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6화 그런 황홀한 세상이 있었다니
다행히 문소리가 났다. 유모는 얼른 달려가 그 앞에 섰다. 하지만 문이 아주 조금 삐죽 열
리기만 할 뿐 더는 열리지 않았다. 이미 예상한 일이었다.
“유…모?”
당황한 듯한 마마의 목소리는 그래도 생기 있게 들렸다.
“저 여기 있습니다. 마마. 들어가겠습니다.”
유모는 다 알고 있는 일이기에 바닥에 놓인 바구니 손잡이를 들고는 방문을 조심스럽게
열었다. 양옆으로 지키고 있는 기사단들이 시선도 돌리지 않고 돌처럼 서 있는 것이 지금
같은 상황에서는 더 다행스러웠다.
***
벨리타는 너무나 무거운 눈꺼풀을 억지로 들어 올렸다. 밤새 칼리크가 안아 줘서 그런지
혼자 덩그러니 누워 있다는 걸 알아채고는 갑자기 어색해졌다. 밤이고 어두워서 자세히 보
지 못한 그의 넓디넓은 침실에 저 혼자 있다는 것이 낯설게 와닿았다. 겨우 정신을 차린 그
녀는 몸을 일으켜 침대에 기대앉았다.
세상에.
이렇게 넓은 침대가 다 있다니. 이 위에서 데굴데굴 굴러도 한참을 굴러야 할 정도로 대단
한 사이즈였다.
[내 침대는 너무 넓어. 당신 찾아서 헤매야 할 거야.]
그가 왜 이렇게 말했는지 이제야 제대로 알 것 같았다. 사실대로 말한 거였다. 과장한다 생
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다. 눈으로 보고 있으면서도 믿어지지 않는 사이즈였다. 뭐 하러 이
리 크게 만든 건가?
그런데 참으로 단출했다. 정말로 제국 통일 외에는 다른 것에 관심이 도통 없는 그였다. 이
넓은 방을 운동장으로 쓸려는 모양인지 거의 텅 비어 있었다. 누가 있어도 숨을 곳 하나 없
이…. 아! 그래서 이렇게 깔끔하게 비워 놓은 건가? 그의 안전을 위해서? 그건 아주 바람직
하다. 안전이 무엇보다 중요하니까. 앞으로는 더더욱.
칼리크의 배려인지 커튼이 쳐져 있었다. 벌써 대낮인 것 같은데 그리 강하게 햇살이 들어
오지 않고 있었다. 그래서 지금까지 잘 수 있었는지도. 그가 손수 커튼을 움직이는 모습을
상상하자 가슴이 몽글몽글해지며 입가에 미소가 자리 잡았다.
창밖이 훤해지도록 그가 놔주질 않았는데 벌써 나간 건가. 대단하다. 이래서 역시 황제인
가. 혹시 뭔가 특별한 걸 먹나? 산삼 같은 거. 힘이 어마어마했다. 이런 생각만으로도 부끄
러워 혼자 있는데도 얼굴이 화끈거렸다. 이제 보니 강하고 능력 있는 황제였다.
어제, 그리고 오늘 확실히 경험했다. 빙의한 순간부터 이미 부부였지만, 그래서 칼리크는
이 모든 걸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수 있는지 모르겠지만 모든 게 처음인 그녀로서는 이제
야 마음을 연 것이었다.
대단한 밤이었다.
그녀에겐 첫 경험이라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쑥스러워 이불로 얼굴을 가렸다. 아직도 가슴
이 두근거린다. 그가 얼마나 강하게….
그래서인지 몸이 피곤하고 여기저기 결리는 게 제 몸이 제 것이 아닌 것 같았다. 원래 이
몸이 자신의 것은 아니었지만 이젠 받아들여야 한다. 이 몸이 이젠 제 것이라는 걸. 그리고
하나 더 인정했다.
그에게 이젠 마음을 열었다는 것. 그에 대한 마음이 점점 커지고 있다는 것. 그러니 그가
꼭 살았으면 좋겠다. 그 염원이 가장 크게 자리 잡았다.
칼리크는 지금 뭐 하나…. 내가 이렇게 생각하듯이 날 생각하고 있을까?
눈을 뜨자마자 칼리크를 생각하는 자신의 모습이 이젠 이상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너무 생각을 많이 했나, 오래 누워 있었다. 이젠 돌아가자.
