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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군에게 찍힌 민폐 황후 입니다-46화 (46/130)

46화 황후가 아니면 되는 거 아닌가?

벨리타는 복잡한 생각에서 벗어나기 위해 그 생각은 차차 하기로 하고 먼저 해야 할 일을

떠올렸다.

“유모. 부탁 하나만 들어줄래요?”

유모는 잠시 풀이 죽어 있었다. 또 헛다리를 짚고 저 혼자 설쳐 댄 꼴이 되어 버렸다. 자신

이 마마에게 민폐를 끼쳤나 싶어 자책하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거렸다.

“내가 가면 기사단이 다 움직일 테니 유모가 몇 명만 데리고 갔다 와 줘요.”

벨리타가 부탁을 말하자 유모의 표정이 변했다. 그동안 달라지신 걸 가장 가까이서 지켜보

았지만, 이 정도일 줄은 미처 몰랐다. 그러니 지금 자신이 준비하려고 했던 파티는 완전 헛

짓거리였다. 폐하가 싫어졌다고 바로 다른 남자들을 만나려고 하지 않는다는 것도 처음 알

았고. 게다가 지금 하신 부탁은 전혀 상상도 못 한 일이었다.

“기사단에게 약자한테 무력 사용을 금지한다는 명을 전달하고 부탁하신 곳에 빨리 갔다

오겠습니다. 마마.”

어리둥절함과 가슴 뿌듯함을 함께 느낀 유모는 마마의 명을 받들기 위해 파오를 빠져나갔

다.

다시 혼자가 된 벨리타는 차분히 생각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장소가 바뀌니 좀 더 객관적

으로 정확히 판단할 수 있을 듯싶었다.

사실 바람도 쐬고 칼리크와 조금 떨어져 있고 싶었는데 왜 그러고 싶었는지 이젠 자신을

마주 봐야 한다. 계속 같이 있다간 위험하다는 생각뿐이었는데 그게 확실치가 않았다.

누가 누구한테 위험하다는 것인지. 겪어 본 바로, 칼리크는 강제로 자신을 어떻게 할 것으

로 보이진 않았고 첫날밤을 치르려고 하면 완강히 거부하면 될 일이었다. 그런데 뭐가 두

려웠던 걸까? 자신 안에서 뭔가 달라지는 걸 두려워한 걸까? 그럼 뭔가 달라지려고 하는

걸까?

이제 인정해야 한다. 자신이 달라지고 있다는 걸. 그것이 두려워 도망친 것이다. 미운 정도

정이라고 점점 그에게 끌리게 되었다. 처음엔 마냥 두려운 사람이었는데. 그건 제 목숨이

그의 손에 달렸으니 그렇게 된 것이었고 그것이 비껴가자 그가 오롯이 제 가슴 안으로 들

어오려 했다. 아니, 이미 들어와 있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큰일인 거다.

그도 그렇다. 자신을 재미로 놀려 먹고 즐거운 놀잇감 취급을 하다가도 묘한 눈빛으로 다

가온다. 이제는 그 눈빛에 어떤 진심이 담긴 거라고 믿고 싶어진다. 이것이 위험하다.

그와는 절대 안 된다. 엮여서도 안 되고 가까워져서도 안 된다. 억지로라도 거리를 두어야

한다.

그는 미쳐 날뛰는 폭군이 될 것이다. 아니 광군이 된다. 이번 전쟁에서 패한 뒤, 그 폭주가

시작된다. 그런 무시무시한 남자다.

게다가 곧 죽는다. 로카 왕국이 일으킨 전쟁 속에서 무참하게 죽임을 당한다. 그런 남자한

테 끌리면 절대 안 된다.

바로 인생 종 치는 일이다. 괴물로 날뛰다가 곧 죽는 남자를 마음에 담아서 뭐 하려고! 게

다가 원작대로 그 산속에서 죽지 않았지만, 폭군 옆에 있다가 언제라도 죽을 수 있는 인물

이 이 몸이다.

황제가 죽는다면 황후인 저를 살려 두진 않을 터. 그 전에 어디로라도 도망칠 궁리를 해야

지 지금 남자한테 빠지고 있을 때가 아니다. 이래서 고민스러웠나 보다. 이러지도 저러지

도 못하고.

막자. 자신의 마음도 막고 그의 마음도 막자. 그래야 산다.

