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폭군에게 찍힌 민폐 황후 입니다-45화 (45/130)

45화 이럴 줄 알았다

마차로 돌아가는 그녀의 어깨가 처지고 발걸음이 무거웠다. 숨소리 하나 들리지 않을 정도

로 조용해진 주변이 자신을 짓눌렀다.

“옷이야 갈아입으면 돼요.”

뭐라고 한마디 할 것 같은 유모의 입을 단번에 막아 버렸다.

다시 마차 행렬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 광경을 모두 지켜본 그 많은 사람들이 서로의 얼

굴을 쳐다보기만 할 뿐 뭐라 말을 꺼내는 이가 없었다.

황후가 이상해졌다고 간간이 소문이 들려왔지만 정말인가?

황후가 그냥 돌아섰어. 아무 짓도 안 하고.

미친 거 아닐까? 이걸 어떻게 믿어?

사람들은 머릿속에 떠오르는 생각은 같았지만 침묵한 채 서로 제 갈 길로 돌아섰다.

***

축제가 열리는 이 도시에 가장 넓은 공터를 다 차지하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어휴… 절로

한심한 절규가 터져 나왔다. 적응을 하긴 개뿔. 자신이 황후임을 여전히 인지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 여기서도 증명이 되었다.

얼마나 큰 파오들이 만들어져 있는지. 황후용 파오는 딱 봐도 알 수 있을 정도로 가장 컸고

제일 화려했다.

예산을 여기다 다 썼나 싶을 정도로 너무 과했다. 얼마나 많은 인원이 여기에 매달려 이 공

사를 해냈을지 가늠하기도 미안해졌다. 그것도 모르고 첫날 나온다고 시간을 단축시켜 버

렸으니 밤새 이 작업을 했을 사람들의 얼굴은 불만으로 가득할 것이다.

이곳 또한 냉랭하고 음울한 공기가 낮게 깔려 있어 아예 그 안으로 들어가기가 싫을 정도

였다. 그냥 가볍게 어디 나들이 가는 거로 생각한 자신의 불찰이다. 이런 줄 알았으면 그냥

당일치기로 하루 둘러보고 황궁으로 돌아갈걸. 여기서 뭐 할 일이 그리 많다고. 카르탄 제

국의 민폐녀 끝판왕, 이것이 지금의 나다.

이번에는 이렇게 진행되고 있었으니 할 수 없지만 다음부터는 이런 불필요한 노동을 없애

야겠다 마음먹었다. 좀 잘 알아보고 나설걸. 그저 황궁을 벗어나는 것만, 칼리크와 떨어져

있을 수 있다는 것만 생각하고 움직인 것이 후회막급이었다.

마차로 가져온 짐 중 황후의 파오로 들어갈 것들을 사람들이 나르기 시작했다. 잠시 주변

이나 산책하고 오자는 유모의 말에 개운치 않은 기분으로 발길을 옮겼다. 마차에서 내리자

마자 유모가 입혀 준 얇은 망토 덕에 드레스에 남은 얼룩은 잘 감춰졌다.

산책이라고 해도 그냥 대충 걷기만 했다. 지금 그녀의 눈에 뭐가 들어올 리 만무하고. 그렇

게 맑은 공기도, 구름 한 점 없이 드높은 하늘도, 파릇파릇한 나뭇잎도, 여기저기 피어 있

는 아름다운 꽃들도 전혀 느끼지 못한 채 그럭저럭 걸어 다니기만 했다.

잠시 후, 으리으리한 황후의 파오로 시녀들과 함께 들어섰다. 헐… 아주 그냥 거실 하나를

떠 왔다. 밖에 나왔으면 어느 정도 불편함도 감수해야 하는데 이건 뭐… 없는 게 없을 정도

로 다 갖추어져 있었다. 여기가 파오 안인지 황궁 안 제 방인지 구별이 안 될 정도로 완벽

했다. 이래야만 했겠지. 예전 벨리타는.

시녀들의 극진한 보살핌을 받으며 벨리타는 편안한 의자에 우선 앉았다. 시녀들은 그동안

마마가 얼마나 달라졌는지 알고 있어 조금 전의 사건으로 심기가 불편하지 않을까 더 정

성껏 살폈다.

“마마. 신경 쓰지 마십시오. 미천한 것들이 저지른 짓이옵니다.”

이 아이는 왜 가만히 입을 다물고 있지 못할까. 리자였다. 일주일 근신을 시켰더니 한동안

가까이 오지 않아 잠시 잊고 지냈는데 오늘 다시 그녀 앞에 나서며 입을 놀렸다.

