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4화 첫 경험
“황후마마 드십니다.”
시종장의 목소리가 크게 지하에 울려 퍼졌다.
망설임을 이런 식으로 종식시켜 주다니, 황제의 충신인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커다란 문이 삐걱거리는 소리도 없이 열리기 시작했다. 그 사이로 수증기가 모락모락 새어
나오자 벨리타의 몸이 더한 긴장감으로 뻣뻣하게 굳어져 버렸다.
“어서 드시지요.”
너무 오래 서 있었나 보다. 시종장의 권하는 목소리에 그녀는 할 수 없이 걸음을 떼었다.
한 발… 두 발….
쿵.
문이 등 뒤에서 닫히는 소리에 펄쩍 뛰게 놀란 벨리타는 또다시 그 자리에 멈추고 말았다.
후우….
일단 안으로 들어왔으니 심호흡부터 했다. 여기서 더 나아가기에는 큰 용기가 필요했다.
생각보다 이 안의 공기는 서늘해 다행이었다. 그러나 겁나는 시선을 들어 칼리크가 어디쯤
있나 조심스럽게 살피다 덜컥, 더 겁이 나 버렸다.
벗었다.
다 벗었다.
그는 상체를 다 드러낸 채, 유유히 온천탕 안에 들어가 앉아 여유 있는 표정으로 자신을 바
라보고 있었다. 여기 서서 버벅거리고 있는 모습까지 다 보았다. 어휴…. 왜 이렇게 민망한
지 모르겠다. 옷을 다 벗고 있는 사람은 칼리크인데 아직 드레스 단추도 풀지 않은 자신이
더 민망했다. 아니, 부끄러워 미칠 것 같았다.
희뿌연 연기가 안개처럼 간간이 퍼져 있었고 벽이 커다란 바위로 이루어져 있어 마치 동
굴처럼 보였다. 저 멀리 그의 모습이 어릿어릿 안개 속에 잠긴 채 몽환적으로 보여 더 가슴
이 떨렸다. 그런데 그의 눈빛만은 또렷이 보였다. 번쩍이는 야수의 눈빛, 한입에 잡아먹을
것만 같은 눈빛. 두려워졌다. 온몸이 저릿해지며 그녀는 가늘게 떨기만 했다.
아무 말도 하지 마요. 어서 들어오라고 하지도 마요.
성질 급한 그가 뭐라 한마디 던질 것 같았다. 그만큼 자신이 지체하고 있다는 것도 알지만
그가 이번에는 아무 말도 하지 말았으면 싶었다. 제발….
벌떡.
악.
낮은 비명을 지르며 얼른 두 눈을 감아 버렸다. 그가 제 소원대로 아무 말도 안 하는 대신
그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이제는 두 손을 꼭 쥐고 벌벌 떨었다. 두 눈을 꼭 감기 전, 보
았다. 분명 보았다.
그의… 그의 다리… 음영이 져 있던 그 사이……. 나 어떡해.
벨리타는 떨리는 손을 올려 얼굴을 가려 버렸다. 큰일 났다. 지금까지 몇 명의 것을 보았지
만, 그 덜렁이들과는 달라도 너무 달랐다. 그냥… 그러니까…… 크기가… 어휴. 더 이상 표현
할 길이 없었다.
저벅저벅.
물기를 머금은 발걸음 소리에 저절로 그녀의 발이 뒤로 자꾸 물러났다. 시간을 좀 주고 다
가와야….
어머나.
그가 다가오는가 싶더니 바로 그녀의 몸이 공중에 붕 떠 버렸다. 아니, 그에게 번쩍 안겨
옮겨지고 있었다. 얼른 두 손을 내리고 눈을 떠서 그를 올려다보니 얼굴이… 무척 상기되
어 있었다. 그의 몸이 온통 뜨거운 건 비단 온천물에 들어갔다 나와서만은 아닌 것 같았다.
풍덩.
세상에.
소리도 지르지 못했다. 그냥 입수했다. 칼리크가 자신을 안고, 드레스를 다 입고 있는 자신
을 안고 그대로 온천물 안으로 들어갔다.
옷도 벗지 않은 상태 그대로 들어가 버렸다. 치렁치렁한 드레스 밑단이 물에 부풀어 올라
사방으로 넓게 퍼져 풍선처럼 둥둥 떠 올랐다. 덕분에 벗은 그의 아래가 보이지 않게 된 건
아주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온천물이 기분 좋게 뜨거운 것도 다행이었고.
“옷이 다 젖었잖아요.”
