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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군에게 찍힌 민폐 황후 입니다-51화 (51/130)

51화 언제 오려나

가까이서 보니 저건 도끼에 가까웠다. 날이 바짝 선 도끼. 불쌍한 칼리크를 떠올리려다 얼

른 싹 지워 버렸다. 지금은 그런 생각으로 용기를 달아나게 할 때가 아니다. 해내야 한다.

이제는 자신이 나설 때다. 스스로 움직여 바꿔야 한다. 어쩌면 이것 때문에 자신이 벨리타

로 빙의한 건지도 모른다.

“저… 잠깐 얘기 좀 할 수 있을까요?”

갑자기 말을 걸었더니 이쪽으로 고개를 돌린 에단이 무례하지 않게 슬쩍 그녀를 보고는

바로 영업용 미소를 지었다.

“이거 미안해서 어쩌죠. 아가씨? 지금 바빠서 데이트할 시간이 없는데.”

상대방 기분을 상하지 않게 거절하는 에단을 보며, 그건 기특했지만 왕자병은 아니길 바랐

다. 지금 그렇게 오해할 만한 상황이라는 건 인정한다.

“데이트 아니에요. 은밀히 할 이야기가 있으니 자리 좀 옮길까요?”

흠…. 에단은 고민을 했다. 이렇게 데이트를 청하는 경우가 여러 번 있어 사양한 건데 말로

는 아니라면서 은밀한 이야기란다. 게다가 자리까지 옮기자고 하고. 이거 난처하게 되었

다. 어떡한담.

그는 연애할 마음이 없었다. 아니, 그런 상대를 아직 못 만났다. 언젠가는 만날 거라는 걸

믿기에 함부로 아무하고 연애할 생각이 없다.

“시간이 없어서 아주 잠시라면….”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거면 된다. 긴말은 필요 없으니까.

에단이 가게에서 나와 건물 뒤편으로 걸어가는 걸 뒤쫓아 가면서 그녀는 연신 사방을 두

리번거렸다. 누구 한 명이라도 들으면 큰일 난다.

“자. 어디 말해 봐요. 무슨 은밀한 이야기인지.”

에단의 얼굴을 보아 하니 제 말을 믿지 않은 모양이다. 남녀 사이의 은밀한 이야기라 여기

는 것이 표정에 여실히 드러나 있었다. 실망시켜 미안하지만 그건 아니랍니다.

“에단 스톤. 맞죠?”

더 확실히 하고 간다.

“다들 푸줏간 에단으로 부르죠.”

확인 끝. 이제부터가 중요하다.

“잘 들어요. 에단 스톤.”

뭔가 긴장감이 드는 그녀의 목소리에 가볍게 치부하던 에단은 다음 말에 집중할 수밖에

없었다.

“이걸 가지고 수일 이내에 황궁으로 날 찾아와요.”

황…궁?

이게 도대체 무슨 말?

황궁 소리가 나오자 에단의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가 이내 가늘어졌다. 의심이 가득한 눈초

리로 정신 나간 여자를 보듯 쳐다보며 슬쩍 얼굴을 찌푸렸다. 그리고는 그녀가 내민 것을

내려다보며 더 인상을 찌그러뜨렸다.

그것은 팔찌였다.

딱 봐도 고급스럽고 비싸 보이는 물건이었다.

보석이 박혀 있고 가늘게 꼬여 있는 몸체 중앙에 방패 모양이 박혀 있었다.

눈으로는 그렇게 보여도 요즘 워낙 모조품들이 많이 돌아다니고 있어 에단은 그게 값비싼

진품이라 믿지 않았다.

약간 정신이 이상한 여자가 모조품 하나를 내민다 여겼다. 하긴, 옷차림부터 피부까지 이

상하게 보였다. 제 몸에 맞지 않는 펑퍼짐한 원피스를 입고 약간 찢어진 토끼 가면 아래 보

이는 피부가 얼룩덜룩했다.

마치 화상을 입은 자국처럼. 하지만 핑크빛 입술만은 정상이었고 지금 상황에 어울리지 않

게 야무지게 보였다. 뭔가 밸런스가 안 맞는 모습을 한 여자라 더더욱 의심이 증폭되었다.

괜히 시간 낭비만 했다.

떨떠름한 표정을 짓고 있는 에단의 손에 억지로 제 팔찌를 쥐여 준 벨리타는 그의 의심을

지워 주기 위한 결정타를 날렸다.