벨리타는 지금 이 세계에서 가장 현명한 결정을 내렸다. 그런데 왜 이리 속이 쓰린 걸까?

마음도 무겁고. 아니다. 모질게 마음먹고 뭔가 싹이 자라고 있다면 과감히 잘라 내야 한다.

지금은 독해질 때다.

결정을 확실히 내렸건만, 머릿속이 뒤숭숭하고 마음도 어수선했다. 이럴 땐 몸을 움직이는

게 최고다. 하지만 점점 어두워지고 축제도 달궈지고 있는데 여기서 나갈 수는 없고. 내일

그냥 돌아간다고 해도 오늘 밤 여기서 꼼짝없이 갇혀 지내게 생겼다. 어쩐담.

여긴 황후로서 환영받지 못하는 곳. 지금 이대로는 한 발짝도 움직일 수 없……. 가만. 그럼

황후가 아니면 되는 거 아닌가?

갑자기 떠오른 묘안에 그녀는 빨리 유모가 돌아오기만을 손꼽아 기다렸다.

***

유모는 이 가족들 앞에서 마마의 혜안에 감탄하고 있었다. 반드시 믿지 못할 테니 이렇게

하라고 거기까지 미리 알려 주셨다. 그런데 딱 들어맞았다. 이런 분이었던가. 다 안다 생각

했는데 마마의 이런 면은 처음이다. 태어날 때부터 모셨던 마마인가 싶을 정도로 전혀 보

지 못한 면을 알게 되었다.

유모는 가족들에게 누구 한 명이 이 과일 바구니에서 아무거나 한 개 집으라 말했다. 아이

엄마가 여러 과일 중 사과를 집어 건네주자 시원하게 베어 물고는 맛있게 그들 앞에서 먹

어 보였다.

“자. 이제 독 같은 건 안 들었다는 게 증명되었죠?”

가족들도 그럴 만했다. 갑자기 누군가 찾아와서는 황후마마가 보냈다면서 과일 바구니를

들이미는데 이걸 누가 믿나? 채찍질 맞아 죽을 뻔했던 아이의 가족들은 곱게 돌려보내 준

그 사건도 믿을 수 없어 혹시라도 밤에 잡으러 쳐들어오지 않나 노심초사했었다.

아니나 다를까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기겁을 하며 아이의 엄마는 자리에서 주저앉았었다.

창문 밖으로 내다보니 황궁 기사들도 보이고 영락없이 잡으러 온 모양새였다. 울며불며 겨

우 문을 열어 주었더니 난데없이 그들 앞에 커다란 과일 바구니가 놓였다.

“아이가 홍시를 버려 먹지 못한 것이 마음에 걸린다고 하시며 황후마마가 보내신 선물입

니다.”

유모는 시키는 대로 잘 전달했다. 독이라도 들었을까 의심하는 가족들 앞에서 증명도 해

보였고. 여전히 어리둥절해 있는 가족들의 심정을 유모는 충분히 이해했다. 이러고 있는

유모도 어리둥절하기는 마찬가지였다.

그 집을 나선 뒤 마마에게 돌아가는 길이 그렇게 기분 좋을 수가 없었다.

***

“평범한 옷이요?”

유모가 미소를 지으며 파오로 돌아오자마자 마마가 기다렸다는 듯이 부탁을 하신다. 평민

처럼 변장하고 밖에 나가고 싶다고. 어떻게 해서든 원하시는 대로 해 드리고 싶었다. 없으

면 구해 오면 되지. 유모는 또 부리나케 밖으로 뛰어나갔다.

정말 유모는 못 하는 게 없는 능력자다. 유모의 손을 잡고 거리로 나선 벨리타는 자꾸 웃어

댔다. 이 상황에 기분 전환이 되었다. 그래. 우울하게 웅크리고 있으면 뭐 해. 나쁜 상황을

바꾸면 되지.

약간 큰 허름한 원피스를 입고 머리도 그냥 질끈 묶은 채 화장을 했다. 아니 분장에 가까웠

다. 어두운 색으로 얼굴과 드러나는 곳을 칠하고 눈썹을 아래로 처지게 그렸더니 아주 엉

뚱한 얼굴이 되어 버렸다.

그냥 평범하다 못해 바보처럼도 보였다. 거울을 들여다보고 한참을 웃었었다. 이렇게 얼굴

이 변할 수도 있다니. 오래간만에, 아니 어쩌면 빙의한 후 처음으로 크게 소리 내어 웃어

보았다. 기분이 괜찮았다.

