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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군에게 찍힌 민폐 황후 입니다-49화 (49/130)

49화 내 명령을 어긴 벌이야

이곳 축제에 맞게 새하얀 셔츠에 웃옷을 걸쳐 입은 모습이 평범한 귀족의 모습이었다. 아

니, 절대 그는 뭘 입어도 평범할 수 없다. 고귀한 귀족 같아 보였다. 그래도 황제인 걸 밝히

지 않으려 이리 변장을 한 것 같았다. 이 모습도 나름 어울렸다. 솔직해지자. 너무 멋있었

다.

모질게!

하지만 그 한 마디를 되새기며 벨리타는 흔들리는 마음을 꼭 붙들었다. 다짐했던 걸 잊어

선 안 된다. 그녀는 조금 전 자신이 한 행동을 후회하고 또 후회했다. 다시는 그런 짓을 하

면 안 된다. 절대 안 된다. 명심. 또 명심!

“내 생쥐를 찾아왔더니 토끼가 되어 버렸네?”

즐거워진 칼리크는 농담조로 가볍게 던졌다. 내가 가지고 놀던 생쥐. 잃어버린 것 같던 장

난감을 방금 되찾았다.

생쥐는 또 뭐지?

경계심으로 무장한 그녀가 다시 나뭇등걸에 앉아 버리자 칼리크가 그 앞으로 다가왔다. 항

상 정복 차림과 정갈한 모습만 봐서 그런지 다소 머리도 흐트러지고 자유분방해 보이는

모습이 신선해 자꾸 눈이 가려는 걸 애써 막았다. 황궁 안에서보다 더 멋있었다. 이러지 말

자 해 놓고 자꾸 이런다.

칼리크는 자신이 벨리타에게 너무 무른 건 아닌지 살짝 의심이 갔다.

몇 시간 전. 저녁 식사를 하다 말고 포크를 내려놓았다. 밖은 어두워지려 하는데 돌아오는

마차 소리는 없고 감감무소식이었다.

오늘이 돌아오기로 되어 있는 날인데 벨리타가 잊어버렸나. 그럴 리가 없다. 그 정도로 정

신머리 없는 사람은 아닌데. 그렇다면 반항인가?

아니면 지금이라도 오고 있는 중인가? 이것도 그럴 리가 없다는 쪽으로 기울었다. 에이. 안

되겠다. 아주 혼쭐을 내 줄 테다. 어디서 내 명령을 어겨? 그것도 얼마나 배려해 준 건데

그것도 모르고.

칼리크는 정식 일정이 아니기 때문에 가벼운 옷차림으로 변복하기 위해 3층 제 방으로 서

둘러 올라갔다.

말을 타고 내내 달려오면서도 괘씸함만이 가득했다. 파티는 안 한다니 다행인데 매일 밤

축제를 보러 쏘다닌다는 걸 알고 있는 그로서는 마음이 안 놓였다. 누구 다른 놈이 눈에 들

어왔나? 의심이 안 갈 수가 없었다. 아니면 뭐 하러 매일 그리 돌아다니겠나. 가만 안 둘

테다.

하지만 그녀를 찾아 돌아다니다 어렵게 발견하고는 조금 뒤에서 지켜보았다. 다른 사람이

었다면 수수한 차림의 그녀를 찾지 못했겠지만 칼리크는 질끈 묶은 빨간 머리와 앉아 있

는 뒷모습만으로도 바로 알아차렸다.

그런데 가만히 앉아 있기만 했다. 뭘 저리 보는 거지? 뭘 하는 건지 몰라 잠시 그녀를 관찰

했다. 사실 무슨 꿍꿍이가 있는 것인지 알고자 했다. 그러다 사내들이 다가와 수작을 부리

길래 나서게 된 것이다. 그저 눈에 힘만 주었을 뿐인데알아서 사라져 주었지만.

그런데 벨리타가 달려와 자신을 안았다. 그러자 괘씸함이고 뭐고 다 날아가 버렸다. 이제

야 즐거워지고 미소가 지어졌다.

“좋겠네. 못생겼다는 말도 들어 보고.”

이렇게 놀릴 수도 있고. 이게 사는 맛이지. 미소가 떠나가질 않았다.

벨리타는 그가 무슨 말을 하든가 말든가 신경 쓰지 않았다. 그까짓 못생겼다는 말이 뭐가

대수인가.

“뭐 하러 토끼 가면을 쓰고 있어?”

칼리크는 손을 뻗어 그녀의 얼굴에서 가면을 벗겨 냈다.

