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화 귀여운 건지 앙큼한 건지
오후 느지막이 돌아오면 엉덩이라도 때려 줘야겠다 분개하다가 그래도 믿으라 했으니 곧
올 거라 다독이다가, 표 나지 않게 안절부절못했다.
제 생각보다 그렇게 일찍은 아니었지만, 지금이라면 그래도 약속은 지켰다고 여겼다. 믿은
보람이 있네. 아차. 지금 읽은 내용이 뭔지 모르겠다. 그냥 눈으로만 훑고 지나갔다. 칼리크
는 읽었던 걸 다시 읽으면서도 빙그레 미소 짓지 않을 수 없었다.
벨리타는 입을 슬쩍 삐죽거렸다. 황궁에 돌아와 마차에서 내리며 은근 주변을 살폈다. 없
다. 안 나왔다. 뭐… 맨발로 뛰어나오기를 바란 건 아니지만 적어도 마중은 나올 줄 알았는
데 실망이었다. 그런 키스를 하고 가 놓고는, 밤에 득달같이 찾아와 일찍 돌아오라 다그쳐
놓고는 이러긴가. 흥! 그럼 나도 안 간다.
괜히 기분이 상한 벨리타는 서둘러 황후궁으로 쏙 들어가 버렸다.
칼리크는 기다리고 있었다. 잘 돌아왔다고 보고하러 올 벨리타를 기다리고 있었는데 영 소
식이 없다. 그냥 제 방으로 돌아갔나? 슬슬 괘씸해지기 시작했다. 어디 보고도 없이 그냥
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지만, 얼른 마음을 고쳐먹고 다시 천천히 자리에 앉았다. 너무 표 나
게 굴고 있다. 어젯밤 찾아간 것도 벨리타가 이상하게 오해할까 은근 신경이 쓰였는데 지
금 또 이러면 그 오해가 사실이 되어 버린다. 그럴 순 없지.
마음은 딴 곳에 가 있는데 서류를 들여다보려 하니 글자가 제대로 머리에 들어오지 않았
다. 몇 번을 읽은 뒤에야 서명할 수 있었다. 오늘 일이 쌓였는데 이러다간 절반도 끝내지
못할 듯싶어 정신을 가다듬었다. 어차피 점심 식사 시간엔 만날 테니 지금은 일이 먼저다.
그 생각만으로도 마음이 풀어진 칼리크는 서류에 서명하는 속도가 점점 빨라지기 시작했
다.
***
시종장은 근심 가득한 표정으로 폐하에게 다가갔다. 오래간만에 황후마마와 식사를 같이
하는 날인데 폐하께서 오늘도 식사를 잘하지 못하고 계셨다. 며칠 전, 차가운 홍차를 들고
갔을 때부터 불러도 대답이 없으시고 시름에 잠긴 것으로 보이셨는데 그 후로도 계속 잘
드시지 못했다. 보좌관이 진찰했을 때도 별 이상은 없다고 했는데. 요리사를 또 바꿔야 하
나.
“폐하. 이 음식도 입에 맞지 않으십니까?”
시종장이 다가와 그렇게 물었을 때야 비로소 칼리크는 음식을 반도 먹지 않았다는 걸 깨
달았다. 저 앞에 앉은 벨리타를 너무 보고 있었던 모양이다.
“아니다. 요리사에게 맛있다고 전하라.”
그리고는 고기를 크게 썰어 한입에 넣었다. 맛있었다. 사실 어제는 입맛이 없어서 저녁을
먹는 둥 마는 둥 했지만, 오늘은 아니었다. 입맛도 돌아오고 오늘 스테이크는 더 연하고 부
드러워 한 그릇 더 먹고 싶을 정도였다.
“벨리타. 음식이 입에 안 맞소?”
칼리크만 그런 것이 아니라 벨리타 역시 거의 깨작거리고 있었다. 같은 이유에서였다.
칼리크를 슬쩍슬쩍 보느라 벨리타는 음식을 조금밖에 먹지 못했다. 칼리크는 대놓고 그녀
를 보고 있었지만 벨리타는 그 시선을 피해 은근히 살피느라 잘 먹지 못했다. 그의 시선이
부담스러워 더 그랬다.
여기로 오면서 살짝 삐져 있었던 건 사실이었다. 그런데 그와 마주 앉게 되자, 아니 그와
같은 공간에 있게 되자 그냥 풀렸다. 남자다운 거친 외모, 자신을 바라보는 강렬한 눈빛,
자신에게서 한시도 눈을 떼지 않는 칼리크의 존재 자체로 다 용서가 되었다.
