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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군에게 찍힌 민폐 황후 입니다-44화 (44/130)

44화 살려주세요

어떤 키스를 했는데. 저 편해지라고 격했던 감정을 숨겼는데 정말 바로 저리 잘 줄은 몰랐

다. 그렇다고 딱히 주고받을 말이 있었던 건 아니지만 은근히 괘씸했다. 그리고 신경도 쓰

였다. 자신에게 더 잘 보이려고 애쓰는 것이 줄어들었다. 지금도 황궁 밖으로 나가는 것에

만 집중하는 모습이다.

시들해진 건가? 예상은 했지만, 오래도 간다 여겼지만, 갑자기 이러니 어이가 없다. 기분이

별로다. 언짢다. 그러면서 손가락 하나로 감동을 주었다 이렇게 언짢게 했다 사람을 갖고

논다. 하지만 알고 있었다. 이것이 그녀의 수법이라는 걸. 막상 당해 보니 상당히 고단수다.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소란스러웠던 제 감정이 서서히 조용해졌다. 휘둘리지 않는다. 절

대.

자신의 상태가 마음에 들어서인지 그 역시도 서서히 잠이 밀려왔다. 잠이 들면서 저도 모

르게 모로 누워 옆에 있는 벨리타를 슬쩍 끌어와 안았다. 더 편해진 상태가 되자 그는 바로

깊은 잠으로 빠져들었다.

***

벨리타는 입이 쩍 벌어졌다. 자신이 타고 갈 마차를 보고 벌린 입을 다물 수가 없었다. 그

뒤로 줄지어 서 있는 마차가 10여 대는 되었다. 그중 절반이 그녀가 불편하지 않게 준비한

물건을 실은 마차였다.

뭐가 저렇게 많은지, 예산을 확 줄였는데도 이 정도일 줄은 상상하지 못했다. 게다가 자신

이 타고 갈 마차는 순백색에 번쩍이는 은장식이 촘촘히 박혀 있는 세상 화려한 것이었다.

그것도 천장이 없는 오픈 마차였다. 퍼레이드용이라는 걸 한눈에 알 수 있었지만 화려한

만큼 사치스러운 마차에 오르기조차 부담스러웠다.

저 마차를 팔면 여기 저택 한 채는 사고도 남을 것 같았다. 이것도 벨리타의 취향일까? 아

무튼, 이 진귀한 장관 덕에 정말로 이 몸이 황후는 황후구나, 이상한 데서 체험하고 있는

중이었다.

그녀가 떨떠름한 발걸음으로 은백색 마차에 오르자 깃발을 든 호위 기사들이 앞장섰다. 드

디어 출발이다.

황궁 밖을 빠져나가는 긴 마차 행렬이 장관… 아니 그녀의 눈에는 가관이었다. 오픈되어

있는 관계로 바깥 풍경이 아주 적나라하게 잘 보였다.

앉는 자리도 보통 마차보다 높게 되어 있어 더 잘 보였다. 이 나라가 그래도 가난한 나라가

아니어서 다행이지 이 꼴로 행진했다가는 백성들에게 원성을 사고 몰매 맞기 딱 좋았다.

첫 스타트부터 뭔가 시커먼 구름이 몰려오는 느낌이 들었지만 점점 멀어지는 황궁의 모습

을 보며 애써 떨쳐 냈다.

칼리크는 3층 제 방 창문 앞에 서 있었다. 점심 전 출발하는 그녀를 배웅하려고 이렇게 서

서 바라보고 있는 것은 절대 아니었다. 물론 이 방이 황궁 입구까지가 제일 잘 보이긴 하지

만 그것 때문에 이러고 있는 것 또한 아니었다. 다만 미묘하게도 지금 이 시각에 여기로 오

고 싶었을 뿐이었다. 좋아하는 차 한잔하며 잠깐 쉬기 위해.

“폐하.”

시종장은 테이블에 쟁반을 내려놓으며 공손히 불렀다. 그것도 두 번이나. 하지만 등을 돌

리고 창가에 서 있는 폐하는 미동도 하지 않았다.

마치 아무것도 못 들은 것처럼. 그래서 한 번 더 불렀건만 그래도 반응이 없으셨다. 할 수

없이 시종장은 폐하가 명하신 시원한 홍차를 두고는 조용히 물러났다. 어떤 고민거리가 생

기신 게 분명하신 폐하를 염려스럽게 생각하며 발소리까지 죽이고 그 방을 나왔다.

