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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군에게 찍힌 민폐 황후 입니다-47화 (47/130)

47화 내 장난감은 뭐 하고 있나

“어…떻게 그런 걸 할 줄 아세요?”

이런 흥정을 처음 하는 사람 같지 않게 너무 능숙하게 잘 해냈다. 믿어지지가 않았다. 이런

것도 할 줄 아신다고? 어떻게 알고?

“그냥… 흉내 한번 내 봤어요.”

유모가 많이 놀랐나 보다. 너무 보여 줬나.

유모는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흉내라니……. 이런 걸 보셨어야 흉내도 내지. 언제 보셨다고.

“유모 하나 들고 나 하나 들고.”

커플 백을 하나씩 들고 다시 걸으며 벨리타는 기분이 좋아졌다. 유모도 대충 넘어갈 것이

다.

하지만 유모는 대충 넘어가지 않았다. 기억을 잃으신 것이 아니라 전혀 다른 사람이 되신

것 같아 자꾸 마마의 얼굴을 들여다보고 또 들여다보았다. 그런데 좋았다. 이러시는 게 좋

았다. 뒤늦게 철이 나시는 건가. 아휴. 이뻐라.

유모는 마마를 꼭 끌어안았다. 이런 거 싫어하시는 분인데 왠지 지금은 허락해 주실 것만

같았다.

유…모?

갑자기 자신을 끌어안고 머리에 뽀뽀까지 하는 유모를 올려다보았다. 아휴. 이뻐, 소리를

연달아 날리며 유모가 마치 어린아이한테 하듯이 애정 표현을 해 댔다. 어린 시절 이렇게

이뻐해 주었을 것이다. 정말 사랑해 주는구나. 무조건적으로. 벨리타는 유모의 큰 사랑을

느끼고 가슴이 찡해졌다.

“이번엔 제가 이거 사 드릴게요.”

두 사람은 여전히 서로의 귀에다 속삭이며 말을 주고받았다.

어?

토끼 모양 반가면이었다. 귀여웠다. 그러고 보니 축제라 그런지 많은 사람들이 이런 가면

을 쓰고 돌아다녔다. 더 재미있어졌다.

자신이 사 준 싸구려 가면을 쓴 마마님이 너무 귀여웠다. 이런 것도 선뜻 하시고. 털털해지

셔도 너무 많이 털털해지셨다. 이것도 좋다. 사실 아무리 색칠하듯 얼굴을 어둡게 했어도

불안했다. 누군가 고귀한 분이라는 걸 알아볼까 봐. 그래서 가면 가게를 찾아 얼른 씌워 드

렸더니 조금은 안심이 되었다.

그렇게 두 사람은 손을 꼭 잡고 여기저기를 구경하며 막대 사탕까지 먹었다. 그러면서 이

번에는 벨리타가 종이에 뭔가를 열심히 적었다. 그렇게 2시간 남짓 축제 첫날밤을 근사하

게 보낸 벨리타와 유모는 함박 웃음꽃을 피운 채 파오로 돌아왔다.

“마마. 내일 점심때쯤 돌아갈까요?”

아. 잊고 있었다. 시무룩한 상태에서 내일은 그만 돌아가야겠다 말한 것을.

어떻게 나온 황궁인데 함부로 돌아갈 수야 없지.

“아니요. 우리 더 있어요. 오늘처럼 축제를 즐기고 싶어요.”

유모는 충분히 이해가 되어 고개를 끄덕였다. 이런 날만 계속된다면 무슨 걱정과 시름이

있겠나. 마마님도 이렇게 행복해하시고. 물론 자신도 즐거웠다. 행복했다.

“근데 뭘 적으신 거예요?”

유모가 궁금해할 줄 알았다.

“짐마차에 양탄자 몇 개 가져왔죠?”

“5개 정도요. 이 파오 안에 깔려고 가져왔으니 그 정도 있어요.”

이 파오 안에… 남자들을 불러 파티를 하려고 이것저것 가져온 것이 마차로 여러 대였다.

그것이 이젠 하등 쓸모가 없어졌지만.

“그건 왜요?”

그제야 벨리타는 유모에게 자신이 적은 종이를 건넸다.

다시 한번 유모의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빽빽이 적힌 종이에는 양탄자를 야외 공연하는

곳에 다 깔아 줄 것, 이라고 맨 윗줄에 적혀 있었다.

