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화 보내기 싫다
밑을 알 수 없는 깊은 늪에 빠진 사람처럼 끝나지 않을 것 같은 그의 키스에 파묻혀 빠져
나올 수가 없었다. 아니 빠져나가지 못하게 그가 그녀를 꼭 붙들고는 놓아주질 않았다.
칼리크는 전혀 익숙해지지 않는 벨리타의 입술에 푹 빠져 버렸다. 어떻게 할 때마다 더 느
낌이 좋은지. 지금 벌을 주듯 키스를 해도 시원치 않은데 자신이 중독되듯이 그녀의 입술
을 탐닉하고 있었다.
사실 바로 내일 축제하는 곳으로 나간다는 소리에 기분이 이상하게 언짢아졌다. 그 상태로
벨리타를 찾아온 것인데 그녀가 상처를 어루만져 주는 손길에 그 언짢음이 눈 녹듯이 사
라져 버렸다. 그 빈 자리에 먹먹함이 들어왔다. 가슴이 뜨끈해지고 잔물결이 일듯 온몸에
잔잔한 감동이 퍼져 나갔다.
아. 보내기 싫다. 이렇게 깊은 키스를 나누는데 저 혼자 나갈 생각에 좋아하다니.
조금 전까지 눈 녹듯이 사라진 언짢음이 다시 고개를 들었다. 축제 생각에 빠져 있던 벨리
타의 얼굴도 떠올랐다. 앞으로 며칠간 낮이건 밤이건 그녀를 만날 수 없다는 것이 언짢음
에 기름을 부었다. 그녀가 가까이 있는데 안 만나는 것과 없어서 못 만나는 것은 엄연히 다
르다. 이 삭막한 황궁 안에서 유일한 즐거움이었는데 어딜 간다고 이리 좋아하는지, 괘씸
해졌다.
그의 입술이 더 사납게 움직였다. 다 먹어 치울 테다. 떨어져 있는 며칠 동안 참아 낼 수 있
을 만큼 다 먹을 테다.
사정없이 그녀를 몰고 가던 그의 안에서 괘씸함과 황홀함이 자리를 바꾸었다. 벌이고 뭐고
마냥 좋았다. 이렇게 좋은데 좀 더 해야겠다. 좀 더… 만족할 때까지.
벨리타는 제 입술이 다 사라질 것만 같았다. 얼마나 점점 더 거칠어지는지 끝날 기미가 보
이지 않았다. 지금까지 한 키스 중에 가장 오래 하고 있다.
지치지도 않는지 그의 입술이 조금도 떨어지지 않는다. 지금이라도 어서 중단시켜야 한
다…. 그런데…… 너무 달콤했다.
이런 달콤함이 세상에 존재한다는 걸 몰랐던 자신이 억울할 정도로 황홀했다. 그는… 키스
를 너무 잘한다. 중독될까 봐 두려울 정도로 너무 잘한다. 이런 키스를 다른 여자와… 아니,
생각하기도 싫다. 그 생각을 몰아내듯 그녀는 그의 목을 더 꼭 끌어안으며 매달렸다.
그녀가 제 품으로 파고들어 왔다. 칼리크는 신음 소리를 흘리며 그녀를 더 단단히 안았다.
맞닿은 그녀의 입술을 닳도록 먹고 또 먹었다. 원 없이 적시고 마셔 댔다.
어?
자신의 몸이 그에게 밀려 침대 위로 눕혀지자 그녀는 감은 눈을 번쩍 떴다. 가장 걱정하던
일이 벌어지려고 한다.
“안 돼요.”
겨우 입술을 떼고 그 말 한마디 하기도 숨이 찼다. 하지만 더 이상은 안 된다. 여기 누웠다
가는 그가 말했던 첫날밤을 치르게 될지도 모른다.
욕망에 못 이겨 거사를 치르고 난 뒤, 그 또한 후회할지도 모르는 일. 이러면 원나잇을 즐
기는 것과 뭐가 다른가. 그런 후회와 충동은 그녀가 혐오하는 일이었다. 이러다간 내일이
되기도 전에 뭔 일이 나도 크게 날 것만 같았다. 그러니 여기서 멈춰야 해.