“꼭 벌을 내리십시오. 저대로 두면 얕보기만 할 뿐입니다. 마마님의 힘을 보여 주소서.”

발밑에 앉아 신발을 벗기더니 발을 주물러 주기 시작한 리자에게 고운 시선을 보낼 수가

없었다. 지금 얼마나 걸었다고 이리하나. 그녀는 리자 손에 잡혀 있던 제 발을 슬쩍 거두었

다. 다시 리자의 두 눈이 살짝 커지며 눈매가 조심성을 띠었다. 처음부터 조심했어야지.

“일주일 더 근신하고 싶은가 보구나.”

화낼 기운도 없어 리자 앞으로 그렇게만 툭 던졌다. 화들짝 놀란 리자가 뒤로 펄쩍 뛰며 물

러나 앉았다. 눈치가 빠른 줄 알았더니 똑같은 일을 두 번 저지른 걸 보면 그리 영특한 아

이는 아닌 듯하다. 아니, 저렇게 해야 예전 벨리타가 좋아했겠지.

“너는 그만 황궁으로 돌아가거라.”

여기 있을 필요가 없는 아이였다. 벨리타 역시 여기서 소화할 일정이 없었다면 황궁으로

돌아가야 맞다. 리자와는 달리 눈치는 있다. 이곳은 황후로서 환영받지 못하는 곳이다.

곧 있을 축제 개회식에 참석해야 해서 잠시 쉬고 싶었다. 풀이 죽어 유모를 뒤따라 나가는

리자의 뒷모습을 지켜보며 나머지 시녀들에게 말했다.

“이제 그대들 파오로 가서 좀 쉬어요.”

불편하게 서 있는 시녀들을 내보내고 잠시 혼자가 된 벨리타는 20명은 족히 앉을 수 있는

이 넓은 파오 안에서 문득 쓸쓸해졌다. 너무 넓어서 그런지 갑자기 외로움이 밀려왔다. 혼

자 묵는 데 쓸데없이 넓었다.

“마마. 마음 푸세요. 곧 즐거운 일이 쏟아질 겁니다. 기운 내세요.”

다시 들어온 유모가 벨리타의 어두운 안색을 살피며 그녀를 위로했다. 유모 덕에 그녀의

입가에 미소가 희미하게 떠올랐다.

***

축제 첫날부터 왔더니 축제 개회식에 참석해 달라는 부탁이 들어왔다. 유모가 설명해 주었

다. 개회식이라고 해 봤자 귀족들 십여 명이 참석해 간단히 인사하는 것뿐, 그리고는 다 같

이 축제가 벌어지는 중앙 거리를 걸어가며 살펴보면 끝나는 일이라 했다. 그게 뭐 어렵다

고. 혼자도 아닌데 잠깐 걸으면 되겠지.

자리를 옮긴 벨리타는 누가 누군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그저 고개만 까딱거리며 귀족들의

인사를 받았다. 그녀에게 아첨하는 찬사가 길어지자 어느 정도에서 끊어 버리고는 자리에

서 일어났다. 별로 듣고 싶지 않았다.

다시 새 옷으로 갈아입은 벨리타의 모습은 아름답다 칭송받을 만했다. 아름다워도 너무 아

름다웠다. 옅은 살굿빛 드레스가 우아함과 화려함의 극치를 보여 주었고 곱게 빗어 올린

머리 위에 놓인 앙증맞은 티아라가 빛을 받아 눈부시게 반짝거렸다. 그녀가 욕먹는 황후가

아니었다면 사람들이 넋을 놓고 쳐다볼 모습이었지만 그녀가 아름다우면 아름다울수록

거리의 사람들 눈초리는 더욱더 날카로워졌다.

그런 사람들 앞을 지나가려니 조금 주눅이 들었지만, 표 내지 않으려 의연한 척 걸어갔다.

그녀 가까이 유모가 있었고 조금 떨어진 곳에 시녀들이 따라왔다. 다른 귀족들과는 거리를

두었다. 가까우면 뭐라도 말을 걸려고 해서 일부러 멀찍이 떨어져 걸었다.

누군가 저 멀리서 손을 흔드는 게 보였다. 그래도 다행이다. 자신을 보고 반가워해 주는 사

람이 있어서. 그녀도 웃으며 같이 손을 흔들어 주었다. 과일 가게를 하는 남자인가 본데 그

녀가 화답하자 갑자기 손 키스를 날렸다. 손이 입술에 닿는 쪽, 소리가 여기서도 들렸다.

