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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군에게 찍힌 민폐 황후 입니다-59화 (59/130)

59화 살아 있는 여신

눈을 떠 보니 여전히 자신은 뒤뜰 땅바닥에 널브러져 있었다. 지금 몇 시간이 지났을 텐데

주인이 사라진 줄도 모르고 이놈의 하인들은 어디 모여 시시덕거리고 있는 건지, 정말 가

만 안 둘 테다.

제 화에 못 이겨 몸을 일으켜 세우다 말고 다시 끙, 소리를 내며 바닥에 도로 누워 버렸다.

뼈는 부러진 것 같지 않은데 쉽게 일어날 수가 없었다.

이번엔 이를 악물고 겨우 상체를 일으켜 세우자 제 근처에 가만히 서 있는 말 신수가 눈에

들어왔다. 일어났네. 그래도 너밖에 없다. 주인이라고 내 옆을 지키고 있었던 거냐? 빌어먹

을 하인들보다 네가 백배 천배 낫다. 그런데.

“야!!”

좋았던 마음은 잠시, 그는 신수를 향해 버럭 소리를 지르며 일어섰다. 그 반동으로 오는 통

증에 절로 아야야, 소리를 내지르면서도 조금씩 신수에게 다가갔다. 이게 정말!

“너! 왜 도로 작아졌어? 더 커져도 시원치 않은데 작아져? 네가 그러고도 신수야?”

투명한 신수를 후려치는 쿠로의 손은 그냥 말 신수를 통과해 허공만 휘젓고 있을 뿐이었

다. 손에 잡히기라도 하면 목이라도 조르고 싶은 심정이었다.

오만 것이 다 가지가지로 속을 썩인다. 이젠 신수 너마저? 열불이 나고 원통함이 치솟아

쿠로의 얼굴이 한껏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보이는 대로 다 때려 부수고 싶은 심정이었다.

“어서 들어가!!!”

그의 사나운 목소리에 말 신수는 고개를 푹 숙인 채 그의 뒤로 쓸쓸히 사라졌다.

쿠로가 아무런 이의 도움 없이 절뚝거리며 저택 안으로 들어간 순간 폭풍우가 몰아쳤다.

하인들을 억, 소리 나게 짤짤 흔들어 대고 분풀이를 미친 듯이 퍼부어 댔다. 저택 안 여기

저기가 부서지고 깨지고 전쟁 통이 따로 없었다.

주인 잘못 만난 하인들은 그날 밤 내내 악마로 변한 쿠로에게 물 한 모금 먹지도 못하고

고문을 당해야만 했다.

***

데인과 안톤은 나란히 황제의 집무실로 들어갔다. 방금 폐하께서 같이 부르셨다. 무슨 중

대한 일이 있으시나 싶어 걱정부터 앞섰다. 이렇게 두 사람을 함께 부르신 적은 손에 꼽았

다. 혹 안 좋은 일이 생기셨나 싶어 안으로 들어가는 두 사람의 얼굴은 어둡고 무거울 수밖

에 없었다.

그들의 걱정과는 달리 폐하의 얼굴은 그리 나빠 보이지 않았다. 평상시와 다름없었다. 살

짝 안도감이 들었지만 긴장감은 늦추지 않고 폐하의 명을 기다렸다.

“이건 우리 셋만 알아야 하오.”

뭔가 터졌구나. 두 사람은 어깨를 단단히 펴고는 폐하를 향해 절도 있게 고개를 숙였다. 존

명.

“뒤를 돌아보시오.”

폐하의 탁자 앞에 서 있던 두 사람은 의아한 표정으로 서로의 얼굴을 쳐다보다 천천히 몸

을 돌렸다. 그런데.

아무것도 없었다. 넓은 집무실은 그대로였다. 뭣 때문에 뒤를 보라고 하신 건지 두 사람은

알 수가 없었다. 달라져 있는 것이 하나도 없었다. 그때였다.

“신수!”

화악.

폐하의 목소리와 함께 갑자기 빈 공간에 커다란 형체가 순식간에 나타났다. 그것도 어마어

마한 크기의 호랑이가! 두 사람의 두 눈이 튀어나올 듯이 커져 버렸다. 지금 눈앞에 있는

존재가 믿어지지 않았다. 이… 호랑이가 바로!

얼마나… 얼마나… 기다렸는지. 두 사람은 거대한 호랑이의 자태에서 눈을 떼질 못했다. 그

때보다 더 성장했다. 이렇게까진 크지 않았었다.

