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폭군에게 찍힌 민폐 황후 입니다-48화 (48/130)

48화 저 남자 손에 칼리크가 죽는다

저렇게 힘 하나 없어 보이는 사람이 그 에단일 리 없다. 아니다. 그건 모른다. 원작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따르는, 멋있고 리더십 탁월한 에단이라고만 나와 있었다. 이 남자가 그 에

단이 맞다면…… 그가 주인공이다. 이 소설에 나오는 원래 남자 주인공.

손이 바르르 떨렸다. 자칼단의 우두머리가 이 남자? 외모가 다는 아니지만, 원작 표지에 그

려진 남주 그림하고 전혀 매치가 되지 않았다. 맞을까? 아닌 걸까?

원작에서 로카 왕국이 쳐들어와 폭군으로 날뛰는 황제 아래 나라가 황폐해지고 국민들 원

성이 높아지자 의롭게 일어선 의병 자칼단. 그 무리를 이끄는 우두머리가 ‘에단 스톤’이었

다.

정확히 기억한다. 왜냐? ‘돌덩이처럼 단단해서 스톤이구나 ’이러면서 읽었기 때문에 틀릴

수가 없다. 여주 이름은 레이나인데 주근깨투성이 얼굴은 기억나고 성은 기억이 안 난다.

하지만 남자 주인공은 정확하다. 문제는 이 남자가 맞는지 아닌지였다.

“유모? 뭐 하나만 확인해 줄래요?”

언제나 만능키인 유모에게 또 부탁을 했다. 자신이 직접 확인하면 이상하게 생각할 터이니

중년 부인인 유모에게 신중할 것을 당부하며 부탁할 말을 전했다.

유모가 빠르게 다가가는 걸 숨죽이고 지켜보는 벨리타의 손에 땀이 다 나기 시작했다. 멀

리서도 고개를 끄덕이는 남자의 모습이 보였지만 유모의 확실한 말을 기다렸다. 유모가 다

시 돌아오자 심장이 사납게 쿵쿵 뛰었다. 숨이 막힐 정도로 뛰는 제 가슴을 손으로 지그시

누르며 유모의 대답을 기다렸다.

“맞대요. 그런데 어떻게 아셨어요? 저 남자 이름을?”

휘청.

다리의 힘이 다 풀렸다. 유모가 급히 그녀를 부축했다. 주변에 있던 기사들이 움직이려 하

는 걸 벨리타가 손을 들어 제지했다. 괜찮다. 충격을 받은 것뿐이다.

겁나는 시선을 에단에게 던진 뒤 빠르게 뒤돌아 그 자리를 벗어났다. 걸음이 점점 더 빨라

졌다. 그녀를 부축하며 따라오는 유모가 옆에서 헐떡거릴 정도로 빠르게 움직였다.

무서웠다. 두려웠다. 손발이 바들바들 떨려 왔다. 눈앞이 하얘지며 어지럽기까지 했다.

저 남자 손에 칼리크가 죽는다. 그가 들고 있던 저 도끼 같은 칼에 죽을지도 모른다. 아까

보니까 그 무겁고 큰 칼을 아주 자유자재로 휘둘렀다. 그 깡마른 체격에도 불구하고. 아이

러니하게도 원작에서는 칼리크가 로카 왕국이나 배신자의 손에 죽는 것이 아니라 의병으

로 일어선 자칼단 우두머리인 에단의 칼에 죽음을 맞이한다고 되어 있었다.

방금 칼리크를 죽이는 남자를 보았다. 그것만큼 무서운 것이 없었다. 어쩌면 저 손에 자신

도 죽을지도 모른다. 그건 아무도 모른다. 저 선량해 보이는 남자가 그런 무시무시한 일을

해내는 사람이었다니. 일단 여기서 도망치는 게 급선무였다.

***

유모는 갑자기 쓰러지려 하시는 마마를 모시고 급하게 파오로 돌아오자마자 늘 가지고 다

니는 약 중 진정 효과가 있는 걸 차가운 물과 마시게 했다.

소파에 기진맥진 쓰러져 있는 마마에게 다가가 손발을 주물러 주는 유모는 걱정이 되어

발을 동동 굴렀다. 원래 어렸을 때부터 몸이 약해 보약이란 보약은 다 만들어 먹이고 있는

데 며칠 무리하시더니 그 증상이 또 나오셨다. 괜히 축제에 가자고 부추겼나 싶어 죄책감

마저 들었다.

벨리타는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축제고 뭐고 즐길 기분이 전혀 아니었다.

