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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군에게 찍힌 민폐 황후 입니다-58화 (58/130)

58화 진정한 제왕의 신수

제 안에서 스스로 성체로 성장하며 무한한 인내로 참고 기다려 주었던 것이 감동 그 자체

였다.

그가 마음을 담아 여러 번 쓰다듬어 주자 호랑이의 화가 난 금빛 눈동자가 서서히 풀려 갔

다. 제 주인의 마음을 헤아린다.

그래야 내 신수지. 황제인 나의 호랑이지.

칼리크는 몸을 일으켜 제 신수의 목을 힘껏 끌어안았다.

하하….

끝까지 웃음소리를 내지 못하고 잠들어 있는 벨리타를 힐끗 보고는 다시 소리 죽여 웃음

을 터트렸다. 그녀가 깨지 않게.

가슴이 터질 것 같은 이 감동스러운 순간을 조금 더 만끽하련다.

내 신수.

내 호랑이.

이 호랑이는 최상의 능력을 갖춘 채 발현된 것이 분명했다. 그 최상의 능력 중 하나가 제

모습을, 제 존재를 숨기는 것이다. 그러니 그토록 예민한 자신이 등 뒤에 이렇게 거대한 호

랑이가 있는 것도 모르고 벨리타만 내려다보았지.

주인을 위해, 시간을 주기 위해 제 존재를 감추고 조용히 공중에 떠서 기다리고 있었던 것

이다.

호랑이도 주인과 같은 마음인지 목으로 낮게 그르렁거리는 소리를 냈다. 호랑이도 벨리타

가 깨지 않게 주인에게만 들리는 소리를 냈다. 그것도 기특했다.

기쁘구나. 너무 기쁘구나.

처음으로 만난 신수와 주인은 그렇게 서로에게 인사를 했다. 가슴이 터져 나가는 것만 같

았다. 이제 다 가졌다. 하나만 남았다. 유클로 왕국. 신수가 자신에게 힘을 보탤 것이다. 너

를 진정한 제왕의 신수로 만들어 주겠다.

감격스러운 첫 만남을 만끽한 뒤 칼리크는 비장한 표정으로 신수에게 눈으로 전했다.

가장 먼저 네가 할 일이 있다.

호랑이의 눈이 이미 주인의 뜻을 알아들었다는 듯 짙은 색으로 변하며 빛을 발했다. 말하

지 않아도 주인의 마음을 그냥 읽어 버린다. 그것이 신수다. 한마음 한뜻으로 움직이는 것

이 주인과 신수다.

그가 목을 놓아주자 호랑이가 뒤로 물러났다. 그러더니 공중에서 잠시 제 주인을 새기듯이

바라보며 점점 몸이 희미하게 변해 갔다. 그래그래. 잘 알아들었구나. 아직은 공표하지 않

을 생각이다. 극적인 순간에 보여 줄 것이다.

제 존재를 투명하게 지운 호랑이였지만 부리부리하게 번쩍이는 두 눈만은 허공에 선명하

게 떠 있었다. 그 눈이 무한한 신뢰를 담아 그를 한 번 더 바라보더니 이내 몸을 돌려 벽을

빠져나갔다. 그렇게 연기처럼 사라져 버렸다.

칼리크는 가슴 벅찬 마음으로 잠시 벨리타 옆에 다시 누웠다. 가장 큰 시름거리가 사라졌

다. 이제 황제 자리를 뺏길 염려는 없었다. 앞으로 돌진하기만 하면 된다.

음….

그녀가 옆으로 누우며 자신을 꼭 끌어안았다. 그 역시 기쁜 마음으로 그녀를 다시 안았다.

벨리타… 당신이 변하더니 나도 변하게 했소.

[남녀의 합이 중요할 수도 있습니다. 폐하께서는 너무 멀리하셨습니다. 안으십시오. 여인

을.]

그 언젠가 데인이 충언해 준 말이 떠올랐다. 그때는 가볍게 치부했는데 역시 데인은 현명

했다. 진작 말을 들을걸.

제 품에 꼭 맞게 파고드는 벨리타의 부드러운 몸을 음미하는 그의 얼굴에 미소가 떠나질

않았다.

신수 발현의 열쇠는 벨리타였던 건가? 그녀를 안고 호랑이를 만났으니 그럴 가능성이 가

장 크다. 신수 발현의 원동력이 되어 준 셈이다. 아… 벨리타.