한동안 정적이 흘렀다. 그 누구도 목소리를 낼 수조차 없었다. 이 가슴 벅참을 어찌해야 하

는지….

먼저 안톤이 무너졌다. 바닥에 무릎을 꿇고는 고개를 숙였다. 그 단단하기로 소문난 안톤

의 어깨가 눈에 띌 정도로 떨리고 있었다.

안톤이 운다. 그 모습을 처음 본다. 칼리크도 눈가가 뜨거워졌다. 그래도 안톤 옆에 서 있

는 데인은 냉철하기로 소문났기에 눈물은 흘리지 않을…… 이런. 소리 없이 울고 있었다. 데

인의 두 눈에서 눈물이 줄줄 흘러내리고 있었다.

이윽고 데인 역시 안톤 옆으로 무릎을 꿇었다. 안톤의 입에서 끅끅대는 소리까지 흘러나왔

다. 두 사람은 그렇게 두 손을 모아 위대하게 앞에 서 있는 호랑이에게 예를 갖춰 절을 했

다. 바닥에 엎드린 두 사람은 좀처럼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않았다. 두 사람의 어깨가 똑같이

떨고 있었다.

칼리크는 안다. 이 두 사람이 얼마나 신수를 기다렸는지. 희망을 버리지 않고 자신을 보필

하며 어떻게 여기까지 왔는지. 이 두 사람이 없었으면 혼자서 여기까지 오는 게 불가능했

을지도 모른다.

[칼리크. 네 사람을 옆에 두거라.]

항상 돌아가신 아버지가 말씀하셨다. 그리고.

[신수는 너 스스로 깨닫게 될 것이다.]

신수에 대해 물을 때마다 말을 아끼셨던 아버지. 금욕적인 생활을 가르치시며 스스로 성장

하기를 바라신 아버지. 이제 그 말의 의미를 알 것 같았다. 진정한 황제가 될 사람의 신수

는 가르쳐 준다고 되는 것도 아니요, 무슨 비법이 있는 것도 아니라는 걸. 내 안이 성장해

야 했던 것이다.

“이러다 바닥이 다 젖겠네.”

그만 울라고 한 말이었다. 감격에 겨워 흘리는 눈물인 줄은 알지만 두 사람은 울어도 너무

울고 있었다. 이런 두 사람이 내 사람이다. 내 충신들이다.

칼리크는 몸을 굽혀 그들을 직접 일으켜 세웠다. 처음 몸에 와 닿는, 영광된 폐하의 손길에

안톤과 데인은 더한 감격으로 눈물이 그치질 않았다. 그저 떨리는 목소리로 ‘폐하….’라고

연거푸 부를 뿐이었다.

그렇게 세 사람은 아니, 호랑이까지 넷은 세상에 태어나 맛보는 가장 영광스러운 감격을

함께 나누었다.

***

벨리타는 초조했다. 문밖에서 칼리크의 목소리가 들리고 있는데 아직 들어오지 않고 있었

다. 방 안을 왔다 갔다 하며 뛰는 가슴을 주체할 수가 없었다.

저녁에 황제의 전령으로부터 황후궁으로 황제가 방문할 거라는 연락을 미리 받고 내내 기

다리고 있었다. 아직 잠자리에 들기에는 이른 시간이었지만 칼리크도 저와 같은 마음인지

생각보다 일찍 찾아왔다. 그래서 아직 저 옆방에는 시녀들이 대기하고 있었다. 제 방으로

돌아가기에는 이른 시간이었기 때문이다.

칼리크는 자신의 지시대로 유모가 시녀들을 다 방에서 내보내고 있는 걸 지켜보고 있었다.

모두 다 나가고 나자 이제 이 방에는 유모와 칼리크 두 사람만 남았다. 그래도 그는 유모를

계속 응시하고 있었다.

황제의 시선을 받으며 유모는 그냥 멀뚱히 서 있기만 했다. 어서 마마의 방으로 들어가지

않으시고 왜 저를 빤히 쳐다보고만 계시는지 알 수가 없었다.

“유모는 왜 안 나가지?”

순간, 유모의 두 볼이 확 달아올랐다. 민망하고 죄송스러워 얼른 머리를 조아리고는 종종

걸음으로 그 방을 빠져나왔다.