그런데 자리에서 일어나 보니… 알몸이었다. 당연한 거였지만 화들짝 놀랐다. 아무도 없으
니 망정이지 제 몸에 붉은빛이 여기저기 도는 것을 발견하고는 얼굴이 터질 듯 달아올랐
다. 지난밤이 떠올라 다리에 힘이 다 빠져 버렸다. 잠시 침대 끝에 걸터앉아 심호흡을 해야
할 정도로 황홀한 밤이었다.
아. 내 옷!
야릇한 생각으로 빠지려고 하는 자신을 제어했다. 지금 중요한 건 입고 나갈 옷이었다. 그
러나 아무리 사방팔방 둘러보아도 자신이 입을 옷은 눈 씻고 찾아봐도 없었다.
바구니가…… 이런. 온천탕에 있다. 이걸 어쩌나. 칼리크가 마음대로 이동하는 바람에 지금
알몸인 상태로 오도 가도 못하게 생겼다.
아니다. 나한텐 유모가 있다. 유모가 틀림없이 저 밖에서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왠지 그런
믿음이 들었다. 홑이불을 대충 몸에 두른 그녀는 한참을 걸어서 커다란 문에 당도했다. 그
리고는 조심스럽게 삐죽 열었다.
***
유모가 황제의 침실로 들어와서는 바구니에 넣어져 있던 예비 옷을 입혀 주었다. 이곳에서
유모를 이런 모습으로 보게 되니 많이 부끄러웠다. 마치 딸이 첫날밤을 치르고 엄마를 마
주한 느낌이었다. 그리고는 유모와 함께 서둘러 황후궁으로 돌아왔다. 걷는 것이 좀 힘이
들었지만 누가 알아볼까 봐 표 내지 않으려 애를 썼다.
서둘러 다시 목욕하고 새 단장을 받으면서도 벨리타는 연신 하품을 했다. 다시 누워 쉬고
싶을 정도로 몸이 노곤했다. 대운동회를 한 것처럼 온몸이 찌뿌둥하고 축축 늘어졌다. 여
기저기가 결리고 쑤셨다. 하지만 보고 싶은 임을 위해 정신을 차리려고 고개를 계속 흔들
어 댔다.
아슬아슬하게 그와의 점심 만찬 시간에 맞추어 도착할 수 있었다. 대신 입구에서 잠시 심
호흡을 하며 마음을 진정시켜야 했다. 떨렸다. 많이 떨렸다. 지금까지와는 다른 느낌으로
그와 만나는 것이다. 그도 자신과 같은 마음일까? 그것이 가장 궁금해 초조해지기까지 했
다.
“이러다 버릇되겠어.”
떨리는 가슴을 부여잡고 발을 움직여 겨우 자리에 앉았는데 느닷없이 처음 그에게서 날아
온 말에 실망하는 표정이 되었다. 뭔가 살갑고 다정한 말을 기대한 건 아니지만 그래도 이
런 말도 아니었다. 무슨 버릇을 말하는 건지도 모르겠고. 다소 시무룩해진 벨리타는 그를
쳐다보지도 못하고 말았다.
“이젠 날 보지도 않을 거요?”
이 말은 좋았다. 처음보다. 또다시 큰 용기를 내야 했다. 아무리 첫날밤을 치렀다지만, 그래
서 더더욱 어색하고 부끄럽기만 했다. 그래도 보고 싶은 얼굴을 향해 고개를 들었다.
아…….
불타는 사랑을 나눈 후, 처음으로 두 사람의 시선이 마주쳤다.
***
이른 아침부터 힘이 절로 났다. 칼리크는 잠을 전혀 자지 않고 업무를 보고 있는데도 피곤
하지 않았다. 오히려 원기 충전을 한 듯 힘이 계속 솟아올랐다. 칼리크는 다른 때보다 더
생생한 얼굴과 맑은 정신으로 서류에 사인을 해 나가기 시작했다. 그래서인지 오전 일을
절반 이상 빠르게 끝낸 뒤 잠시 휴식을 취했다.
벨리타는 아직 자고 있으려나.
그래도 점심 식사 때는 얼굴을 볼 수 있겠지.
보고 싶어졌다. 자신의 침실로 달려가고 싶어졌다. 잠깐 갔다 오면 안 될까? 이런 생각도
잠시 했다. 그러나 이내 픽, 웃으며 황제의 체통을 지켰다.