그녀에 대한 애정이 그의 안에서 점점 더 커지고 있었다. 신수와 상관없이도 커지고 있었

는데 더 박차를 가하고 있는 느낌이었다. 그는 그녀의 이마에 살며시 입술을 갖다 대었다.

향기로운 꽃향기가 물씬 풍기는 그녀를 꼭 끌어안고는 그의 입술이 그녀의 이마에 오래오

래 머물렀다.

***

아니?

다시 조짐이 보였다. 몇 시간째 감감무소식이라 신수 발현을 포기하고 어둡게 침잠하고 있

던 쿠로는 얼굴에 다시 화색이 돌았다. 그럼 그렇지.

얼른 저택 밖 뒤뜰로 부리나케 뛰어나갔다. 오오… 속도가 빠르다. 에너지가 응축되는 속도

가 말할 수 없이 빨랐다. 성장한 거다. 전보다 더… 윽!

뒤뜰에 도달한 그는 땅바닥에 무릎을 꿇고 괴로워했다. 더 이상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었다.

손으로 배를 움켜쥐고는 식은땀까지 삐질삐질 흘렸다.

너무 빠르다. 마치 누군가 배 속을 휘저어 놓으며 그 에너지를 강제로 잡아 빼는 듯한 고통

이 밀려왔다. 으윽… 윽, 계속해서 앓는 소리를 내며 쿠로는 이를 악물었다.

이가 부서져라 악물고 버텼다. 이런 적이 없는데 너무 고통스러웠다. 제 몸이 반으로 쪼개

지는 듯 고통스러워 땅을 짚은 두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구역질하듯이 웩웩 소리까지 냈

다. 제 안의 모든 것이 뒤틀리고 끊어지는 것만 같았다.

으악.

가장 큰 고통은 등이었다. 날카로운 칼로 도려내듯 살이 찢어지고 불로 지지는 고통에 그

는 비명을 지르며 앞으로 고꾸라졌다. 헉헉대는 그의 입술에서 추하게 침이 질질 흘러나왔

다.

휴… 고통은 순식간에 사라졌다. 신수가 빠져나갔다는 소리다. 기진맥진 쓰러진 쿠로는 이

를 있는 대로 북북 갈았다.

이 미친 신수가! 누굴 죽일 일 있나.

아직 일어날 힘이 없어 누운 채 눈으로 빠르게 제 망할 신수를 찾았다.

뭐야? 저건 또 왜 저래?

더 크기는 개뿔. 지난번과 별 차이 없는 신수가 공중에서 위아래로 펄쩍펄쩍 뛰고 있었다.

미쳐 날뛰는 것 같았다. 주인 등에 칼을 꽂는 것처럼 튀어나오더니 저 말도 등에 칼이 꽂힌

것처럼 날뛰었다. 쿠로의 눈에는 지랄발광하는 것처럼 보였다. 저것이 미쳤나. 네가 그러

고도 신수냐? 보통 말보다도 못한…… 어?

침이 흐르던 입이 떡하니 벌어졌다.

뭐… 뭐야?

날뛰며 발광을 하던 자신의 신수가 땅으로 추락했다. 뭐에 걷어차이듯 힘없이 픽 쓰러지더

니 그대로 땅으로 떨어졌다. 날아다니는 놈이 떨어지다니! 이건 있을 수 없다. 그냥 말이

아니라 신수란 말이다.

쿠로는 땅에 쓰러진 말 신수가 다리를 위로 향한 채 바들바들 떠는 모습이 믿어지지 않았

다.

쿠로는 억지로 몸을 일으켰다. 아무리 망할 신수라도 저것이 없으면 저는 무용지물이다.

저 멀리 쓰러져 있는 말 신수가 누워서도 경기를 하며 보기에도 끔찍하게 괴로워하고 있

었다. 그는 오로지 자신의 미래가 염려스러워 기어서라도 다가가려고 했다. 그때.

윽!

쿠로 역시 뭐에 얻어맞은 듯 바로 뒤로 나가떨어지며 땅바닥에 대자로 뻗어 버리고 말았

다.

정신을 잃어 가는 쿠로는 보지 못했지만, 말 신수의 몸에서 뭔가가 쑤욱 빠져나오고 있었

다. 그것이 점점 커지더니 어떤 형태가 되어 갔다.

히이잉.

말이었다. 그것도 하얀색 말. 너무 갇혀 있어서 그런지 비틀거리는 백마였다. 그 백마가 하

늘로 둥둥 떠서 올라가기 시작했다.