이런. 거기까진 과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눈을 돌리자 과일 가게에 놓인 먹음직스러운 여러 과일 중 홍시도 눈에 띄었다. 아까 일이

생각나 얼굴이 굳어지려 했으나 억지로 참아 냈다.

잠시 후, 이번에는 사탕 가게 하는 남자가 손을 흔들어 주었다. 역시 또 손 키스. 이것이 자

꾸 반복되자 벨리타의 고개가 옆으로 기울어졌다. 느낌이 싸한 것이 이상하다.

그다음부터는 일부러 누구하고도 눈을 마주치지 않았고 손을 흔들어 주지도 않았다. 그냥

외면하며 걸었다. 이제는 ‘마마’라고 큰 소리로 저를 부르는 남자까지 있었다. 그냥 다 무시

했다.

다른 곳을 보지 않으려고 옆으로 시선을 돌리자 유모가 여전히 바쁘게 작은 메모지 같은

것에 뭔가를 부지런히 적고 있었다. 유모가 또 뭐 하는 건지 궁금해졌다.

서둘러 행진을 마치고 파오로 돌아가려 하는데 다 끝난 줄 알았던 귀족들의 인사가 다시

이어졌다. 몇몇이 다가와 허리를 굽히며 말을 건네 왔다.

“오늘도 꼭 불러 주십시오.”

한 명이 속삭이듯이 말하고 물러나자 다른 사람도 비슷한 말을 하고 물러났다.

“오늘만 기다렸습니다.”

“저를 잊으신 건 아니시죠? 하하하.”

“첫날부터 오신다고 해서 부리나케 참석했습니다.”

이건 또 뭔가? 그들이 하나같이 비슷한 뉘앙스를 풍기는 말을 속삭인 다음 멀어져 갔고 그

녀의 얼굴은 심각해졌다.

데자뷰.

똑같은 일은 아니었지만 비슷한 분위기와 멘트들.

확인해야 한다. 지금 제 생각이 맞는지 물어봐야겠다.

***

파오에 들어서자마자 벨리타는 유모에게 물었다.

“뭘 썼던 거예요?”

제 생각이 맞다면 유모의 행동 또한 추리가 되었다. 다만 확인 과정이 필요할 뿐.

“오늘 부를 사람들을 체크하고 있었어요.”

유모는 마마가 손을 들어 아는 체를 한 남자는 메모하고 쳐다보지도 않은 남자는 목록에

서 지운 종이를 그녀에게 건네주었다.

어휴. 유모.

이럴 줄 알았다. 제 생각이 맞았다.

[곧 즐거운 일이 쏟아질 겁니다.]

그래서 유모가 이런 말을 했던 거고. 이젠 미리 감을 잡을 수 있어 다행이었다.

“유모. 내가 뭐라 했죠?”

“네?”

유모는 제대로 알아듣지 못한 표정으로 멀뚱히 서 있었다.

“내가 남자들 이젠 안 만난다고 했어요, 안 했어요?”

“그건…….”

꽤 오래전에 그러신 거고. 폐하가 싫다고 하셔서 이젠 흥미를 잃어 가신다고 생각해 이리

서둘러 준비한 건데…. 그럼 이 파티를 안 하신다는 말씀인가?

“그럼 왜 이리 서둘러 여기 오려 하신 거예요?”

알다가도 모를 일이었다. 이 파티를 하지 않으신다면 뭐 하러 축제 첫날부터 급하게 여기

로 오신 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냥… 바람 쐬러요.”

“정말 그게 다예요?”

그 물음엔 대답 대신 그냥 대충 웃음으로 얼버무렸다. 바람 쐬러 온 거긴 한데 그게 다는

아니었다. 시간을 가지고 정확한 판단을 하기 위해서다.

벨리타에 빙의한 뒤, 시간이 흐를수록 주변 상황은 자세히 알게 되었지만 오히려 자신의

속마음은 더 알 수 없게 돼 버렸다.

방향도 잃고 어느 쪽으로 나아가야 하는지도 혼란스러워졌다. 시커멓게 휘몰아치는 성난

바다 위에 마구 흔들리는 돛단배 신세가 된 듯했다. 어디로 가야 하는지도 모르는데 아니,

침몰할지도 모르는데 뭘 어떻게 해야 할지 결정해야 한다. 심사숙고해야 한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