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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군에게 찍힌 민폐 황후 입니다-57화 (57/130)

57화 다른 게 먹고 싶다는 소리

그녀가 겨우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는 이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하아….

그녀의 눈빛과 존재 외에는 아무것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너무 떨어져 앉아 있는 것이

한이 될 정도였다. 왜 이렇게 멀리 떨어져 앉아야만 하는지도 모르겠다. 마음은 벌써 그녀

를 안고 있는데 몸은 이리도 멀리 있다. 속이 터진다.

서로에게서 떨어지지 않는 강력한 시선을 차단한 건 다름 아닌 시종장이었다. 뭔가 맛있는

걸 들고 오면서 즐겁게 미소를 짓는데 별로 반갑지 않았다. 억지로 시선을 떼고는 각자 앞

에 놓인 음식을 먹어야 하는데 식욕이 돋지 않았다. 다른 게 고팠다. 왜 지금 이걸 먹고 있

어야 하나.

자연 두 사람은 그저 먹는 시늉만 할 뿐 깨작거리기만 했다.

물러가는 시종장은 바로 얼굴이 굳어졌다. 오늘 심혈을 기울여 뜻깊은 날을 축하하는 의미

로 마음을 담아 특별식을 준비했는데 두 분 모두 잘 드시질 않으신다. 잘못 준비했나, 입에

안 맞으시나, 메뉴를 잘못 선택했나, 온갖 걱정이 일기 시작했다.

칼리크는 점점 불만이 쌓여만 갔다. 마주 보고 있는 것이 왜 음식이어야 하는지, 입에 넣는

것이 왜 이 고기여야 하는지, 손에 잡고 있는 것이 왜 이 딱딱한 포크여야 하는지, 왜 홀로

떨어져서 속만 타야 하는지.

“벨리타.”

“네?”

공기가 긴장감으로 팽팽한 탓인지 갑자기 제 이름을 부르는 칼리크의 목소리에 생각보다

더 크게 대답을 하고 말았다. 부끄럽고 민망해 얼굴이 달아오른 벨리타는 시선을 그릇에

떨어뜨렸다.

후… 배는 고픈데 음식이 넘어가질 않았다. 뭘 먹고 있는지 맛도 전혀 모르겠다. 나만 그런

가…. 떨려서 아무것도 먹질 못하겠다.

“음식이 들어가오?”

그 말에 벨리타는 그의 접시를 건너다보았다. 자신과 같았다. 다소 위축되었는데 다시 힘

을 얻고 자신감을 되찾은 그녀는 솔직하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럼 왜 이걸 먹고 있어야 하지?”

그러게요.

“그냥… 말 연습이나 하러 갈까요?”

꼭 그게 하고 싶은 건 아니었다. 그냥 그와 함께 여기서 나가고 싶었다. 그러면 좀 더 가까

이 있을 수 있을 테니까.

“여기서 말 연습이 왜 나와?”

그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화를 내는 것 같은데 저 정도로 화가 나는 일인가도 싶었다. 그녀

는 남자의 본능을 아직 몰라도 너무 몰랐다.

“난 다른 게 먹고 싶다는 소리였소.”

그 말에 뒤늦게나마 그의 뜻을 알아들었다. 달아오르던 그녀의 얼굴이 누가 봐도 터질 듯

이 시뻘게졌다. 숨도 가빠져 왔다. 그때의 그 느낌과 황홀함이 그녀를 순식간에 덮쳐 버렸

다.

벌떡.

또 그가 일어섰다. 다만 어제와 다른 건 그가 옷을 제대로 입고 있다는 것뿐. 온천탕에서의

일이 생각나 그녀의 가슴은 튀어나올 듯이 더 거세게 뛰기만 했다.

칼리크는 모든 게 답답해서 그냥 벌떡 일어났다. 그녀에게 빠르게 다가가 앉아 있는 그녀

의 손을 낚아채 강하게 일으켜 세웠다.

그리고는 뛰었다.

밥이고 뭐고 안중에 없다. 왜 하고 싶은 걸 놔두고 지금 이러고 있어야 해! 황제의 체통이

고 뭐고 이젠 모른다. 내가 하고 싶다는데!

서둘러 뛰어가고 있는 두 사람을 스치는 시종들과 기사들의 두 눈이 크게 떠지고 입은 떡

벌어졌다. 알게 뭐냐. 모두 눈 감고 귀를 닫아야 할 것이다. 입조심은 물론이고. 난 황제다!