시야가 점점 새하얘지고 있는 쿠로의 눈에 그 백마가 언뜻 들어왔지만 다행인지 불행인지

바로 기절하고 말았다.

드디어 백마가 멈추어 서자 그 근처에서 부리부리한 금빛 눈동자가 나타났다. 투명한 호랑

이 신수가 입에 백마를 물고 들어 올린 것이었다. 백마를 문 호랑이는 다른 사람들이 보지

못하게 높이 하늘을 날아 빠르게 이동하기 시작했다.

***

칼리크는 백마가 도착할 때쯤 이미 방을 나와 준비를 하고 있었다. 제 신수가 제 안으로 사

라지면서 마구간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내려 줬다 알려 주었다. 그래서 기다리고 있었다.

드디어 저쪽 나무 뒤에서 자신의 백마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러자 황궁 마구간 시종들은

난리가 났다.

감쪽같이 사라진 황제 폐하의 백마가 살아 돌아왔다고.

제 발로 걸어서 찾아왔다고.

이건 기적이라고.

정말로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처럼 마구간으로 걸어온 백마에 대해 사람들은 신기해하면

서도 한없이 기뻐했다. 그들은 몰랐지만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이 맞았다.

고생했다.

애썼다.

기력을 다 쇠진한 백마가 그래도 제 주인에게 먼저 다가와 머리를 그의 어깨에 비벼 댔다.

얼마나 그 안에서 나오려 했는지 다 안다. 이제야 꺼내 줘서 미안하구나. 잘 견뎌 주었다.

칼리크는 두 손으로 백마의 갈기를 끊임없이 어루만져 주었다.

오늘은 특별히 하늘의 은총을 받은 날이다.

벨리타. 신수. 거기에 빼앗긴 백마까지.

남은 건 유클로, 하나! 전략을 잘 짜기만 하면 된다. 이 기세를 몰아 반드시 정복하고 말 것

이다. 모든 기운이 자신에게 모이는 느낌이었다. 간다. 꼭 해내고 말 테다.

굳은 맹세를 하던 칼리크는 백마를 돌보러 모여드는 시종들에게 신신당부를 하고는 몸을

돌렸다.

***

뭐든 한 번이 어렵지, 벨리타는 잠에서 깨어나 또 밖에서 기다리고 있는 유모를 안으로 들

였다. 그래도 드레스를 다시 입혀 주며 등 뒤에 달린 단추를 채우는 유모의 얼굴을 아직은

똑바로 보지 못하겠다.

“마마. 제가 오늘 아주 바빴답니다.”

갑자기 말을 걸어오는 유모에게 쑥스러웠지만 궁금하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언제나 바

쁜 유모이기에 또 뭘 했나 싶었다.

“황실 온천탕에 갔다 왔지요.”

아. 그… 온천탕.

거길 유모가 왜 갔을까, 궁금했다.

“뜨거운 탕 속에 떨어진 보석 단추들을 하나하나 줍느라… 어휴… 땀은 비 오듯 쏟아지고

난리도 아니었어요.”

유모!

요즘 유모가 종종 이런다. 짓궂은 말을 서슴없이 하며 자꾸 자신을 놀린다. 그 안에 애정이

듬뿍 담겼다는 것도 안다. 하지만 얼굴이 화끈거리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글쎄 단추 하나가 죽어도 안 보이는 거예요. 얼마나 찾아 헤맸는지.”

그냥 몸이 배배 꼬였다. 그 일이 떠올라서, 그가 단추를 풀다 지쳐 북 뜯은 일이 떠올라서

어쩔 줄 몰라 했다.

“그게 아무리 찾아도 없더니 기둥 중간에 파인 홈에 떡하니 숨어 있는 거 있죠? 왜 단추가

그 위까지 날아갔을까요?”

어휴. 유모도 참.

단추를 다 여민 듯해 벨리타는 그대로 앞서 걸어가기 시작했다. 호호호. 그녀 뒤에서 유모

의 경쾌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못 들은 척 얼굴이 벌게진 채 그대로 직접 칼리크의 침실

문을 열어젖혔다.

***

음….

쿠로는 신음 소리를 내며 서서히 정신이 돌아오고 있었다. 눈을 뜨기도 전에 온몸이 몰매

를 맞은 듯 온통 쑤시는 고통이 먼저 느껴졌다. 이런 젠장.

이것들을 다 갈아 치우든가 해야지. 항상 이 개같은 하인들이 문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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