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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군에게 찍힌 민폐 황후 입니다-50화 (50/130)

50화 믿게 해 봐

“어디긴 어디야? 황궁이지.”

“지…금요?”

“지금이 아니면. 여기서 살 건가?”

또다시 그가 무뚝뚝하고 사납게 굴고 있었지만, 그녀에게는 이제 무섭게 느껴지지 않았다.

“내일 일찍 돌아갈게요. 오늘은 먼저 돌아가세요.”

“나 혼자?”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떠드느냐는 듯 칼리크가 위압적으로 굴었다.

“꼭 할 일이 있어서 그래요.”

사실이었다. 할 일이 떠올랐다.

“무슨 할 일?”

뭐라고 해야 하나……. 당신을 살리고 나도 살 수 있는 일이라고 말할 수는 없고.

“꼭 만나야 할 사람이 있어요.”

그가 갑자기 눈을 부릅떴다.

“남자?”

그리고는 갑자기 벌떡 일어나더니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사납게 부릅뜬 눈으로 사방팔방

훑어보는 모습이 ‘어떤 놈이야.’라고 소리치는 것만 같았다.

“칼리크?”

벨리타는 자리에서 일어나 가만히 그의 손을 잡았다. 그가 다시 고개를 휙 돌려 그녀에게

집중하듯이 바라보았다.

그는 그녀의 온기가 느껴지자 들끓던 감정이 점점 사그라들었다. 벨리타가 오늘 처음 하는

것이 많다. 자신의 손까지 먼저 잡다니. 따뜻한 시선으로 쳐다보며 이런 식으로 부드럽게

먼저 손을 잡은 적은 처음이다.

“그런 거 아니에요.”

“그럼 뭐요?”

그렇게 묻는 그의 목소리가 한풀 꺾였다.

“남자 안 만난다고 했잖아요. 나도 당신처럼 약속한 거 꼭 지켜요.”

이것도 처음이다. 이렇게 흠잡을 데 없이 진심을 말하는 듯한 목소리는. 그것도 자신 있게

사람을 설득시킨다.

“날 믿어 줘요.”

벨리타의 입에서 이런 말이 나올 줄이야. 세상 믿지 못할 여자가 벨리타였는데. 그런데 믿

고 싶어졌다. 그렇게 만들고 있다. 그녀가. 말과 행동으로.

“믿게 해 봐.”

증명해 봐. 맨 처음 만난 산속에서 그가 했던 그 말과 겹쳐 들렸다. 분위기는 서로 전혀 달

랐지만. 이젠 자신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안다. 그가 이렇게 말하면 뭘 원하는지도.

쪽.

장난해?

이것도 변함없다. 버드 키스만 하고 떨어지자 자신을 쳐다보는 그의 눈빛이 똑같았다. 그

녀는 빙그레 웃을 수밖에 없었다.

벨리타는 토끼 가면을 가만히 벗었다. 그리고는 그의 목을 살며시 끌어안으며 더 가까이

다가갔다. 그의 눈이 만족스럽다는 듯 번쩍였다.

벨리타의 입술이 천천히 다가왔다. 두 눈을 지그시 감은 채 조금씩 조금씩 다가왔다. 감질

나게 만들려고 했다면 성공이다. 애가 탈 정도로 만들었으니 대성공이다. 조바심에 먼저

달려들었다. 아니, 그녀의 입술을 확 덮쳐 버렸다.

아….

며칠 만에 맛보는 벨리타의 입술인가. 마치 몇 달은 떨어져 있었던 것만 같다. 부드럽긴 얼

마나 부드러운지.

더 부드러워진 것 같다. 그 감미로움에 그냥 풍덩 빠져 버렸다. 거칠게 헤엄치듯 활개를 쳤

다. 물 만난 뭐처럼 마구 그녀의 입 안에서 뛰놀았다.

이쪽저쪽 제 맘대로 휘저으며 마음껏 넘나들었다. 언제나 같은 느낌. 갈증이 인다. 한껏 맛

보고 있는데도 목이 마른다.

더한 조바심이 일어 벨리타의 몸을 힘껏 끌어 올렸다. 내 달콤한 장난감. 꼭 쥐고 누구에게

도 주고 싶지 않은 벨리타. 이렇게 키스만 해도 너무 황홀한데 그녀를 온전히 다 가지면 어

떠할지 생각만으로도 온몸이 터질 듯 부풀어 오른다. 이제 때가 된 것 같다. 미루고 미루던

우리의 첫날밤을 치를 때가. 아… 그냥 이대로 데려가고 싶다. 황궁으로. 우리의 침대로.

