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1화 꿀이 뚝뚝
커다란 욕조에 나무로 된 덮개가 덮여 있었는데 그걸 걷어 내자 김이 모락모락 올라왔다.
그 안에 따뜻하게 유지된 목욕물이 가득 담겨 있었다.
유모!
감사할 일이 이리 많다니. 이 몸은 정말 복 받았다. 벨리타는 행복에 겨운 미소를 그에게
돌렸다.
그 역시 마찬가지였다. 유모를 괜히 욕했다. 환장할 유모라고 했는데 이젠 그 단어를 지워
버렸다. 이 모든 것이 유모의 덕이리라. 사랑스러운 벨리타 옆에 이런 유모가 있어 이젠 든
든해졌다.
두 사람은 신이 난 표정이 되어 망설임 없이 욕조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새로운 놀잇감에
뛰어든 아이들처럼 순수하게 기뻐하며 서로에게 장난을 치는 두 사람의 주변이 온통 핑크
빛이었다.
잠시 그의 앞에 앉아 심신을 풀고 있는 그녀의 몸을 뒤에서 가만가만 따뜻한 물로 쓸어 주
는 손길에 점점 더 노곤해졌다. 물속에서 밀착하고 있어서 그런지 서로를 더 친밀하게 느
끼는 순간이었다.
개운해진 몸으로 두 사람이 다시 침대로 향한 것은 당연했다. 그리고 서로에게 집중하느라
새벽이 다 지나가고 있다는 것도 알지 못했다. 그런 두 사람 위로 환한 달빛이 수줍게 내려
앉고 있었다.
***
쿠로는 여기저기 결리는 몸을 이끌고 황궁 안으로 들어섰다. 자신의 예민한 촉이 말해 준
다. 황궁에 가서 뭔가 달라진 것이 없나 확인하라고. 자신의 신수 문제도 있었지만 가장 신
경 쓰이는 건 그 재수 없는 칼리크의 신수가 어찌 되었는지였다. 뭔가 진행이 되었다면 황
궁 공기부터 다를 테니까.
하지만 그런 걱정이 기우였던가. 아무것도 변한 것이 없었다. 이리저리 확인하던 쿠로는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아직 소식이 없는 모양이다. 다행이다. 신수가 발현되었다면 이 황궁 안 모두가 알 것이
고… 아니, 나라 전체에 바로 알렸을 것이다. 가만있을 놈이 아니다. 그동안 자신한테 받은
설움 때문에라도 동네방네 발 빠르게 알리고도 남았을 놈이었다. 그런데 조용했다. 얼마나
다행인지.
골치 아프게 엉켜 있던 제 근심이 스르륵 사라지자 쿠로는 이곳으로 오기 전 잠깐 만난 마
통단들이 사람 속을 박박 긁어 대는 통에 열받은 일이 떠올랐다.
“대공님. 요즘 신수가 발현되었다는 소리를 안 하시던데 잘 크고 있겠죠? 하하.”
말 신수가 나올 때마다 이들을 만나 으스대며 자랑하던 쿠로가 요즘 잠잠했기에 걱정 반
우려 반으로 이들이 쑥덕거린 모양이었다.
“그럼요. 바로 어제도 나왔지요.”
그건 사실이다. 이들이 이렇게 나오는데 어제 신수가 나오지 않았다 해도 거짓말이라도 해
야 할 판국이었다.
“얼마나 더 컸던가요?”
쿠로는 얼른 침을 꿀꺽 삼키며 표정 관리에 힘썼다. 더 작아졌다고는 죽어도 말 못 한다.
“무럭무럭 자라고 있더군요. 아주 기특합니다.”
그의 거짓말에 세 공작이 얼굴을 빛내며 좋아라 했다. 자신들이 잡을 권력이 더 가까워졌
다 여기고 저리 좋아한다는 걸 다 알지만, 고작 이런 자들에게까지 거짓말을 해야 하는 현
실이 암담했다.
“이제 마음대로 신수를 불러낼 수 있게만 되면 그냥 황제 자리는 대공님의 것입니다.”
안다. 알아!
그만 좀 해. 그놈의 신수 타령.
가뜩이나 심기 불편한데 사람 속을 뒤집어 놓는다. 그렇다고 제 편인데 공격을 할 수도 없
고 차라리 자리를 피하는 게 상책이었다. 바쁜 일을 핑계로 그만 나와 버렸다. 나와 보니
가야 할 곳이 떠올랐다. 눈으로 직접 확인해 봐야겠다.