***

날씨는 죽이게 좋았다. 축제 하기엔 환상적인 날씨였다. 이젠 뒤돌아보아도 황궁이 저 멀

리 작게 보이는 것이 가장 마음에 들었다. 얼굴에 좋아하는 표정이 드러났을까 봐 유모가

마련해 준, 들고 있던 화려한 양산을 기울여 기사들에게 보이지 않게 주의를 했다. 마차가

오픈되어 있으니 이런 건 불편했다.

숲길을 지나 탁 트인 공간을 달리기 시작하자 그녀는 들고 있던 양산을 다시 접어 버리고

고개를 들었다. 얼굴에 가득 쏟아지는 햇살이 따사로웠다. 잠시라고 하지만 지금 진정한

자유를 느꼈다.

아. 내가 살아 있구나. 그래도 잘 적응했구나.

자신한테 칭찬을 마구마구 하면서 포근한 봄날 같은 햇살과 눈부시게 파란 하늘을 만끽하

느라 바빴다. 똑같은 하늘인데 어쩜 이리 다를까. 더 푸르고 높게 보였다. 황궁 밖 세상은

더 좋아 보였다. 가끔씩 날아가는 새들처럼 자신도 자유롭게 훨훨 날아다니는 것처럼 느껴

졌다. 처음 마차를 봤을 때 어지럽던 기분이 어느 정도 희석되는 것 같았다.

이제 거의 다 왔나 보다. 다소 소란한 소리가 그녀의 귀에는 흥겹게 들려왔다. 마차가 달려

갈수록 그 소리는 점점 더 커지고 있었다.

그녀는 궁금함과 기대감 때문에 흰색 레이스 장갑을 낀 두 손을 꼭 마주 잡았다. 유모가 이

은백색 마차와 깔 맞춤으로 입혀 준 하얀 드레스 덕에 온통 하얗게 빛나는 그녀의 자태가

단연 돋보였다. 사람들 눈에 확 띌 정도로 화려하고 눈이 부셨다.

도시 입구를 지나 마차 행렬이 들어서자 사람들이 모세의 기적처럼 양쪽으로 물러나며 길

을 만들어 주었다.

사람들이 많이 모여 있는 곳이라 여기부터는 마차가 느리게 나아가기 시작했다. 잘 정비된

도로와 건물들이 빼곡히 들어서 있는 거대한 도시가 눈앞에 펼쳐졌다.

너무 근사했다. 황궁 밖의 세상은 더 활기차고 사람 사는 냄새가 났다. 곳곳에 늘비한 상점

들 앞에는 손님들이 줄을 서 있었고 거리거리 음악 소리가 넘쳐났으며 여기저기 웃는 소

리들이 더 흥을 돋우고 있었다.

이 많은 사람들한테 손이라도 흔들어 주고 싶었다. 더 즐겁게 즐기라고, 더 흥겨워하라고.

그런데…….

환하게 빛나던 벨리타의 얼굴이 점점 굳어져 갔다. 마차 행렬을 쳐다보는 사람들의 눈초리

가 싸늘했다. 아니 그녀를 힐끗거리는 사람들의 눈매가 매서웠다. 철천지원수를 보는 듯

경멸에 찬 시선을 그녀에게 던졌다. 갑자기 흥겨웠던 주변이 찬물이라도 뒤집어쓴 듯 조용

해지면서 찬바람이 쌩쌩 불었다.

아. 잊고 있었다. 이 몸이 어떤 인물인지.

황실의 명예를 바닥으로 실추시킨 부도덕한 황후, 불륜 황후.

한 마디로 천하의 못된 년이 바로 나다!

어둡고 무거워진 거리를 지나가며 그녀는 그들과 눈을 마주칠 수가 없어 그저 정면만 꿋

꿋이 바라보았다. 이 몸이 창피했다. 부끄러웠다. 원망스러웠다. 이렇게 대놓고 비난받아

본 적이 없는 그녀로서는 가시방석이었다. 너무 가볍게 생각했다. 그저 칼리크와 떨어져

바람 쐬러 나온다는 생각밖에 없었다. 생각이 짧아도 너무 짧았다.

하아….

저절로 한숨 소리가 터져 나왔다. 바닥으로 떨어진 기분은 더 아래로 곤두박질쳤다. 그때

였다.

퍽!