아….
그런 황홀한 세상이 있었다니. 영혼이 빠져나가는 듯한 그 몽롱함과 걷잡을 수 없이 휘몰
아치는 소유욕, 열망이 어마어마한 희열로 이어졌다. 그때의 느낌이 아직도 영향을 미친
다. 몸이 뻐근해지며 안으로 응축된 에너지가 자꾸 요동치려 한다.
흠흠.
일을 하면서 이런 야릇한 생각을 하는 자신이 멋쩍었다. 낯설었다. 신기했다. 그런 희열을
자신이 직접 경험했다는 것이 더 신기하고 경이로웠다.
제국 통일 외에 관심과 흥미를 쏟을 일은 없었는데 다른 한 가지가 생긴 것 같다. 늘 느끼
는 거지만 벨리타는 정말 대단하다.
자신을 어디까지 끌고 갈 건지 알 수 없다. 잠깐의 흥밋거리로 삼는다 여겼는데 그게 아닌
것이 다행이었다. 아니면 이런 희열과 황홀한 세상을 선물받을 수 없었을 것이다. 여기까
지 벨리타가 허용할 거라고는 장담하지 못했다.
진정한 부부가 되는 일이다. 장난삼아, 술수를 부리려고 거기까지 가지는 않는다. 그리고
모든 걸 다 내주던 그녀의 몸짓, 자신과 같이 황홀해하던 표정, 무한한 신뢰와 온기를 가득
담은 눈빛은 제아무리 악명 높은 불륜 황후라 해도 흉내 내거나 연기할 수 있는 것이 아니
었다. 그녀의 진심이었다. 마음이 통하고 몸이 연결되었을 때만 느낄 수 있는 찬란한 세상
을 그녀도 느꼈을 거라 확신한다.
좋았다. 좋아도 너무 좋았다. 그녀에게 크나큰 선물을 받았다. 내 아내….
자신을 좋은 남편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하지만 좋은 남편이 되기 위해 노력은 할 것이다.
받은 건 돌려줘야 하는 법.
언제 또 노력할 수 있나, 그녀가 누워 있는 침대를 생각하며 혼자 씨익 웃던 칼리크는 이래
서 신혼 때는 일하는 데 지장을 받는다고 하는 건가 체감하고 있었다.
신혼.
맞다. 신혼. 우린 4년 만에 신혼 생활을 시작했다. 그것도 이틀째이니 이렇게 일에 집중하
지 못하고 아내 생각만 하고 있다. 또 새로운 경험이다. 즐거운 경험이다. 흥분되는 경험이
다.
칼리크는 머리를 흔들며 다시 황제로 돌아왔다. 일은 일. 얼른 끝내야 벨리타를 만나지. 그
는 다시 일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
점심을 먹기 위해, 아니 벨리타를 만나기 위해 부리나케 먼저 와 앉아 있는데 안 온다. 아
니, 자신이 너무 빨리 왔다. 배는 고프지 않았다. 정신 또한 맑고 말짱했다. 언제 오려나.
저 멀리 발소리가 들리자 자동으로 그의 몸이 반응했다. 긴장을 하는 건지 가슴이 절로 펴
지고 목에 힘이 주어졌다. 오늘은 얼마나 더 사랑스러울까.
그런데 또 환장하겠다. 얼른 들어오지 않고 왜 입구에서 머뭇거리는지. 어제도 그러더니
사람 애타게 하는 덴 벨리타가 으뜸이다.
가서 끌고 올까 여러 번 생각하고 있을 때 드디어 그녀가 눈에 들어왔다. 그냥 쏙 들어왔
다. 어깨에 힘이 들어갔던 것이 풀리며 의자에 몸을 편하게 기대었다.
벨리타는 존재 자체로 그냥 용서가 된다. 자리에 앉아 새초롬히 시선을 떨구고 있는 벨리
타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탐스럽게 잘 익은 복숭아가 연상되는 건 왜일까? 한참을 감상
하다 그래도 한마디는 했다. 자신을 이토록 애끓게 만든 건 고쳐야 한다.
“이러다 버릇되겠어.”
여전히 고개를 들지도 자신을 보지도 않는다. 그녀의 얼굴이, 그때 그 눈빛이 보고 싶은데
말이다.
“이젠 날 보지도 않을 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