유모는 가슴이 뻐근해졌다. 마마가 어릴 적 외에는 이렇게 손을 잡고 걸어 본 적이 없었다.

마치 그때로 돌아간 듯한 착각이 일었다.

자신을 보며 해사하게 웃는 마마가 제 눈에는 너무 귀엽게 보였다. 아무리 어둡게 얼굴을

칠하고 변장을 했다고 해도 보석처럼 빛나는 파란색 눈동자와 우아한 걸음걸이에서 격이

느껴졌다.

귀한 사람이라는 분위기가 여전히 풍겼지만 다른 사람들은 못 알아보기를 바랐다. 사람들

이 눈치 못 채게 기사들이 두 사람을 보호하며 걸어가고 있으니 큰 문제는 일어나지 않을

것 같았다.

마마가 두리번거리며 마냥 신기해하는 모습이 낯설었다. 이런 서민들 축제에 관심도 두지

않으셨을뿐더러 구경 같은 건 아예 귀찮아하셨다.

오로지 관심은… 이번에는 취소했지만 파오에서의 파티에 집중하셨는데 그걸 마다하고 거

리로 나오셨다. 그것도 이런 차림으로. 죽었다 깨어나도 상상할 수 없었던 마마의 모습이

었다.

얼마나 더 놀라운 모습을 보여 주시려고 이러시는지. 그냥 가슴이 먹먹해졌다. 지금 여기

에 그 아이만 같이 있으면 금상첨화일 텐데…. 그 아이도 이런 축제 좋아하는데…. 그것 하

나가 아쉬웠다.

“유….”

아니다. 여기서는 유모라고 부르지 않기로 했다.

“이거 카넬 부인한테 어울리겠어요.”

벨리타는 손으로 만든 작은 손가방을 가판에서 들어 올렸다.

“제… 아니 내, 내 거요?”

에효. 호칭과 존칭을 바꾸려니 말하기가 여간 불편한 게 아니었다. 유모는 최대한 작게 말

하자고 마마에게 속삭이고는 평상시대로 말하기로 정했다.

“괜찮아요. 마마 거 사세요.”

“아니에요. 내가 사 주고 싶어서 그래요.”

“어휴. 저한테까지 왜 돈을 쓰세요?”

“그럼 누구한테 써요? 돈은 가장 고마운 사람한테 써야죠.”

울컥한 유모는 두 눈에 물기가 고이기 시작했다. 어쩜 말도 이리 감동스럽게 하신담. 주변

사람들을 신경 쓰는 마마가 아니었는데. 그래도 저를 믿고 의지하는 것만으로도 감사했는

데. 신경질적인 분이지만 유모에게는 둘도 없이 소중한 분이다.

“아가씨. 이거 10브론즈에 줄게.”

친절한 목소리로 다가온 여주인이 물건을 만지작거리는 벨리타에게 가격을 불렀다.

“10브론즈요?”

벨리타는 비싸다는 표정을 지었다. 사실 여기 물가를 모른다. 하지만 예전 세상에서 물건

살 때 흥정하던 일을 떠올렸다. 여기도 비슷하지 않을까 싶었다.

“왜 비싸? 이거 일일이 내가 다 만든 거야.”

“그래도….”

시무룩한 표정으로 조금 시간을 끌었다. 사고는 싶은데 비싸다는 표정으로. 그런 벨리타의

얼굴을 옆에서 유모가 신기한 듯이 눈도 떼지 않고 쳐다보고 있었지만 신경 쓰지 않았다.

“에이. 그래 알았어. 순진한 아가씨라 8브론즈에 해 줄게. 더 이상은 안 돼.”

웃음이 나오려는 걸 애써 참았다. 순진한…. 벨리타로 빙의해 처음 들어 보는 소리다. 물론

변장은 했지만. 순진은커녕 악명 높기로 유명한데 그런 말을 들으니…… 좋기는 했다.

“그럼 이거랑 두 개 살 테니 15브론즈에 해 줘요.”

옆에서 유모의 입이 쩍 벌어졌다.

“이거 순진한 줄 알았더니 순 깍쟁이네. 알았어. 내가 선심 썼다.”

물건을 받으며 좋아하는 마마의 모습이 유모에게는 마치 처음 보는 사람 같았다.

“어…떻게 그런 걸 할 줄 아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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