쿠로는 절대 세 공작들에게서 도망친 것이 아니라고 합리화시키며 마차를 타고 황궁으로
향했다.
그래서 지금 이곳으로 찾아온 것을 스스로 칭찬하며 흡족해했다. 가뜩이나 남의 말 믿지
않는 자신인데 이렇게 직접 확인하는 것이 정답이었다.
내심 조마조마하던 긴장감을 슬쩍 풀어 버리며 기분 좋게 산책하듯 황궁 안을 거닐었다.
절로 콧노래가 흥얼거려졌다.
어라?
2층 황궁 창밖으로 내려다보이는 호숫가 근처에 남녀 두 사람의 모습이 작게 보였다. 눈을
가늘게 뜨며 유심히 바라보니 낯익은 두 사람이었다. 바로 황제와 황후.
하!
저것들이 지금 뭐 하고 있는 거야?
언제 저렇게 붙어 있어 봤다고 저리도 다정하게 걷고 있는 건지, 아주 가관이었다. 크게 콧
방귀를 뀌며 비웃었다.
가만.
눈을 더 예리하게 뜨고 주변을 휘휘 둘러보니 호위하는 기사단도 시녀들도 전혀 보이질
않았다. 미쳤군. 무슨 수작을 부리느라 주변 사람들도 다 물리고 둘이서 저리 딱 붙어 다니
는지. 저러니 황제가 글러 먹었지. 내가 황제면 저렇게 위험한 짓은 절대 하지 않는다. 어
디서 뭐가 튀어나올지 알고. 오호! 그거다.
이건 기회다.
쿠로의 게슴츠레 뜬 눈은 황제 놈과 팔짱을 끼고 나비처럼 사뿐사뿐 걷고 있는 벨리타에
게 집중되었다.
***
“다리 안 아프오?”
칼리크가 자신에게 다정하게 말하는 걸 들으면서 벨리타는 예전 여기에서 그가 다리를 주
물러 달라고 한 것이 떠올랐다. 이렇게 달라졌다.
“아프다고 하면요?”
당신도 내 다리를 주물러 줄 건가요?
그가 어떻게 나올지 기대도 되었다.
“업어 줄까?”
소리 내어 웃을 수밖에 없었다. 즐거운 웃음소리가 그녀의 입술 사이로 경쾌하게 흘러나왔
다.
웃는 소리도 얼마나 청아한지. 그런 모습을 칼리크는 너무나 사랑스럽다는 듯 마냥 바라보
고만 있었다.
“드레스 입어서 안 돼요.”
안에 입은 페티코트 때문에라도 업히는 건 무리다.
“그럼 안아 줄까?”
그녀의 웃음소리가 더 커졌다. 정말 포기를 모른다니까.
팔짱을 끼고 있던 팔을 풀어 그의 손을 가만히 잡았다. 그러자 그가 다시 손에 깍지를 끼며
더 꼭 쥐었다. 그 힘이, 그 온기가 그녀를 더 행복하게 했다. 누가 보아도 그의 눈동자에서
꿀이 뚝뚝 떨어졌다. 황금빛 꿀이. 달달했다. 달콤했다. 가슴이 설렜다.
따사로운 햇살을 맞으며 황궁 안을 거니는 것이 이렇게 특별하게 와닿을 줄 몰랐다. 주변
이 더 선명하고 생기가 있어 보였다. 두 사람이 한마음이 되자 세상이 더 아름답게 보였다.
“이 호수가 이렇게 근사했었나?”
그러게요.
“날씨도 너무 좋은데? 이런 날씨 오래간만이네.”
지금까지 내내 이랬어요. 오히려 어제 날씨가 더 좋았고요. 오늘은 구름이 좀 있네요. 그래
도 그와 똑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당신과 함께하는 오늘이 더 좋아요.
“칼리크. 저길 봐요. 호수가 반짝이고 있어요.”
호수 위에 보석 가루를 뿌려 놓은 듯 수면이 반짝반짝 눈부시게 빛나고 있었다.
내 눈엔 당신이 더 눈부시게 빛나고 있소.
칼리크는 몸과 마음이 다 충족된 완벽한 남자가 된 느낌이었다. 그 충만함을 만끽하며 황
궁 정원을 느긋하게 거닐었다. 그녀의 손을 꼭 잡고, 그녀의 호흡을 느끼며 태어나서 처음
으로 가장 행복한 산책이 되었다.
“저녁에 다시 봐. 일찍 갈 테니까.”