잠깐 연주를 들으려 앉은 야외무대에 바닥이 너무 울퉁불퉁해 앉아 있기가 불편했는데 다

른 이들을 위해 양탄자를 그쪽에 기부한다고 하신다. 그 고급스럽고 두꺼운 양탄자 5개를

깔면 너무 편안하고 근사한 공연장이 될 것이다. 또 있었다.

파티에 쓸 테이블과 의자들은 간이음식점, 주로 영세한 음식점이나 가게에 몇 개씩 나눠서

기부하고 손가방을 산 주인에게 소파 하나를 주라 하신다. 계속 서서 있던 것이 마음에 걸

렸다 하시며. 또 어둠을 밝힐 촛대들도 하나씩 다 증정해 주고 넘치게 가져온 식기들도 다

나눠 주고 오라 하신다. 그러고도 몇 개 더 있었다.

세상에. 이런 것까지 언제 면밀히 살피셨나. 모르던 면모가 끊임없이 나오신다. 이렇게 되

면 짐마차가 거의 다 비게 되는데…….

“뭐 하러 무겁게 다시 가져가요? 더 필요한 사람들에게 나눠 주세요. 어차피 이젠 필요도

없어요.”

파티 같은 건 안 할 거니까.

유모는 또다시 먹먹한 가슴을 안고 고개를 끄덕였다. 가져온 걸 다 나눠 주고 가면 그 넓던

2층 창고가 절반 정도는 비워지게 된다. 사실 2층 창고로 물건이 들어가면 다시 꺼내 쓴

적이 없었다. 언제 찾으실까 싶어, 또 버리지 말라 하셔서 보관만 할 뿐, 다시 찾으신 적도

없으셨다. 늘 새것을 주문하고 사시는 바람에.

또 바빠질 유모였지만 이번만큼은 힘이 났다. 이런 일로 바쁘다면야 매일매일 쏟아져도 행

복하겠다. 유모는 마마의 파오에 마련된 다른 침상에서 잠을 청했다. 파티가 있었다면 이

런 혜택도 못 누렸을 것이다. 파티가 밤새 열리니까. 밤인데도 이렇게 조용한 파오 안에서

단둘만이 잠을 청하니 세상 고요하고 편안했다.

벨리타는 너무 평화로웠다. 멀찍이 떨어져 있어도 같은 파오 안에 가장 믿는 유모가 누워

있고 풀벌레가 찌르르 우는 소리가 들릴 정도로 조용하고 평온했다. 언제나 제 수족이 되

어 움직여 주는 유모에 대한 고마움이 한없이 커졌다.

“유모. 항상 고마워요.”

벨리타는 경험해 보니 더 절실히 깨달았다. 고마움과 감사는 빨리 전해야 한다는 걸. 한번

죽어 보니 알겠다. 내일, 다음에 이러면서 미뤘다간 제 꼴 난다.

따뜻하고 살갑게 들리는 마마님의 저 목소리에 기어코 유모는 눈물을 터트렸다. 제가 더

고맙습니다. 마마.

두 사람에게는 잊지 못할 편안하고 행복한 밤이었다.

***

다음 날은 시녀들도 다 자유롭게 즐기라고 같이 나가 제각각 흩어졌다. 그들에게 100실버

씩 건네주었다. 그동안 고생했는데 마음껏 즐기라고. 그들도 귀족 영애라 돈은 풍족했겠지

만, 그녀가 주는 것은 의미가 특별했다. 그동안 모시면서 뭐 하나 받아 본 적이 없던 시녀

들의 표정에 감동이 어렸다. 아마도 그 돈을 고이 간직할 듯한 얼굴이었다.

즐거운 시간은 왜 이리 빨리 지나가는지 그렇게 하루가 후딱 또 지나가 버렸다. 황후라는

이름을 떼어 버리고 나자 이곳 사람들이 순하다는 걸 알았다. 치안도 제법 잘되어 있는 것

같았다. 칼리크가 통치를 제법 잘해 놓았구나, 칭찬도 날렸다.

그러고 보니 칼리크는 뭐 하고 있나……. 문득 그가 궁금해졌다. 같이 있을 땐 그렇게 떨어

지고 싶더니 지금은…. 사람 마음 참 묘하다.

그냥 떠올려 본 거라고 속으로 박박 우겼다. 싹을 자르기로 마음먹은 이상 모질게 나갈 것

이다. 벨리타는 잡생각을 털어 버리려는 듯 머리를 한두 번 흔들고는 다시 유모와 손을 잡

고 달빛 아래를 걸어 파오로 돌아왔다. 이제야 이곳의 공기도, 달빛이 환한 밤하늘도, 풀

내음 꽃 내음도 제대로 느껴졌다.