타박하는 말투는 아니었다. 쑥스러워 무슨 말이라도 하고자 떠오른 말을 그냥 한 것뿐이었
다. 비록 물에 홀딱 젖었긴 해도 옷을 다 입고 있는 덕분인지 그런 말이라도 할 수 있었다.
“여기까지 들어오는 거 기다리다간 지쳐 죽게?”
칼리크는 기다리면서 속이 바짝바짝 타들어 갔다. 분명 저 문밖에 도착한 걸 아는데 왜 이
리 안 들어오고 사람을 이리도 애가 타게 만드는지. 인내심에 바닥이 날 때쯤 드디어 문이
열렸다. 그러고도 바로 들어오지 않고 뜸을 들였다.
절로 한숨이 흘러나왔다. 어서 들어오지 않고 뭘 하고 있는 거지?
그는 심호흡을 하며 애써 자신을 다스렸다.
드디어 벨리타의 모습이 보였다. 너무나 아리따운 벨리타의 모습이 보이자 지금까지 애타
게 만든 건 다 잊어버렸다. 아니, 그냥 사라져 버렸다.
그리고 문이 닫혔다. 이제 여긴 우리 두 사람만의 공간이다. 드디어 첫날밤을 맞이할 침실
이다. 두 사람만의 밀실이다.
그런데 또 그녀가 멈춰서 움직이지 않고 서 있기만 했다. 답답해서 미칠 것 같았다. 언제
여기로 가까이 다가와 옷을 벗고… 옷이라…. 그녀의 옷차림을 훑어보니 머리가 다 지끈 아
파 왔다. 입어도 너무 많이 입고 왔다. 저것을 다 벗고 또 이 탕 안으로 들어오려면… 환장
하겠다. 어느 세월에 그걸 다 해?
그래서 벌떡 일어섰다. 더는 못 기다린다. 기다리다 죽는 꼴 날지도 모른다. 그냥 일어나
그녀에게 다가갔다. 그녀가 부끄러워 얼굴을 가리든 말든 냅다 안아 들고 탕 안으로 들어
왔다. 이제야 조바심이 좀 가신다. 고문을 당하는 기분이었다. 이런 기분을 들게 하는 벨리
타가 정말 대단하다.
“왜 이렇게 많아?”
그가 살짝 투덜거렸다. 뭐 하나 봤더니 어느새 드레스 등 뒤에 달린 보석 단추를 하나하나
풀고 있었다. 단단히 여며진 목 부위가 느슨해지기 시작하더니 드레스가 점점 벌어졌다.
기겁을 하고 가슴 쪽으로 두 손을 올려 옷이 흘러내리려 하는 걸 눌러 막았다.
“저기… 잠깐만….”
뭐가 잠깐만. 지금까지도 애타 죽겠는데.
칼리크는 무시해 버렸다. 그리고는 절로 끙, 소리를 내며 씩씩거렸다. 속이 타 죽겠는데, 온
몸이 뜨거워 죽겠는데 무슨 단추가 이리 많은지. 이건 필시 유모 짓이다. 환장할 유모 짓.
잔뜩 불만스러운 표정을 지으면서도 그의 손은 바빴다.
에이.
모르겠다. 어느 세월에 이걸 다 풀어. 그냥 좍 아래로 찢어 버렸다. 보석 단추가 탕 속 바닥
에 떨어지며 그녀의 옷이 드디어 활짝 벌어졌다. 감질나 죽겠다.
“악. 칼리크. 이거… 내가 제일 좋아하는 옷인데…. 그래서 오늘 이걸로 입은 건데….”
이제 보니 분위기 파악 못 한 건 벨리타다. 이런 옷을 입고 온 벨리타 잘못이다. 유모가 아
니었다. 지금 옷 이야기를 하는 것이 환장할 것 같으면서도 한편으로는 다행이었다.
처음에 그녀는 너무 긴장해서 바스러질 것처럼 서 있었는데 지금은 적당히 풀어진 것 같
았다. 그거 하나만은 다행이었다. 이럴 것 같아 온천물에 먼저 긴장한 몸을 풀어 주려고 이
곳을 택했는데 효과를 보고 있었다.
그에게 안겨 바둥거리다 보니 제 드레스가 저 앞으로 둥둥 떠가고 있었다. 무슨 온천탕이
수영장만 한지 제 방의 절반 크기는 되는 듯했다. 그 끝까지 떠내려간 드레스를 멍하니 쳐
다보고 있자니 무슨 뱀 껍질 벗기는 것도 아니고 훌러덩훌러덩 속옷까지 그가 척척 벗겨
내고 있었다. 둥둥 계속 떠내려가는 제 옷들을 보며 얼른 정신을 차렸다.