다시 3층으로 올라갔다. 진작에 이렇게 했어야 옳았다. 급하다. 미치도록 급하다.

벨리타는 거의 끌려가다시피 계단을 올랐다. 숨이 차고 머릿속이 새하얘졌다. 밥 먹다 말

고 밀어 버리고 처음 사랑을 하는 사람처럼, 처음 사랑을 안 사람처럼 군다.

내가 이러다니. 우리가 이러다니. 믿어지지 않는 상황이었지만 가슴 부풀게 들뜨는 것만은

사실이었다. 자신도 원하고 있다는 걸 인정하며 그를 따라가기 위해 분주하게 발을 움직였

다.

그는 자꾸만 더디게 끌려오는 벨리타 때문에 더 애가 타서 그냥 다시 달랑 안아 들었다. 그

리고는 계단을 두 개씩 마구마구 올라가기 시작했다. 그녀를 눕혀야 한숨 돌릴 것 같다. 내

침대에. 내 아래에.

소리도 못 내고 그대로 그에게 안겨 더 빠르게 이동하면서 화끈거리는 얼굴을 어찌할 수

가 없었다. 이 모든 걸 지나친 사람들이 다 봤을 텐데….

둘이 미친 거 같았다. 이런 대낮에. 그래도 할 수 없다. 하고 싶은걸. 서로를 갖고 싶은걸.

이걸 누가 말릴 수 있을까.

쿵.

문이 거칠게 닫히는 소리가 들릴 때 그녀는 이미 그의 침대에 누워 있었다. 그리고는 서로

의 얼굴을 마주 보며 가쁜 숨을 온통 흩뿌리기만 했다. 조금 숨을 돌리고… 아니었다. 바로

그의 입술이 돌진했다. 무서운 속도로 다급하게 맛보기 시작했다.

숨을 돌릴 여유 같은 건 없었다. 이젠 아무것도 우릴 막을 것이 없다. 거침없이 파고드는

그를 그녀는 꼭 끌어안으며 열렬히 환영했다.

어젯밤도 그는 자신을 재우지 않았다. 밖이 훤해질 때까지, 지쳐 나가떨어질 때까지 놔주

질 않았다. 몇 번이고 그녀를 가졌다. 그녀 또한 그를 품었다.

그런데 또.

불과 몇 시간 떨어져 있었던 것뿐인데 또.

대단하다. 그의 체력을 따라갈 수가 없다. 그는 아예 못 잤는데. 더 많이 움직였는데. 피곤

하지도 않아 한다. 그리고 또 이렇게 이끈다.

둘이서 올라갔던 그 길을 다시 빠르게 달리기 시작했다. 처음도 아니건만 다급함은 여전했

다. 아니 더했다.

칼리크의 온몸이 미칠 듯이 용솟음치고 끓어올랐다. 마치 제 안에 시뻘건 용암이 치솟아

올라오는 것 같았다. 제 아래에서 온전히 다 받아 내고 있는 벨리타의 모습이 너무 사랑스

러워 몸이 터져 나갈 것 같았다.

아….

그 세상에 올랐다. 같이 올랐다.

황홀함 속에 몸을 맡기며 잠시 숨을 골랐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제 안에서 치솟았던 용암이 남아 있는 듯 또다시 분출하려고 했다. 갑자기 등

이 뜨거워졌다. 그곳을 잡아당기듯 팽팽해지는 느낌이 점점 강해졌다.

윽!

***

쿠로는 얼굴이 어두워졌다. 에무르와 잘 협상이 되어 배를 태워 보낸 일은 만족스러운데

신수가 문제였다. 살짝 신수가 나오려는 조짐이 보여 지금 여자 한 명과 회포를 풀고 오는

길인데 소식이 없다. 신수가 나올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어떻게 된 일이지?

요즘 뜸하다. 발현되는 것도 뜸해졌지만 그 에너지를 감지하는 것마저도 뜸해졌다. 왜 이

러는 거지? 허탈한 표정으로 제 저택으로 돌아가는 쿠로는 열이 받는 것과 동시에 크나큰

시름에 잠겼다.

뭐 잘못되는 거 아니겠지? 그럴 리가 없다. 요즘 정신적으로 피곤했는데 그것에 영향을 받

은 거다. 아니다… 아니야.