그녀는 좋으면서도 수줍은지 얼굴을 붉히며 고개만 끄덕였다. 순간 그녀의 양 볼에 보조개
가 쏙 파였다. 참을 수 없었다. 칼리크는 고개를 숙여 그 신비로운 볼우물에 살며시 입을
맞추었다. 그녀에게 있는 모든 것이 다 사랑스러웠다.
“요즘 이것이 자주 보이는 것 같아.”
다른 쪽 볼우물에도 입을 맞추며 그가 속삭였다.
“그래서 싫어요?”
그가 좋아하는 걸 알면서도 그렇게 물었다. 그냥 어떤 대답을 하는지 궁금해서다.
“그럴 리가. 당신 머리부터 발끝까지 싫은 건 찾아볼 수가 없소.”
나도요.
두 사람은 콩깍지가 씌어도 단단히 씌었다. 한 폭의 그림처럼 서로 마주 보고 서 있는 두
사람은 떨어지기가 싫었다.
“더 일찍 갈게.”
그녀의 눈동자가 더 파랗게 반짝거렸다.
잠깐 쉬는 시간을 냈었는데 어느새 데인과 약속한 시간이 다 되었다. 뛰면 아슬아슬하게
맞을 것 같았다. 최대한 그녀와 같이 있으려고 했더니 바로 여기서 헤어져야 할 것 같았다.
“잘 들어가시오.”
그녀도 헤어지기가 여간 아쉬운 게 아니었다.
“칼리크… 오늘 약속 지킬게요.”
순간 칼리크는 무얼 말하는 건지 바로 알아듣질 못했다. 그러다가… 아!
하나만 입으라고 한 거. 그것도 얇은 거로.
그녀와 있으면 항상 미소 짓느라 바쁜 그의 입술이 지금은 한없이 벌어지고 있었다. 그렇
게 수줍어하고 뒤로 물러서기만 하던 그녀도 발전했다. 또 변하고 있다. 나아지고 있다.
칼리크는 너무나 기특한 그녀에게 다가가 저녁에 다시 만날 때까지 인내할 수 있을 만큼
진한 키스를 하기 시작했다. 데인과의 약속 시간이 지나고 있었다. 하지만 데인이 자신을
뭐 죽이겠는가. 황제인데. 처음 늦은 거니 그도 이해해 줄 것이다.
원 없이 키스를 하지는 못했다. 그래도 나중이 있으니까.
떨어지기 싫은 걸 억지로 떨어졌다. 하루 종일 그냥 같이 붙어 있어야 정상인 것 같고 이렇
게 잠시라도 떨어지는 것이 옳지 않은 일 같았다. 신혼들은 다 이런가.
칼리크가 머리를 몇 번 더 쓰다듬어 주더니 드디어 떨어졌다. 그가 나무들 사이로 빠져나
가는 걸 지켜보던 벨리타는 그제야 반대 방향으로 몸을 돌렸다.
저절로 흥얼흥얼 노랫소리가 흘러나왔다. 아. 오늘도 너무 완벽한 하루다. 게다가 아직 끝
나지 않았다. 계속 노래를 작게 부르며 나무 사이를 빠져나가고 있었다.
읍!
노래가 끝나기가 무섭게 누군가 뒤에서 그녀를 덮쳤다. 그녀의 입을 막고 뒤로 질질 끌고
가고 있었다. 그 공포에 그녀는 머리털이 다 곤두서고 온몸이 뻣뻣해졌다. 탁 트인 정원이
바로 코앞인데 나무들이 많은 곳으로 사납게 끌려가고 있었다.
그녀는 정신을 차리고 심하게 반항을 했다. 여긴 황궁이다. 소리만 지르면 기사들이 달려
온다. 그녀는 끌려가면서 자신의 입을 틀어막고 있는 사내의 시커먼 손을 있는 힘껏 물어
버렸다.
윽.
저를 끌고 가던 남자는 얼마나 아팠는지 비명을 지르더니 그녀를 땅바닥에 패대기쳤다.
“이 개같은 년이.”
손을 움켜쥐며 팔딱팔딱 뛰고 있는 남자를 얼른 뒤돌아본 벨리타는 공포감 대신 놀라움과
어이없음을 느꼈다.
“뭐 하는 짓이냐?”
쿠로 대공이 왜 이런 짓을. 감히 황후에게. 이런 자에게는 격식을 갖춰 말할 필요도 없다.
“닥쳐… 너야말로 뭐 하는 짓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