헉!

“눈이 왜 이래?”

퉁퉁 부은 눈꺼풀 때문에 그녀의 눈동자가 거의 보이지 않았다. 보이기는 하는 건가?

“얼굴이 어떻게 된 거야?”

어두운 색으로 덧칠한 얼굴은 하얀 살결을 가리려고 했다고 이해해도 눈썹을 왜 이 모양

으로 그렸는지, 아니면 붙였는지 사람 하나 버려 놓았다.

“못생긴 거 맞네.”

칼리크는 곱게 다시 토끼 가면을 그녀에게 씌워 주었다.

누구 때문에 눈이 이렇게 되었는데 놀려 먹기나 하고.

벨리타는 가면을 쓴 채 그를 향해 눈을 흘겼다. 하지만 눈이 하도 작아져 그는 알아차리지

도 못할 것이다. 이래저래 속상한 것투성이다. 아니다. 사실을 인정하자. 반가웠다. 덕분에

안 좋았던 감정의 구렁텅이에서도 빠져나오고. 그래도 얼굴에 표 나지 않게 굴자. 이것도

신경 쓸 필요 없다. 토끼 가면을 쓰고 있으니까.

“이거…라도 드시면서…….”

유모가 발 빠르게 시원한 음료를 두 잔 건네주고는 재빨리 자리를 피해 주었다. 유모도 좀

쉬어야 하니 이것도 다행이었다.

“아직도 구경할 게 남았나?”

그녀의 옆자리에 슬쩍 앉으며 노심초사했던 제 감정이 드러나지 않게 가벼운 말투로 물었

다.

그의 나무라는 듯한 말투에 이제야 깨달았다. 오늘까지 황궁으로 돌아가기로 했구나. 이

런. 에단한테 정신이 팔려서 까맣게 잊어버리고 있었다.

그래서 이렇게 잡으러 왔나? 괜히 좋았다 말았다. 아니다. 아무리 그래도 이런 수고를 한다

고? 명령만 내리면 된다. 이렇게 직접 오지 않아도 된다. 그의 마음이 이젠 보이는 것 같다.

본인은 인정 안 하겠지만. 그러니 더더욱 지금 그 안에 싹트고 있는 싹도 자르고 자신 안에

있는 싹도 잘라야 한다.

“돌아가려고 했어요.”

슬쩍 거짓말을 했다. 이 정도 했다고 벌받지는 않겠지.

“언제? 새벽이슬 맞으며 돌아오려 했나?”

그냥 입을 꾹 다물어 버렸다. 이 재미로 사는 남자라는 걸 재차 느꼈다. 그래도 기분이 나

빠지진 않았다. 큰일이다. 모질게 나가야 하는데…….

“저거 보는 것도 오랜만이네.”

갑자기 다른 말을 하는 칼리크를 쳐다보다 그가 보고 있는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몇 개의 놀이 기구 같은 것이 있는 곳이었는데 10명 정도 태운 커다란 마차같이 생긴 것이

공중에 떠서 좌우로 왔다 갔다 하는 것이었다. 바이킹 같은 원리인가 본데 훨씬 작고 약해

보였다. 그곳에 탄 사람들이 즐거운 비명을 지르며 좋아하는 모습이 칼리크의 흥미를 끌었

나 보다.

“황태자 때였는데…… 20년은 된 것 같네.”

그가 추억을 더듬는지 표정이 부드러워졌다. 어렸을 때를 회상하나 보다. 부모님을 생각하

는 걸까? 그가 아련한 추억에 젖어 드는 것 같았다.

“저거 우리도 탈까?”

애예요? 보기만 해도 무서워 싫어요. 지금 다른 걸로 무서운 판에 저것까지 뭐 하러 타요?

고개를 강렬하게 저었지만 그가 잡아끄는 바람에 강제로 끌려가 버렸다.

***

하하하.

웃음이 나와서 당신은 좋겠네요.

안전해 보이지도 않는 놀이 기구를 타고 내려와 그녀는 바로 휘청거렸다. 그가 얼른 부축

해 주지 않았으면 땅 위에 주저앉을 뻔했다. 조금 떨어진 풀밭에 앉으며 숨을 골랐다. 어지

럽고, 속도 뒤집히고 머릿속까지 어질어질했다. 다신 안 탄다.

“약골이네.”

그의 놀림에 이골이 났는지 이젠 무뎌졌다.

“내 명령을 어긴 벌이야.”

말도 참 잘해. 웃는 얼굴도 참 멋지고. 못 하는 게 뭐야?