여기저기서 다급하게 숨 삼키는 소리가 들려왔지만, 다들 놀란 표정으로 얼어붙은 모습이

었지만, 벨리타는 정확히 지금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인지하지 못했다. 다만 시선을 내려

하얀 드레스 가슴께부터 아래로 주르륵 흘러 내려가는 주황색 액체를 멍하니 보고 있을

뿐이었다.

홍시가 왜 여기 있는 거지? 물렁물렁한 홍시가 죽이 되어 자신의 가슴께부터 치맛단까지

줄줄 흘러내리며 눈에 띄게 도드라졌다.

촤악!

으아아앙.

누군가의 채찍질 소리와 함께 들려오는 어린아이의 자지러질 듯한 울음소리가 벨리타의

멍해진 정신을 돌아오게 만들었다.

바로 마차 문을 열고 얼룩진 드레스 차림으로 바닥에 내려섰다. 조금 떨어진 곳에 5살 정

도 되어 보이는 남자아이가 바닥에 쓰러져 있었는데 엄마로 보이는 여인이 그 아이를 부

둥켜안고 벌벌 떨고 있었다.

“살려 주세요. 어린아이가 아무것도 모르고 저질렀습니다. 제발 살려 주세요.”

아이의 엄마가 입이 닳도록 계속 빌어 댔고 겁에 질린 아이는 째질 듯한 울음소리를 그치

지 않고 있었다.

벨리타는 채찍을 휘두른 기사에게 화가 나서 빠르게 다가갔다.

“지금 무슨 짓을 한 거예요?”

날카롭게 질책을 한 벨리타는 기사의 손에 들려 있던 채찍을 확 빼앗아 들었다. 어린아이

인 것이 보이지도 않나?

다른 마차에 타고 있던 유모와 시녀들이 뛰어서 다가오다 비명 같은 소리를 질렀다. 그 비

명은 쓰러진 아이 때문이 아니라 얼룩진 그녀의 드레스 때문이었다.

홍시를 맞은 제 몰골이 말이 아닌 건 안다. 속이 상하지 않았다고 하면 거짓말이겠지만 저

정도로 놀랄 일도 아니었다. 이까짓 드레스가 뭐가 그리 중요해서.

또다시 한숨 소리가 그녀의 입에서 새어 나오기가 무섭게 주변에서 숙덕거리는 소리가 귀

로 파고들었다.

중얼거리는 듯 작은 소리였지만 알아들을 순 있었다.

아이 하나 죽어 나가겠네.

또 채찍을 들었어. 저 아이 불쌍해서 어째.

이번엔 왜 첫날부터 온 거래? 재수 없게.

아예 나오지 마라. 좀.

벨리타는 두 손으로 귀를 막고 싶었다. 얼마나 패악질을 했기에 이런 소리가 난무하는지.

이 몸의 추악함을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자신이 한 일이 아닌지라 억울하고 비참해져 눈

에 눈물이 고이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를 악물었다. 이들 앞에서 눈물 흘리는 모습은 보이

기 싫었다. 미친 여자 취급이나 받을 것이다.

벨리타는 애써 눈물을 참아 내고는 아이한테 다가갔다. 그런 그녀의 모습에 엄마가 아이를

꼭 끌어안고 몸을 잔뜩 웅크리고는 더 벌벌 떨기만 했다.

“많이 안 다쳤나요?”

놀라서 고개를 번쩍 드는 아이 엄마의 두 눈이 튀어나올 듯 커다래졌다. 벨리타는 몸을 낮

춰 아이의 다리에 손을 가져갔다.

‘으앙, 나쁜 녀….’이라 하려는 아이의 입을 황급히 틀어막는 엄마의 행동을 모른 체하며 바

지 아래 드러난 아이의 다리를 요리조리 살폈다.

어른들이 주변에서 그렇게 욕을 하니 이렇게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아이도 따라 하는 거겠

지. 아무튼, 다행히 아무런 상처가 없었다. 그 기사가 위협용으로 바닥을 내리친 모양이었

다.그건 잘했지만 애당초 사람에게, 그것도 이렇게 조그만 아이에게 채찍을 휘두른 건 용

서할 수 없다.

“아이가 많이 놀랐으니 어서 데리고 집으로 가세요.”

여전히 충격에 빠진 엄마는 말은 하지 못하고 입술만 뻐끔거렸다. 믿어지지 않는다는 표정

속에 의심이 가득 깔려 있었다.

“집…이요? 그냥 가라고요?”

벨리타는 그냥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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