후다닥.
거의 드러난 가슴을 두 손으로 가리며 그에게서 잽싸게 떨어졌다. 뜨거운 물을 가르며 도
망치려니 앞으로 잘 나아가지 않았다.
엄마야.
더 갈 필요도 없었다. 몇 걸음 못 가서 그에게 바로 잡혀 버렸다. 어깨를 잡혀 그에게 뒤로
끌려가다시피 하면서 다시금 지금 상황이, 드러난 몸에 예민하게 쿡쿡 박혔다.
물은 이리 뜨거운데 팔에 소름이 다 솟아났다. 겁이 났다. 이제 바로 뭔가가 시작될 텐데
그게 겁이 났다. 키스만으로는 끝나지 않을 걸 알기에 그것이 두려워졌다. 스스로 선택한
것이지만 이 몸이야 어쨌든 자신은 지금이 첫 경험이다. 그러니 이만저만 두려운 것이 아
니었다. 몰라서 더 두려웠다.
벨리타를 한번 안아 보기가 이리 힘들 줄이야. 자꾸 도망치려는 그녀의 어깨를 잡아채서는
끌어당겼다. 그리고는 안아 버렸다. 잠깐의 시간도 주면 안 될 여자였다.
두 사람 다 잠시 숨을 골랐다.
그런데 그건 희망 사항이었다. 숨을 고르긴커녕 더 가빠졌다. 그의 드러난 가슴에 제 벗은
어깨가 밀착되어 있으니 진정이 될 리 없었다. 무섭도록 뛰기 시작하는 제 가슴에 머릿속
마저 새하얗게 비워지고 있었다. 뜨거운 온천물에 몸은 풀려 가는데 머리는 자꾸 굳어져만
갔다.
단단히 끌어안고 있는 벨리타의 몸이 뻣뻣해도 너무 뻣뻣했다. 풀어졌나 싶었더니 다시 똘
똘 뭉쳐 버렸다. 긴장을 하는 건 이해해도 너무 지나치다.
마치 처음 경험하는 아가씨처럼 군다. 남자 경험 하나 없는. 생각한 것보다 과한 반응이었
지만 뭐가 되었건 그녀를 존중할 생각이다.
사실 처음인 것도 맞다. 우리의 첫날밤이니. 우리 두 사람이 사랑을 나누는 건 처음이니 이
렇게 군다 여겼다. 그렇게 생각하니 모든 게 너그러워졌다. 하지만 마음은 그런데 몸은…
그리 여유 있지만은 않았다.
“벨리타.”
그의 감미로운 목소리가 그녀의 귀를 달래 주었다. 그녀의 뻣뻣해진 몸도, 굳은 머리도 살
살 어루만져 주는 것 같았다.
“우린 지금 빠른 게 아니야. 여기까지 오는 데 너무 길었어.”
알아요. 다 알아요. 피할 생각은 없어요. 각오하고 온 거예요. 다 알고 선택한 거예요.
그가 손을 올려 그녀의 얼굴을 천천히 들어 올렸다. 저절로 눈이 마주쳤다. 강인하게 타오
르는 그의 금안과 떨리는 그녀의 새파란 토파즈 빛 눈동자가 부딪혔다. 그 어떤 숨김 없이
지금 느끼는 감정을 솔직하게 펼쳐 보였다. 서로가 서로에게.
그의 손이 그녀의 뺨을 소중하게 쓰다듬기 시작했다. 그의 금빛 눈동자도 그녀의 파란 눈
동자도 점점 짙게 빛이 나며 반짝였다.
벨리타의 모습이 그 어느 때보다도 사랑스러웠다. 그래서 미칠 듯 펄펄 끓어올랐다. 그녀
의 모든 걸 다 가지고 싶어졌다.
“이 문을 나설 땐.”
나지막이 깔리는 목소리와 함께 그의 입술이 그녀를 향해 조금씩 내려왔다.
“우린.”
그의 입술이 거의 닿기 직전이었다.
“부부가 되어 있을 거요.”
네…. 대답은 할 수 없었다. 그로 인해 입술이 봉해졌다. 익숙해진 칼리크와의 뜨거운 키스
가 다시 이어졌다. 여러 번 해서 익숙한 건 맞는데 전혀 익숙해지지 않는 뜨거운 키스가 이
제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