칼리크 역시 은근 맘 상해 있었는데 벨리타가 눈앞에 나타난 순간 모든 게 다 풀어져 버렸
다. 최근 미모에 더 물이 오른 듯 점점 예뻐 보이는 얼굴, 자신을 은근히 바라보는 수줍은
시선, 자신에게만 관심을 보이는 벨리타의 존재 자체로 다 용서가 되었다.
두 사람 사이에 긴장감이 팽팽하게 흐르고 있었다. 기분 나쁜 긴장감이 아니라 남녀 사이
에 흐르는 미묘한 긴장감이 흘렀다. 식사를 하면서 이런 일은 없었던 일이다. 불편해서 먹
지를 못하겠다. 가슴이 뛰는 불편함 때문에 먹으면 체할 것 같았다.
“일찍 오려고 서둘렀더니 무리를 했나 봅니다. 좀 지치네요.”
일부 사실이었지만 전면에 내세울 정도는 아니었다. 게다가 그와 한 약속을 지키려 애썼다
는 걸 은근 표 내고 싶었다.
“그럼. 말 연습을 못 하는 거요?”
칼리크는 더 할 말이 많았지만 멈추었다. 벨롱 안 보러 갈 거요? 식사만 하고 그만 돌아갈
거요? 하루라도 쉬면 언제 실력이 늘려고….
더 이상 말했다가는 자신이 더 말 연습을 기다리고 있다는 듯이, 아쉽다는 듯이 들릴 판이
었다. 그런 건 아니다. 그러면 벨리타가 오해하고도 남았다.
“할… 거예요.”
벨리타가 수줍게 대답했다. 수줍게. 부끄러운 듯. 그는 속으로 씨익 웃었다. 하고 싶구나.
말 연습을 하고 싶은지 다른 게 하고 싶은지는 나중에 보면 알겠지.
그녀의 대답에 다시 기분이 좋아진 칼리크는 시원한 홍차를 맛있게 들이켰다.
***
벨롱에게 가면서 보니 벨리타가 정말 기운이 없어 보였다. 돌아오느라 힘들었나? 칼리크
는 시종장에게 다른 걸 명했다.
오랜만에 보는 벨롱이 반갑게 고개를 그녀의 어깨에 갖다 대었다. 말갈기를 쓰다듬어 주며
그녀 역시 애정을 표현해 주었다. 조금 더 큰 것 같기도 했다. 정말 성장이 빠른 백마였다.
“오늘은 달려 볼까?”
벨롱을 만지고 있던 벨리타는 작게 한숨을 내 쉬었다. 이제 조금 빠르게 걷는 것밖에 못 하
는데 뭘 달리나 싶어 더 기운이 빠졌다. 또 놀리는 건가?
다른 때 같으면 이렇게 기운 없지 않을 텐데 컨디션이 안 좋은 것 같았다. 지친 게 맞았다.
“벨롱은 그냥 두고 이리 오시오.”
그제야 벨리타는 뒤로 돌아섰다.
어?
그가 늠름한 흑마 위에 앉아 그녀에게 손을 내밀고 있었다. 순간, 무슨 의도인지 알아차리
지 못하다 한 박자 늦게 그가 한 말을 이해했다. 달려 보자는 말이 이 뜻이었구나. 지금 지
쳐서 말 연습을 못 할 것 같았는데 그런 세심한 배려도 해 주는 칼리크가 고마웠다. 눈부신
햇살 아래 근사하게 웃고 있는 그의 강인한 얼굴이 그 누구보다 멋지게 보였다.
흑마에게 다가가자마자 한 손에 끌어 올려져 예전처럼 그의 앞에 비스듬히 앉게 되었다.
자동으로 그의 허리를 단단히 잡은 벨리타는 바람을 맞을 준비를 했다.
빠르게 말이 달리면 바람이 그냥 스쳐 가는 것이 아니라 회오리바람처럼 강하게 휘감고
지나간다. 그 느낌이 너무 좋았다.
바람 속을 뚫고 달리는 느낌. 비록 자신이 아니라 칼리크와 흑마가 달리는 거지만 그 속도
와 거친 바람이 속까지 시원하게 만들어 준다. 흑마가 천천히 걸어가더니조금씩 걷는 속도
를 빠르게 했다. 이제 곧 달린다. 벨리타는 심호흡을 먼저 하며 기대감으로 두 눈이 빤짝거
렸다.