***

칼리크는 늦은 밤인데도 여전히 집무실에 앉아 있었다. 눈이 피곤해져 잠시 들고 있던 서

류를 내려놓고는 휴식을 취했다.

이틀이다.

벨리타 없이 지낸 지.

잠도 잘 안 오고 식욕도 없어졌다. 놀림감이 없어진 것뿐인데 이렇게 영향을 받다니, 제 꼴

이 좀 우스워 보였다. 갖고 놀던 생쥐를 잃어버린 고양이 심정이랄까. 이런 비유가 스스로

도 웃겼다.

피식, 웃음을 터트린 그는 다시 서류를 집어 들었다. 당장 급한 일도 아닌데 스스로 자처해

일에 파묻혀 살고 있다. 이틀 내내 그랬다. 누가 보면 두 달은 이렇게 산 것처럼 보일 정도

로 기운이 쭉 빠졌다. 시종장을 비롯해 데인까지 걱정을 하고 난리를 칠 정도였다. 이거야

원.

그런데 내 장난감은 뭐 하고 있나. 매일 보고받은 거로는 얌전히 있다고 하는데. 그 좋아하

는 파티도 없이. 사실 벨리타가 자신의 눈을 피해 황궁 밖으로 나가면 당연히 예전처럼 즐

길 거라 생각했다.

그런데 그걸 안 한단다. 물론 기분이 좋아졌다. 계속 뭔가 찜찜했는데 기분이 가벼워졌다.

딱 그거다. 내 장난감. 나만 놀릴 수 있고 괴롭힐 수 있는. 누구하고도 공유하기 싫은 내 장

난감. 이러니 살짝 영향은 받은 것이다. 그러니 문득문득 떠오른 거고. 절대 그리운 건 아

니다.

하아….

왜 지금 자신의 입에서 한숨 소리가 새어 나왔는지 모르겠다. 그냥 재미도 없고 하루하루

가 지루했다. 그냥 그래서 그런 것뿐이다.

칼리크는 억지로 서류에 눈을 돌리며 점점 더 지루해져만 갔다.

***

3일째 되는 축제의 밤에는 재미없는 귀족들과의 만찬을 후딱 끝내 버리고 얼른 나와 온갖

상점들을 다 돌아다녔다.

물건을 구경도 하고 자잘한 것들은 구매도 했다. 먹고 마셔도 보고 유모와 신이 나서 돌아

다녔다. 어떻게 3일째 돌아다니는 건데도 이렇게 끊임없이 새로운 것들을 만나는지.

황궁으로 돌아가기 싫을 정도였다. 몰래 혼자 미소 짓던 벨리타는 푸줏간이라 쓰여 있는

곳으로 다가갔다. 유독 다른 곳보다 줄 서 있는 손님들이 많아서 흥미가 일었다.

키는 큰데 깡마른 남자가 도끼 같은 칼을 들고 고기들을 썰어 손님들에게 건네주고 있었

다. 벨리타는 덩치도 크고 좀 험하게 생긴 사람이 장사를 할 것 같다고 생각한 제 생각을

꾸짖었다. 무슨 이런 선입견을 갖고 있담.

그 남자는 입담도 좋고 서글서글하니 주변에 인기도 많을 인상이었다. 지나가는 사람들이

살갑게 손 인사를 하고 아는 척하는 걸 보니 친화력도 대단한 것 같았다. 괜히 부러웠다.

싸늘한 시선만 받았던지라 이렇게 사람들에게 둘러싸인 사람을 보니 부러워졌다.

한참을 보고 있다가 유모의 손에 이끌려 다른 곳으로 가려 몸을 돌렸다. 그때였다.

“에단. 여기가 제일 장사 잘되는구먼.”

그녀의 발걸음이 급히 멈추었다. 에…단?

몸을 휙 돌린 벨리타는 다시 그에게 더 가까이 다가갔다. 설마…….

혹시 동명이인이 아닐까 의심스러워 더 자세히 살피기 시작했다. 옆으로 따라온 유모의 눈

매가 예리해지는 건 알아차리지 못했다.

벨리타는 눈을 가늘게 뜨며 고개를 기울였다. 아닌 것 같은데…. 저렇게 힘 하나 없어 보이

는 사람이 그 ‘에단’일 리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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