아… 칼리크.

칼리크가 죽는다는 게 이제 실감이 났다. 그 사실은 알고 있었지만 이 정도로 체감하지 못

하고 있었다. 온몸으로 번진 떨림이 멈추질 않았다.

불쌍한 칼리크.

왜 그렇게 비참하게 죽는 인물인지.

이젠 눈물까지 흘러내렸다. 이미 알고 있었던 사실인데 왜 지금은 눈물이 나는지 모르겠

다. 게다가 자신도 죽을 수 있다는 것이 두려워졌다. 그런 그녀의 모습에 큰일이 난 줄 안

유모가 발을 동동 굴렀다. 벨리타는 유모가 이끄는 대로 침대에 누워 안정을 취하려 했지

만, 절대 편안해질 수가 없었다. 그렇게 밤새 눈물이 그치지 않고 계속 흘러내렸다.

***

유모의 어마어마한 염려를 물리치고 다음 날도 축제 하는 곳으로 움직였다. 한숨도 자지

못하고 날이 밝자 벨리타는 계속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하지만 아무 생각이 나지 않았다. 두려움에 갇혀 버린 머릿속으로는 뭘 어떻게 해야 할지

잘 떠오르질 않았다. 그게 미칠 노릇이었다.

밤이 되기만을 손꼽아 기다린 벨리타는 또다시 채비를 했다. 유모가 간곡하게 말리는데도

말을 듣지 않았다.

유모. 사실대로 말 못 해서 미안하지만 지금 말린다고 될 문제가 아니에요.

그녀의 발걸음은 푸줏간 앞에서 멈추었다. 어제와 같은 풍경. 사람들이 줄지어 서 있고 호

탕하게 웃으며 고기를 썰어 팔고 있는 에단의 모습.

보고만 있어도 가슴이 저렸다. 쓰렸다. 실제로 쿡쿡 찌르는 듯한 통증마저 느껴졌다. 하

아……. 근처 나뭇등걸에 앉아 눈으로는 에단을 쫓으면서도 입으로는 연방 한숨만 땅이 꺼

져라 내쉬었다. 자꾸 슬퍼졌다. 괴로워졌다. 에단이 환하게 웃으면 웃을수록 그 미소가 비

수가 되어 그녀의 가슴에 푹푹 박혔다.

칼리크를 처참하게 죽일 사람이 저렇게 웃고 있으니 괴로웠다.

에단의 웃는 얼굴 위로 피 흘리며 죽어 가는 칼리크의 얼굴이 겹쳐 보였다. 거기에 자신의

죽어 가는 얼굴도.

이젠 그가 원망스러워졌다. 끔찍하게도 싫어졌다. 말 한번 붙여 본 적 없는 낯선 남자지만

그냥 다 미웠다. 두려움보다 미움이 더 커져만 갔다. 속이 다 부글부글 끓어올랐다. 제 속

을 안다면 저 에단은 기가 막히겠지만 모든 걸 다 알고 있는 벨리타는 어쩔 수 없었다. 그

녀가 쥐고 있던 작은 손가방이 이리저리 비틀리고 있었다.

“어이. 토끼 아가씨. 계속 봤는데 며칠 동안 둘이서만 다니고 있네?”

누군가 다가와 말을 걸었지만 벨리타의 귀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에단에게 집중하고 있느

라 누가 다가온 줄도 몰랐다. 놀라 펄쩍 뛰는 유모와는 달리 아무런 표정도 짓지 않고 멍해

있는 그녀가 그들에게는 더 신기했던 모양이다.

“마… 아가씨……. 우리 저쪽으로 가요.”

유모가 얼른 호칭을 바로 바꾸며 그녀의 팔을 잡아끌었다.

“아가씨. 우리 같이 즐기자고.”

“일없네. 다른 데 가서 알아보게.”

그래도 유모가 다가온 남자 둘에게 위엄 있게 나섰다. 잠시 실랑이가 벌어졌다.

“우리 저쪽으로 같이 갈까?”

누군가 제 손목을 잡았다. 옆에서 유모가 악, 소리를 내며 짧은 비명을 질렀다. 주변에서

기사들의 움직임이 포착되었지만 또 벨리타는 손으로 제지했다. 주춤거리는 기사들이 불

안한 표정으로 지켜보고 있다는 것 또한 알지만 신경 쓰지 않았다. 그냥 다 귀찮았다.

“놔!”