“자칼단.”

헉!

그녀의 눈엔 숨을 황급히 들이마시며 놀란 소리를 지르는 에단의 얼굴이 순진하게 보였다.

자칼단의 우두머리라면서 이 정도 가지고 표정 관리도 못 하다니. 아니면 그 정도로 충격

적인 발언이었나?

여전히 의심 가득한 눈초리로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는 에단이었지만 의심의 종류가 달랐

다. 어떻게 그런 걸 알고 있냐는 의심. 최고치의 경계심으로 무장한 그의 눈빛이 점점 사나

워졌다. 원래 그는 친절하고 상냥한 편이었지만 무시무시한 면을 감추고 있었다. 몇 명 외

에는 그의 그런 면을 알지 못한다.

자칼단은 아무도 모르는 비밀 조직이었다. 구성원은 단 7명뿐. 그 외 다른 사람은 절대 알

리 없건만 어떻게 이 여자 입에서 그 말이 나온 건지 반드시 알아야 했다.

“날 끌고 가진 못해요. 지금 호위하는 사람들이 쫙 깔려 있거든요.”

에단은 조심스럽게 주변을 둘러보았다. 사람들 앞에서는 내보이지 않는 날카롭고 섬뜩한

눈빛이었다. 이 여자 말을 신빙성 있게 만드는 남자가 여럿 보인다. 이쪽을 눈에 띄지 않게

주시하고 있는 남자들이 있었다. 보통 사람들과 분위기가 다른 걸 그는 알아볼 수 있었다.

그들이 검을 쓰는 자들이라는 걸.

에단은 다시 여자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황궁이라. 자칼단이 들킨 건가? 어떻게? 7명 중 밀

고할 사람이 아무도 없는데. 귀신이 곡할 노릇이다.

그럼 이상하게 생긴 이 여자는 누구란 말이지? 가만. 황궁에서 혹 알게 되었다 해도 이런

식으로 허술하게 접근한다? 말도 안 된다. 바로 잡아들이면 그만일 텐데 뭔가 상황이 맞지

않았다. 아무리 궁리를 해 봐도 지금 무슨 상황인지 추리를 해낼 수 없어 갑갑하기만 했다.

“당신. 누구지?”

무섭게 누르는 에단의 목소리가 이상하게 두렵지 않았다. 신기했다. 갑자기 힘이 솟아났

다. 벨리타는 이제야 제 힘을 실감했다.

이 남자는 자신을 모른다. 하지만 자신은 이 남자를 너무너무 잘 안다. 다른 주변 사람들이

야 소설에 언급되어 있지 않으면 생판 처음 보는 사람이었는데 이 에단은 손바닥 보듯이

자세히 다 안다.

남자 주인공이니까. 시시콜콜한 것까지 다 적혀 있었다. 소설 내용을 알고 있을 뿐인데 여

기서는 미래를 아는 사람이 되어 버렸다. 그것에 대한 힘을 지금 느끼게 되었다. 그것이 자

신이 이곳으로 온 이유라는 것 또한 되새겼다.

“그걸 알고 싶으면 황궁으로 찾아오세요.”

부드러운 말투 속에 힘이 실린 목소리. 처음과는 달라진 여자의 목소리.

황궁 사람인가? 그러니까 누구?

에단이 답답해하는 걸 보면서 벨리타는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아무리 궁금해해도 자신이

황후라는 건 절대 추측해 내지 못할 것이다.

“내 말대로 하는 것이 당신과 자칼단을 살리고 이 나라를 살리는 길이에요.”

의협심 강한 사람들로 뭉친 자칼단. 나라를 살린다는 말이 에단과 자칼단을 움직이게 만들

것이다. 이 도시의 로빈 후드 같은 존재이니까.

지금은 작은 일에 움직이고 있지만 점점 세력을 확대해 나갈 것이다. 점점 인원도 많아지

고. 읽은 소설 속에는 시기적으로 유클로 왕국과의 전쟁이 시작되고 석 달 후, 대규모 조직

으로 커지며 음지에서 양지로 떠오른다고 쓰여 있었다. 그리고 곧 로카 왕국이 쳐들어오자

모두가 자칼단을 외치며 똘똘 뭉친다.그렇게 나라를 위해 의병처럼 일어나 적군과 대항하

고 황제마저 친다.

