨리타.
에무르와 협상한 것만 없으면 오늘 밤이라도 독살해 버리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뜻을
이루고 나면 내가 너도 꼭 같이 죽여 주마. 줄을 잘못 서면 어떻게 되는지 반드시 보여 줄
테다. 이 빌어먹을 년아.
미쳐도 단단히 미친 벨리타에 대한 증오심이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았다. 이를 북북 가
는 쿠로의 얼굴이 괴물처럼 뒤틀리고 있었다. 갑자기 저쪽에서 시종들이 걸어오자 바로 다
시 가면을 쓴 쿠로는 그러면서도 쥐새끼처럼 빠르게 황궁을 빠져나가기 바빴다.
***
쿠로가 내빼고 나자 벨리타는 잠시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힘이 다 소진되었다. 저런 식으
로 사악하게 구는 쿠로 앞에서 겁이 나지 않았던 건 아니다. 하지만 칼리크를 생각하며 끌
어낸 용기가 제 안에서 더 커졌다. 그거 하나만 믿고 대항했다. 이젠 앞으로 누구도 칼리크
를 건드리지 못한다. 내 칼리크는 내가 지킨다.
벨리타는 누가 알아차릴까 봐 서둘러 몸을 추스르고는 황후궁으로 걸음을 재촉했다. 누구
도 알 필요가 없다. 칼리크가 알아서 좋을 게 하나도 없다.
그녀는 무슨 일이 있었는지 절대 표 내지 않고 제 방으로 올라갔다. 하지만 유모에게만은
들켰다. 벌게진 뺨을 그냥 넘어갈 리가 없었다. 아무도 모르게 해 달라고 신신당부한 그녀
는 유모가 가져다준 차가운 수건으로 얼얼한 뺨을 식혔다.
에단이 와야 하는데. 이제 올 때가 되었는데. 수일 내로 오라 했으니 와야 한다. 오지 않는
다면 잡아서라도 여기 데리고 와야 한다.
쿠로 대공이 저렇게 비열하고 더러운 족속인 줄 알았으니 더 철두철미하게 전략을 짜야
한다. 그녀는 간절한 마음으로 자신의 머리가 팽팽 잘 돌아가기를 빌고 또 빌었다.
***
오늘 밤은 칼리크를 위해 얇은 속옷 하나만 입었다. 길이도 무릎 위로 올라가는 짧고 얇은
슬립으로 준비했다.
화장도 정성 들여 약간 진하게 했다. 워낙 살결이 하얘서 여전히 뺨에 붉은 기가 남아 있었
기 때문이다. 칼리크는 알아차리지 못할 것이다.
우리의 시간을 망치고 싶지 않았다. 알지 못하게 해야 한다. 그 일에 대해 설명할 수가 없
다. 자칫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도 있다. 지금 더 큰 일을 해야 하는데 그런 보잘것없는 인
물 하나에 연연해 할 필요가 없다.
쿵.
이렇게 준비한 보람이 있었다. 문을 닫고 선 칼리크가 확 달아오른 표정으로 넋 놓고 자신
을 보고 있었다. 점점 그의 눈빛이 몽롱하게 변해 갔다. 그것만으로도 그녀는 자신이 가장
섹시한 여인이 된 듯한 기분을 맛보았다.
칼리크는 숨이 턱 막혔다. 등불 하나만 밝힌 어스름한 방 안에 하늘거리는 속옷 하나만 입
고 고운 자태로 서 있는 벨리타의 모습에 호흡이 잘되지 않았다.
입 안도 바짝바짝 말라 갔다. 이 정도 떨어져 있는데도 보는 것 하나만으로 모든 유혹을 다
당하고 있었다.
제 가슴을 쥐락펴락하는 벨리타를 곧 가질 텐데도 심한 갈증이 일었다. 다가가기도 전에
최고조의 흥분 상태에 놓였다. 걷지도 못할 정도로 온몸이 터질 것 같았다.
마음이 통했던 걸까. 그녀가 다가왔다. 한발 한발 아주 감질나게 다가왔다. 청초함과 화려
함을 동시에 풍기며 다가오는 벨리타에게 완전히 홀려 버렸다. 정신이 멍해질 정도였다.
살아오면서 다리의 힘이 풀린 적이 단 한 번도 없는데 지금 그랬다. 야금야금 감질나게 오
는 벨리타가 사정거리 안에 들어오자 확 낚아채 버렸다.
마녀.
천사에서 여신. 그리고 마녀까지 못 하는 게 없는 내 벨리타다.
급했다. 항상 급했다. 언제가 되어야 여유가 생길지는 모르겠다. 생기지 않아도 상관없다.
서서히 불이 붙는 것이 아니라 그냥 바로 확 붙어 버렸다.
아예 활활 타올랐다. 다급하게 맞붙은 두 사람의 입술 사이로 똑같이 야릇하고도 재촉하는
신음 소리가 동시에 터져 나왔다. 이 방 안에 모든 것을 다 태우고도 남을 불기둥이 무섭도
록 치솟았다. 그들의 열정적이고 황홀한 밤은 이제 시작되었다.
***
칼리크의 배려로 벨리타는 점심 식사도 건너뛰고 느지막하게 일어났다. 그래도 계속 노곤
하고 피곤했다. 할 일이 많은데 이렇게 누워 있으면 안 되었다.
겨우 정신을 차리고는 유모에게 부탁해서 얻은 지도를 탁자 위에 펼쳐 놓았다. 카르탄 제
국만 있는 지도. 축제에서 돌아오자마자 이 지도를 받아 들고는 시간 날 때마다 틈틈이 들
여다보며 묘안을 쥐어짜고 있었다.
분명 로카 왕국은 해상으로 쳐들어온다. 해안가 마을로 쳐들어와 아녀자들을 유린하고 학
살을 일삼으며 황도로 전진해 들어온다.
그런데 이 200명 남짓 사는 해안가 마을은 지대가 낮아 마차 하나 지나다니는 좁은 길 외
에는 높은 절벽이 병풍처럼 둘러싸고 있다.
그러니 다른 도시나 마을로 가려면 그 외길을 통하거나 30m가 넘는 절벽에 드리워진 그
물망을 잡고 사다리 타듯이 올라가야 한다. 젊은 사람들이야 거뜬한 일이지만 조금 나이
든 사람들은 외길로 다닐 수밖에 없는, 자칫 고립될 수 있는 지형적인 조건을 가지고 있다.
그래도 나라만 평화롭다면 그 해안가 마을은 풍부한 먹을거리로 자급자족이 되는 곳이었
다. 굳이 마을이나 도시로 나갈 이유가 별로 없다.
여기부터 막아야 한다. 미리 대비해야 한다. 그러자면 에단이 필요하다. 어서 와라. 제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