칼리크는 한 손으로 벨리타를 안고는 그 존재를 즐겼다. 이젠 제 품 안에 들어오는 벨리타
의 존재가 익숙해졌다.
그래서 혼자 자려고 하거나 그녀가 보이는 데도 떨어져 있으면 문득 허전함을 느끼곤 했
다. 이렇게 품에 안고 있는 것이 정상인 것처럼 오히려 더 편안하고 만족스러웠다.
게다가 말 위로 끌어 올려지자마자 벨리타가 얼른 자신의 허리부터 꼭 끌어안는 것이 더
만족스러웠다. 귀여운 건지 앙큼한 건지, 뭐가 되었건 마음에 들었다. 아직 자신에 대한 관
심과 흥미가 가시지 않았다는 걸 확인하고 나니 더 마음에 들었는지도 모른다.
드디어 흑마가 질주하기 시작했다. 두 번째 경험하는 거지만 그에게 안전하게 안겨 바람처
럼 달리는 기분은 그 어떤 것에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기분이 날아오를 듯 좋았다. 그가
점점 더 꼭 끌어안으며 달리자 그의 품에 폭 안긴 아기가 된 기분이었다. 모든 주변이 엄청
난 속도로 지나가고 있었지만, 더 빠르게 달리고 싶었다. 빛의 속도로 더 빨리….
“더 빨리 달릴까?”
그가 그녀의 귀에 대고 큰 소리로 물었다. 그녀의 입술이 옆으로 한껏 벌어졌다. 이런 마음
까지 딱 맞는다.
더 기대에 부풀어 고개를 그가 알 수 있을 정도로 크게 여러 번 끄덕거렸다. 그리고는 더
그의 허리를 꼭 끌어안았다.
무지막지하게 달리려나 본데 대비를 해야 했다. 그도 기분이 좋은지 소리 내어 웃음을 터
트렸다. 웃음소리는 들리지 않아도 그의 가슴에 얼굴을 꼭 붙이고 있으니 쿵쿵 울리는 소
리로 그가 웃고 있다는 걸 알아차릴 수 있었다.
말을 타다가 이렇게 소리 내어 웃어 보는 것도 처음이었다. 칼리크는 말하기가 무섭게 있
는 힘껏 자신을 더 끌어안으며 파고드는 벨리타 때문에 절로 웃음이 터져 나왔다. 지쳐 있
었어도 이렇게 같이 있고 싶어 한 그녀의 마음이 읽혀 더할 나위 없이 기분이 좋아졌다. 오
래간만에 힘차게 달려 보니 그의 몸도 점점 흥분되는 것이 아주 짜릿했다. 그래. 원 없이
달려 보자.
아까도 빨랐는데 지금은 말이 아니라 바람을 타고 달리는 것 같았다. 이렇게 빨리 달릴 수
도 있다는 걸, 아니 이렇게 날아갈 수도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정말로 자신의 몸이 날고 있었다. 자유롭게. 아무 근심 걱정 없이 더 높게, 더 멀리, 더 빠르
게. 위험할 정도로 속도가 빨라도 전혀 무섭지 않았다.
세상 든든하고 늠름한 그의 품이, 자신이 있을 가장 안전하고 편안한 장소 같았다. 그러니
잃을 수 없다. 그를 살려야 한다. 반드시 해내고 말 것이다. 벨리타는 그의 허리를 놓지 않
겠다는 듯 더 꼭 끌어안았다.
산으로 이어지는 길목에서 서서히 속도를 줄인 칼리크는 잠시 흑마를 멈추어 세웠다. 거친
콧김을 뿜어내며 힘차게 달려온 흑마를 조금 쉬게 해 줄 생각이었다. 다시 돌아가려면 이
런 휴식도 필요하다. 아니 흑마보다는 자신을 위해 좀 쉬어야겠다.
“타고만 있었는데… 내가… 다… 숨이 차요…….”
품에 안겨 있는 벨리타의 가슴이 크게 들썩이는 게 느껴졌다. 그의 가슴 역시 표 나게 오르
락내리락하는 건 마찬가지였다. 그녀의 정수리에 그의 거친 숨이 마구 흩뿌려졌다. 벨리타
의 향기가 들숨을 따라 한가득 안으로 흘러 들어왔다. 꽃향기 같은 그녀의 향기가 은은하
게 그의 온 감각을 깨우며 지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