쿠로의 눈동자가 떨리면서 더 칙칙한 회색으로 변해 갔다. 그동안 약간의 조짐만이라도 감

지가 되면 그대로 달려가 여자를 안았다. 그러면 항상 신수가 발현되었다. 한 번도 이런 적

은 없었다. 에너지가 배 속에 모이기 시작한 것까지는 좋았는데 그러다 스르르 흩어져 버

렸다. 되다 말았다. 그러니 미치고 환장할 노릇이었다.

여자를 잘못 선택했나? 지난번 여자와 잤어야 했나? 그때는 발현이라도 됐었는데.

이 빌어먹을 신수 같으니라고.

이왕 발현되려면 좀 사납고 큰 동물로 해 주지 호랑이한테 날름 잡아먹힐 약하디약한 말

이 뭐냔 말이다. 그것도 제대로 나오지도 않고 이렇게 속을 썩이니 확 다른 거로 갈아 치웠

으면 원이 없겠다.

쿠로는 자신의 말 신수처럼 사나운 콧김을 마구 뿜어내며 씩씩거리기만 할 뿐이었다.

***

등 쪽이 갑자기 뻣뻣했었는데 이내 풀렸다. 지금은 시원한 청량감마저 느껴졌다. 칼리크는

다시 편안해진 얼굴로 스르륵 잠이 들고 있는 벨리타를 내려다보았다. 지칠 만도 하다. 좀

더 재워야겠다. 자신의 품 안에서 잠드는 벨리타는 언제든 환영이다. 내 품에서만 잠들어

야 한다. 이젠 그 누구도 안 된다. 나 하나여야 한다. 누구하고도 공유하지 않는다.

칼리크는 대단한 소유욕을 드러내며 제 아래 누워 있는 벨리타를 집요하게 바라보았다. 자

는 모습이 이렇게 예뻐도 되나? 자신과 사랑을 나누고 지쳐 잠에 빠진 벨리타가 예뻐도 너

무 예뻤다. 그는 벨리타의 발그레한 볼을 손등으로 살며시 쓰다듬었다. 부드러웠다.

이 모든 것이 꿈은 아니겠지. 벨리타와 여기까지 오다니.

불가능한 일이었다. 하지만 지금 이것이 현실이다. 과거야 어쨌건 지금, 이 순간이 중요하

다.

입술을 아기처럼 꼬물꼬물 움직이는 벨리타를 보며 미소를 짓던 칼리크는 그녀를 편히 자

게 하려고 그녀의 몸에서 내려왔다. 이불을 잘 덮어 주고 잠시 옆에 누웠다가 내려가려고

자신의 베개에 똑바로 누웠다. 그때였다.

헉!

지금…… 눈앞에 보이는 광경을 믿을 수가 없었다.

너… 너는!

그의 온몸이 떨렸다. 입술은 벌어지고 콧잔등마저 시큰해졌다.

너였구나.

내 신수가!!!

칼리크는 지금 눈앞 가득 보이고 있는 거대한 호랑이와 눈을 마주치고 있었다. 사납고 위

협적으로 보이는 호랑이의 눈동자가 자신의 것과 똑 닮았다.

그 안에 있느라 많이 지쳤구나. 미안하다.

자신의 호랑이 신수가 자신을 노려보는 것이 주인을 못마땅해하는 것처럼 느껴졌지만 여

전히 감격스러웠다.

주인이 못나 이제야 만났구나.

얼마나 이렇게 보고 싶었는지 넌 알 거다.

그는 한 손을 앞으로 뻗어 호랑이의 얼굴로 향했다. 내민 손이 희미하게 떠는 건 당연한 일

이었다.

그런데 만져졌다. 크기도 어마어마할뿐더러 만질 수도, 등 위에 탈 수도 있다는 말이다. 신

수가 처음에는 투명하고 만질 수도 없는 상태였다가 점점 성장해서 성체가 되면 이렇게

만질 수 있게 된다.

그런데 자신의 신수는 이미 다 완성되었다. 벨리타의 말이 사실이었다. 그녀가 묘사한 것

이 정확했다. 조금의 거짓도 없이 진실만을 말했다. 그녀가 말한 대로 그 호랑이가 지금 그

의 바로 눈앞에 존재했다.

벨리타가 자신에게 다가오는 것이 너무 느려 답답해했는데 그녀보다 더 답답하게 군 사람

은 자신이었다. 이렇게 제 신수를 만나기까지 너무 오래 걸렸다. 그것이 미안하고 그만큼

너무나 고마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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