그렇게 잘난 사람이 왜 이리 일찍 죽어?

그가 즐거워 웃는 모습을 바라보며 그녀는 갑자기 기분이 가라앉았다.

당신이 안 죽었으면 좋겠다. 그렇게 웃으며 오래오래 살면 얼마나 좋을까?

“귀가 먹먹해. 하도 옆에서 비명을 질러 대서. 하하하.”

마음껏 놀려도 좋으니 죽지 말았으면 좋겠다. 당신이 죽지 않는 방법이 있지 않을까?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뭐 없을까?

“이런. 가면이 찢어졌네? 너무 놀랐나?”

그녀가 걱정된다는 얼굴로 가만히 이마에 손을 갖다 대었다. 열이 없는 걸 확인하고도 손

을 거두지 않고 놀이 기구 때문에 흐트러진 그녀의 머리카락을 다정히 매만져 주었다. 그

것도 생각보다 오래 매만져…… 아니 거의 쓰다듬고 있었다.

가까이 다가와 있는 그와 두 눈이 마주쳤다. 오늘따라 그의 황금빛 눈동자가 다정하게 보

였다. 가슴이 아렸다. 이런 남자가 유클로 왕국과의 전쟁에서 패하고 돌아와 결국에는 죽

음을……. 아!

“칼리크. 유클로와의 전쟁. 꼭 해야 해요?”

그가 폭군이 되고 죽게 되는 모든 것의 시발점. 유클로와의 전쟁. 이것을 막으면 그의 예정

된 죽음도 비켜 가지 않을까?

“무슨 소리지?”

다정했던 눈동자가 다시 엄격하게 번쩍였다. 못마땅하다는 기색이 역력한 시선을 그녀에

게 던졌다.

“안… 하면 안 돼요? 그냥 거기 제외하고 이 제국만 다스리는 건….”

“그만하지?”

그가 무섭게 보는 바람에 절로 입을 다물었다. 더 이상 말할 수조차 없었다. 이 방법은 안

되나 보다. 예전 같으면 ‘저라도 펠론국에 잠시 다녀와도 될까요?’ 뭐 이러면서 혼자 살 궁

리를 했을 텐데 그런 말도 나오지 않았다.

여기로 빙의해 처음에는 그 생각을 했었다. 그 옆에 있다간 저도 죽을 것 같으니 잠시 피신

해 있자고. 그때는 칼리크와 아무 상관이 없는 사이였다. 그가 죽든 말든. 하지만 지금은

달라졌다. 그가 죽게 내버려 두고 싶지 않았다.

“몸은 괜찮아졌어?”

다시 그의 눈빛이 다정함으로 돌아왔다. 이렇게 자신을 바라볼 줄도 알고. 그 역시 처음보

다 많이 달라졌다.

당신을 살릴 수 있는 방법이 없을까? 원작을 아는 사람은 나밖에 없다. 그 안에 길이 있지

않을까?

이제야 깨달았다. 자신이 이곳에 온 이유를. 혼자서 살기 위해 바빴던 그녀는 상황이 달라

지자 다르게 생각하기 시작했다. 그동안 도망치려고만 했는데 그게 아니었다. 그를 살리는

길이 자신도 사는 길이다. 방법이 있을 거야.

그녀의 눈빛이 살아나기 시작했다. 원작을 바꿀 힘은 전혀 없다고 시도는커녕 생각조차 안

하고 있었다. 제 생각이 완전히 틀렸다. 어쩌면 말이다. 그 힘이 자신한테 있을지도 모른다.

찾아야 한다.

그의 손길이 다시 느껴졌다. 자신의 근처만 오면 늘 이렇게 만지고 싶어 하는 그를 바라보

며 결심했다.

모질게?

하!

안 되는 걸 억지로 한다고 그게 될 것 같은가? 무리다. 불가능하다. 그러니 찾자. 꼭 찾고

말 테다.

벨리타는 칼리크의 얼굴에서 저 멀리 보이는 에단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이렇게 가까이

있는 두 사람이 나중엔 적이 된다. 이걸 막아야 한다. 에단 손에 죽지 않게 막을 방법을 찾

아야 한다. 아……. 갑자기 생각을 바꾸니 머릿속이 어지러웠다. 뭐 하나 제대로 된 생각이

떠오르지 않았다.

“우리 이제 그만 돌아갈까? ”

“어디로요?”

멍청한 질문이었던 건가? 칼리크의 얼굴이 바로 찌푸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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