유모는 이 정도로 무섭게 들리는 마마의 목소리는 처음 들어 봤다. 악을 쓰며 다 뒤집어 놓

는 건 보았어도 이렇게 단 한 마디로 사내들을 주춤거리게 만드는 건 한 번도 본 적이 없

었다.

벨리타는 제 팔을 잡은 사내의 힘이 빠지자 바로 비틀어 손을 빼냈다.

“귀찮아.”

그녀의 목소리가 무겁게 그들에게 던져졌다. 그러고도 그녀는 여전히 에단 쪽을 쳐다보며

멍하니 앉아 있었다.

잠시 주춤하던 두 사내는 픽, 웃으며 그녀의 그런 행동을 가볍게 여기고 한 발 더 가까이

다가왔다.

“이봐. 그러지 말고…….”

다가오던 사내 둘이 갑자기 모든 동작을 멈추었다.

벨리타는 그들이 왜 그러는지 관심에 없었다. 그냥 빨리 사라져 줬으면 좋겠다.

“너…가 이 못…생긴 여자의 애인이냐?”

한 사내가 말까지 더듬으며 그녀의 뒤를 향해 그 말을 던졌다.

내 뒤에… 누가… 있나?

그래도 관심 사항이 아니기에 눈도 돌리지 않았다.

두 사내는 바로 방향을 바꿔 부리나케 그 자리에서 튀었다. 기 싸움에서 밀린 두 사내의 발

걸음은 점점 빨라졌다. 눈빛 하나만으로도 사람을 짓눌러 버리는 사람이 있다니, 잘못 걸

리면 큰일 난다.

“카르탄 제국 최고의 미녀에게 못생겼다니?”

앞만 보고 멍하니 있던 벨리타의 귀에 환청이 들렸다. 이상하다. 왜 칼리크의 목소리가 들

릴까? 너무 생각해서 그런가.

“폐…폐하.”

이번에는 유모의 떨리는 목소리가 들렸다. 폐…하?

벨리타는 천천히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칼…리크?

당신이 왜 여기에…….

믿어지지가 않았다. 황궁에 있어야 할 사람이 왜 여기에 나타났는지. 정말로 칼리크인가?

그 불쌍한 칼리크?

헉!

칼리크는 그저 놀라서 할 말을 잃었다. 벨리타가 벌떡 일어나더니 자신에게 뛰어와 그냥

부둥켜안았기 때문이다. 그녀가 먼저 자신을 안은 일은 처음이다. 무슨 일이 있었나? 방금

저놈들은 쫓아냈는데 또 다른 일이 있었던 건가? 그럴 리 없다. 기사들이 눈을 떼지 않고

그녀를 지키고 있는데 무슨 일이 일어났을 리 없다.

“벨리타?”

그래도 자신을 꼭 끌어안고 미미하게 몸까지 떠는 그녀의 상태가 심히 걱정되었다. 어디

아픈가?

“정말… 칼리크, 당신이에요?”

그럼 나지. 누구겠어? 아무하고 이렇게 부둥켜안고 있었다가는 내가 가만 안 있지.

칼리크는 말없이 그녀를 더 꼭 안아 주었다. 이제야 숨이 제대로 쉬어졌다.

곁에 있던 유모가 이미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렸고 기사들도 마찬가지였다.

정말 칼리크다…. 아!

갑자기 정신을 차린 벨리타는 서서히 지금의 상황을 인지했다. 후다닥 몸부터 떼어 냈다.

내가 지금 무슨 짓을 한 거지? 스스로 다가가다니.

하지만 조금 전엔 그럴 수밖에 없었다. 변명 같지만 제 감정이 혼란스러웠고 그의 등장에

놀라서 그랬던 것뿐이다. 그도 그렇게 알면 좋을 텐데.

칼리크는 갑자기 제 품에서 떨어진 벨리타가 다시 쭈뼛거리는 모습으로 돌아가자 바로 알

아차렸다.

그렇게 내가 보고 싶었나? 그리웠나?

얼떨결에 안아 놓고 제 마음을 들켜 버려 이제 와서 부끄러워진 거다. 틀림없다.

칼리크의 입술이 한쪽으로 치켜 올라갔다. 삐뚜름한 미소가 지어졌고 그의 황금빛 두 눈이

반짝거렸다. 갑자기 즐거워졌다. 그래. 이 맛이 없으니 황궁에서 지겨웠던 거다. 이제 그 생

활도 끝이다.

아직도 믿기지 않는 눈으로 벨리타는 눈앞에 있는 칼리크를 훑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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