칼리크와 느긋하게 여유 있는 키스를 나누는 것은 불가능하다. 언제나 다급했고 격렬했다.

그에게 힘껏 끌어안겨지는 바람에 발이 땅에서 떨어졌다.

그의 목을 더 힘주어 끌어안고는 꼭 붙어 있는 입술에 매달렸다. 어지럽다. 현란한 그의 움

직임에 세상이 빙글빙글 도는 것 같았다.

여기가 밖이니 망정이지 제 방이었으면 그대로 침대로 향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감정

이 들끓었다. 자신 못지않게 그의 감정은 더 거세게 터져 나왔다. 아… 헤어지기 싫다. 그냥

칼리크와 같이 있고 싶다.

휙. 휙.

주변에서 지나가는 사람들이 짓궂게 휘파람을 불어 대며 지나갔다. 축제 거리에서 키스 정

도 하는 거야 그다지 이상한 풍경은 아니지만 해도 해도 너무 오래 하고 있었다. 그것도 보

는 사람들이 얼굴 화끈거릴 정도로 너무 격렬하게 하고 있었다.

그래도 칼리크는 멈추지 않았다. 휘파람 소리 같은 건 들리지도 않는다는 듯이 아니, 들려

도 전혀 신경 쓰지 않는다는 듯이 원하는 만큼 계속 그녀에게서 떨어지지 않았다.

***

겨우 떨어진 두 사람은 가쁜 숨을 내뱉으며 서로에게 안겨 있었다. 입술만 떨어졌지 몸은

아직 떨어질 마음의 준비가 필요하다는 듯 잘게 떨리고 있었다. 두 사람의 가슴이 크게 들

썩이며 부딪혔다.

겨우 발이 땅에 닿은 벨리타는 새삼 그의 키가 크다는 걸 느꼈다. 이렇게 안겨 그를 올려다

보고 있자니 고개를 한껏 젖혀야 했다.

그가 그녀의 머리를 아까처럼 가만가만 어루만지며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겨 주

었다. 얼마나 격렬하게 키스를 했는지 단정히 묶은 머리카락이 여기저기 비어져 나왔다.

한 올 한 올 넘겨 주는 그의 손길이 다정했다. 그러면서 그녀의 마음까지 들여다보고 싶다

는 듯 집중하는 그의 눈빛이 강렬했다. 지금 그의 품 안에 안겨 구름 위에 둥실 떠 있는 것

만 같았다.

“못생겼네.”

분위기에 안 맞게 뜬금없는 그의 발언에 더 빨리 구름 위에서 지상으로 내려올 수 있었다.

그녀의 입술이 점점 삐죽 튀어나오기 시작했다. 그러다 더 이상 튀어나오지 않고 제자리로

돌아갔다. 눈은 퉁퉁 부어 있고 눈썹은 이상하게 그려진 걸 그렇게 놀리면서도 여전히 그

의 손이 자신의 얼굴에 머물렀기 때문이다.

말은 그렇게 하면서 손은 따로 움직였다. 그의 말마따나 못생긴 얼굴을 손등으로 가만가만

쓸어 보며 이 시간을 끝내기 아쉬워하는 듯이 보였다. 그건 그녀도 마찬가지였다. 서로가

같은 마음이라는 것이 이 정도로 가슴이 몽글몽글해지는 일인지 처음 알았다.

드디어 그가 손을 거두더니 크게 심호흡을 했다. 그리고는 그녀를 떨어뜨려 놓았다. 그제

야 벌어진 두 사람 사이로 바람 한 줄기가 무심하게 지나갔다. 그렇게 지나간 바람과는 달

리 두 사람의 눈빛은 똑같이 진한 아쉬움을 담고 있었다.

“내일 일찍 와.”

표 나지 않게 하는 것 같아도 이젠 그가 자신한테 이렇게 매달리고 있다는 것이 느껴졌다.

그도 외로웠나 보다. 대륙 통일에 몰두하느라, 황제 자리를 지키느라 데인과 안톤 외에는

마음 연 사람이 없었나 보다. 그러니 이러지.

“그럴게요.”

이 정도의 키스까지 한 걸 보면 벨리타가 이젠 제대로 유혹하려나 보다. 아직은 식지 않았

다. 슬슬 끝내려 한다고 어림짐작했는데 그건 아니라 다행이다. 다행… 뭐에 다행이라는 거

지? 칼리크는 제 생각에 살짝 당황했다.