그러니 자신은 그 사이에 끼어들어 판도를 바꾸려 한다. 황제와 자신이 죽지 않게 묘안을

짜냈다. 그것이 통하지 않으면 자칼단을 없애야 할지도 모른다. 지금 비밀 아지트도 어디

인지 알고 있고 나중에 조직이 커진 뒤 사막으로 옮기는 아지트도 알고 있다. 모르는 게 없

다는 것이 더한 힘을 발휘했다.

아무리 다 안다고 해도 가급적 누구도 피해 보지 말고 죽거나 죽이지 않으면 좋겠다. 협상

이 잘되어 서로 윈윈하는 관계가 되는 것이 그녀가 바라는 계획이었다.

어리둥절, 의심과 걱정, 궁금증과 당황 그리고 두려움이 마구 섞인 에단의 표정을 보며 벨

리타는 유유히 돌아섰다.

“아참.”

칼리크도 그랬지만 이 말 다음에는 썩 좋은 말이 이어지지 않는다. 지금 그녀도 그럴 것이

다.

“그 팔찌. 팔았다가는 그대로 죽은 목숨이에요.”

물론 거짓말이다. 혹시 모를 변수를 미리 방지한 것이고 은근하게 협박한 것이다. 사람 말

귀는 제대로 알아듣는 사람 같아 그 말을 끝으로 몸을 돌렸다.

이번 일로 많은 걸 겪었지만 이제야 비로소 자신이 이곳에서 제대로 일을 하고 있는 느낌

이었다. 그동안은 그저 놀고먹는 백수 같았는데. 황궁에서는 황후로서 할 일도 거의 없었

다.

황비들이라도 있어야 내명부의 기강이나 질서를 다스릴 텐데 황제가 워낙 깔끔해서 누구

하나 만들지 않았으니 그런 쪽으로는 할 일도 없었다.

다른 유능한 사람들이 업무를 다 나눠서 하고 있으니 간간이 서명만 할 뿐, 딱히 주어진 일

이 없었다. 어쩌면 원래의 벨리타가 워낙 개차반이라 황후로서 해야 할 일도 아예 맡기지

않은 건지도 모르겠지만.

그래. 이제부터 시작이야.

비장한 각오를 한 벨리타는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저를 기다리고 있는 유모를 보고는 표정

을 풀었다. 여기서 할 일은 끝났다. 이제 돌아가서 다음 일을 도모해야 한다.

자칼단. 7명의 의협심 강하고 입 무거운 자들로 구성된 비밀 조직. 현재는 이 도시에서 악

덕 고리대금업자를 혼내 주거나 여자와 가난한 자, 억울하게 당한 자 등등 약자를 위해 움

직이는 소규모의 집단이다.

서서히 사람들에게 환영받기 시작해 나중에는 추앙받는 리더로 자리 잡는다. 그러나 현재,

모두 두건을 쓰고 손으로 대화할 뿐 목소리를 내지 않기 때문에 아무도 그들이 누구인지

모른다.

소설을 읽은 벨리타 외에는. 그러니 이 세계에서 자칼단의 존재를 아는 사람은 총 8명. 아

직은 자신이 정보를 더 많이 가지고 있기 때문에 유리하다. 그러니 앞으로 머리를 잘 써야

한다.

“아휴. 얼굴이 이게 뭐예요? ”

손으로 문질렀는지 누가 만져 댔는지, 어둡게 칠해 놓은 얼굴이 군데군데 벗겨져 이상하게

보였다. 이러고도 거리를 활보하고 다니는 마마가 여전히 적응이 되지 않았지만 기분 좋게

돌아오신 것 같아 그냥 넘어가기로 했다. 돌아가서 깨끗이 씻어 드리면 되니까.

유모와 팔짱을 끼고 파오로 돌아가는 벨리타는 밤공기를 한껏 들이마셨다. 상쾌했다. 제

안에서 솟아나는 희망을 응원해 주듯이 아주아주 상쾌했다.

그렇게 운명의 주사위가 던져진 그 밤이 조용히 흘러갔다.

***

밖이 소란하다. 드디어 벨리타가 돌아왔다. 하지만 칼리크는 집무실에서 서명할 서류를 읽

으며 그대로 앉아 있었다. 굳이 나갈 필요는 없다. 하지만 내내 창밖에 들리는 소리에 신경

을 썼던 건 사실이다. 언제 오려나, 아침에 온다 했는데 그게 언제인지 알 수가 없어 은근

속이 끓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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