마마 곁에 늘 가까이 있어서 그런지 이런 중요한 순간에 실수를 하고 말았다. 이젠 자신이

없어도 마마님 혼자 잘 해내고 계시는데. 가슴 뿌듯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약간 서운함도 있

었다. 이것이 부모의 마음인가. 마마님을 낳지는 않았지만 그런 감정이 일었다.

그래도 폐하께서 저를 ‘유모’라 불러 주셨다. 그 호칭이 친근하게 들려 얼굴에 미소가 한껏

피어올랐다. 자신의 선견지명을 뿌듯해하며 계속 미소를 지었다.

혹시나 일찍 폐하가 오실지도 몰라 미리 준비해 놓은 것이 빛을 발할 것이다. 흡족한 마음

에 유모는 오래간만에 느긋한 발걸음으로 아래로 내려갔다.

***

이제 겨우 다 내보냈다. 이 방 안에서 들리는 소리를 누가 듣길 바라지 않았다. 벨리타의

은밀한 소리는 자신만의 것이다. 자신만이 들어야 한다.

그는 자신도 모르게 대단한 소유욕을 드러내고 있었다. 이렇게 다 내보내고 나니 은근 뿌

듯해졌다. 벨리타도 누가 바로 옆방에 있는 것보다 아무도 없는 것이 더 편안할 것이다. 마

음껏 소리를 낼 수 있을 것이다. 이런 것까지 일일이 신경 써 본 적이 없는데 이러는 제 모

습이 그리 나쁘지 않았다. 아니, 좋은 남편이 되도록 노력은 하고 있다는 생각에 기분이 괜

찮았다.

드디어 문을 열었다. 몸이 달아 죽을 뻔했는데 이제 만난다.

쿵.

굳게 닫힌 문을 등지고 서자 방 한가운데 서 있는 그녀가 보였다.

아… 여신이 따로 없다. 살아 있는 여신. 만지고 안을 수 있는 자신만의 여신. 이 얼마나 가

슴 벅찬 일인가.

오늘 내내 가슴 벅찬 일만 경험하고 있다. 벨리타 덕분에, 벨리타로 인하여 이 모든 행운이

제게 왔다고 여겨졌다. 그러니 더 사랑스러워 미칠 것 같았다.

그대로 양팔을 벌렸다. 어서 오지 않고 뭐 하고 있어.

다다다.

만족스러웠다. 대단히 만족스러웠다. 이내 달려와 제 품에 꼭 안기는 벨리타가 자신을 완

벽하게 채워 준다. 낮은 신음 소리를 흘리며 여신의 몸을 있는 힘껏 끌어안았다. 그녀를 안

기 위해 오늘 온종일 달려온 느낌이었다. 드디어 안았다. 이제야 제 가슴 안에 들어왔다.

그냥 이렇게 계속 안고 다니고만 싶어졌다.

아주 조금의 갈증을 채운 그는 다시 손을 바쁘게 움직였다.

끙.

또 이런 옷이다. 단추가 주렁주렁 달린 옷. 환장하겠다.

“벨리타… 나 미치게 하려고 이런 옷만 입는 거지?”

다른 걸로 미쳐 있는데 이런 단추로 더 미치게 만들면 어쩌라고.

“그냥 다 벗고 있어.”

칼리크….

점점 드러나는 어깨에 부서지는 그의 숨결이 너무나 뜨거웠다.

“안 되면… 하나만 입어. 바로 벗길 수 있는 걸로.”

바쁘게 손을 놀리면서도 저런 야한 말을 서슴없이 하고 있다. 숨 가쁜 목소리로 저런 말을

던지니 살이 떨리고 다리의 힘이 그냥 풀려 버렸다. 그의 가슴이 무섭도록 뛰고 있었다. 제

가슴도 만만치 않았다.

겨우 속옷 바람이 되자 그가 다시 힘주어 안아 들었다. 자신을 내려다보는 그의 눈동자에

거센 폭풍이 일렁거렸다.

“얼마나 보고 싶었는지 말해 봐.”

그가 상기된 목소리로 그렇게 물었다. 그의 입술을 맞이하려 입술이 살짝 벌어졌는데 사람

애타게 하려는지 다른 걸 요구한다. 이렇게 급하게 행동해 놓고는.

“당신이 먼저 해 봐요.”

던졌다. 당신 먼저 해 보라고. 당신도 내 말에 한번 따라 보라고.

그런 그녀가 의외였는지 표정이 묘하게 변한 칼리크는 이내 다시 눈빛이 심하게 짙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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