그는 바로 몸을 돌렸다. 이제 보니 벨리타 앞에서 뭔가에 당황하면 이렇게 몸을 돌려 버리

는 습관이 있는 듯했다.

마음 같아서는 파오로 같이 가 다음 날 출발하면 좋겠는데 엄연히 지금 행차는 비공식적

이다. 더 이상 지체했다가 황제가 이곳에 머물렀다는 것이 알려지면 좋을 게 없다. 황후를

대신 보내 놓고 비공식적으로 황후만 보고 간다? 안 될 말이다. 비공식적인 건 비공식적으

로 끝나야 한다.

그녀를 한번 믿어 보기로 했다. 벨리타를 믿어 본다. 이런 변화는 상상도 못 한 일이었다.

그전에는 지나가는 개를 믿지 벨리타를 믿어? 안톤이나 데인이면 모를까 벨리타를 믿다

니, 코웃음만 쳤을 것이다. 그런데 지금은 믿어 봐도 될 것 같다. 자신을 믿어 달라고 말하

던 그녀의 목소리엔 가슴 깊은 곳을 울리는 뭔가가 있었다. 그런 건 아무나 흉내 내지 못한

다.

하늘과 땅 차이로 달라진 벨리타의 모습이 사실 신기했다. 이렇게 사람이 바뀔 수도 있는

건가? 확실한 건 벨리타가 지금처럼 달라지지 않았다면 쳐다보지도 않았을 거라는 것.

그런데 궁금한 게 한 가지 있다. 왜? 무슨 계기로? 혹, 죽을 뻔했는데 겨우 살아남게 되자

사람이 바뀐 건가?

시기상 딱 들어맞긴 한데. 왠지… 그 이유 하나만으로 그녀가 이리도 바뀌었다고 하기에는

뭔가 부족했다. 다른 더 큰 이유가 있을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그것이 궁금하긴 했다.

그래도 이곳으로 달려올 때와는 달리 황궁으로 돌아가는 그의 발걸음은 가벼웠다. 갑자기

시장기가 돌았다. 저녁을 먹다 말았더니 이런다. 벨리타와 같이 있을 때는 배고픈 줄도 몰

랐는데. 돌아가서 뭐라도 가볍게 먹어야겠다. 말을 달려 황궁으로 향하고 있는 칼리크의

마음 역시 무거운 짐을 내려놓은 듯 가벼웠다. 밤공기가 무척 상쾌했다.

그는 멀리 떨어져 황제를 호위하며 말을 달리고 있는 근위대 정예군들과 함께 달빛 아래

힘차게 말을 달렸다.

***

벨리타는 할 일도 있었고 대부대가 황궁으로 돌아가려면 짐을 꾸릴 시간도 필요할 테니

다음 날 아침 일찍 출발하는 것이 낫다고 판단했다. 지금 나가서 놀고 있는 시녀들도 다 소

환해야 하기에 이래저래 바로 돌아가는 건 무리였다.

무심한 듯 바로 돌아서서 가는 칼리크의 뒷모습을 배웅하며 은근한 미소를 지었다. 그래.

저런 사람이야. 본인 마음 들키고 싶어 하지 않는 사람. 그리고 이젠 터무니없이 강요도 하

지 않는 사람. 저렇게 돌아서서 가 줄 줄도 아는 사람.

그러니 그의 마음을 알아도 모른 척해 줄 것이다. 그가 깨닫기 전까지.

벨리타는 이제 손님이 줄고 서서히 마감하려 하는 푸줏간을 여전히 지켜보고 있었다.

때가 되었다. 조심스러운 발걸음으로 한발 한발 그곳으로 다가가는 벨리타의 얼굴은 긴장

감으로 어색하게 굳어 있었다. 그래도 가면이 가려 주고 있어 다행으로 여겼다. 지금 이렇

게 다가가기까지 많은 용기가 필요했다. 하지만 더 큰 대의를 위해 태어나서 처음으로 산

더미만큼의 용기를 끌어모았다.

탁.

그 소리에 벨리타는 몸을 크게 움찔하며 제 안에서 빠져나가려는 용기를 다시 끌어모았다.

에단이 두꺼운 나무 도마에 들고 있던 커다란 칼을 내리꽂는 소리에 이만저만 놀란 것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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