그의 가슴이 크게 들썩거리며 감정을 삭이는 듯 보였다. 더 이상 강요하지 않아서 다행이
었다. 얼굴은 잔뜩 못마땅한 표정을 짓고 있지만, 가쁜 숨을 내뱉느라 어깨가 위아래로 요
동치고 있지만, 그녀가 침대 밖으로 슬금슬금 빠져나가는데도 잡아채지 않았다. 이렇게 거
부하고 나오는 여자에게 손대고 싶지 않은 남자인 건지, 아니면 끌어당길지 말지 고민하는
중인지 모르겠지만 어쨌건 그에게서 멀리 떨어졌다.
벨리타는 멀찍이 떨어져 그를 바라보며 자신도 뛰는 가슴을 진정시켰다. 얼마나 거세게 뛰
었으면 쉽게 제자리로 돌아오지 않았다.
엄청난 소용돌이 속에 빠진 키스를 멈추게 했는데도 가만히 앉아 자신만 바라보고 있는
그의 모습에 아쉬움이 남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저도 사람이다. 유혹에 넘어갈 뻔했다. 하지만 더는 진척시킬 수 없었다. 자신은 아무하고
나 제 맘대로 뒹군 예전 벨리타가 아니다. 미련하다, 답답하다 소리를 많이 들었지만 여기
서도할 수 없다. 천성이 어디 그리 쉽게 바뀌겠는가.
칼리크는 절대 하고 싶지 않은 게 있다. 특히 벨리타에게. 자신이 더 원해서 절박하게 애원
하는 역할만은 사양하고 싶다.
반대라면 기꺼이 환영이다. 지금까지 그 정도까지 해서 갖고 싶은 건 없었다. 앞으로도 절
대 없을 것이다. 지금 자신의 품을 빠져나간 벨리타를 이해할 수 없었지만 시간이 흐르자
다시 이성이 돌아오고 있었다. 그래. 여기까지. 이 정도만으로도 충분하다. 그런데 뭐에 충
분하다는 소리지? 그로서도 알 수 없는 제 안의 소리였다.
“저는 여기… 소파에서 잘게요.”
거기까진 허용할 생각이 없다. 그럼 내 방으로 돌아가지. 그건 안 될 말이다.
“여기서 같이 자지.”
벨리타는 바로 고개를 힘차게 가로저었다. 지금도 자신의 눈이 그의 벗은 늠름한 상체와
유혹적인 입술 사이를 오고 가고 있는데 말도 안 된다. 그를 믿을 수 없다. 이젠 자신도 믿
을 수 없다.
그가 갑자기 침대 밖으로 내려섰다. 그 반동으로 움찔 떨며 벨리타는 한 발 더 크게 물러났
다.
그녀의 반응을 고스란히 지켜보던 칼리크는 그녀 쪽이 아니라 파티션이 쳐져 있는 곳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세숫물이 떠 있는 곳으로 가 연거푸 차가운 물에 얼굴을 적셨다. 조금 시간이 필요했지만
이렇게 머리를 식히면 사그라들게 할 수 있다.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니다. 그 정도도 절제
못 하는 소인배가 아니다. 난 이 나라의 황제다. 한 번도 욕망에, 유혹에 져 본 적이 없다.
다시 침대가로 유유히 걸어온 그가 벗어 놓은 웃옷을 집어 들었다. 그녀의 눈을 바라보며
천천히 옷을 갖춰 입었다. 뭘 걱정하는지 잘 아는데 그럴 일은 없소. 말이 아니라 몸으로
그녀에게 보여 주었다.
그의 눈동자가 차분하게 가라앉은 게 보였다. 생각보다 빠르게 안정이 된 사실에 안도하기
만 하면 좋은데 아까부터 그 끝에 아쉬움이 자꾸 매달려 자신을 괴롭힌다.
설마… 마음이 간 건 아닐 텐데, 자신이 좋다며 작정하고 유혹하는 남자를 뿌리치지 못하
는 유형인가? 아니면 꽤나 근사하게 생긴 남자가 저돌적으로 덤비면 넘어가는 여자인가?
경험해 본 적이 없어서 자신이 어디에 속하는지 그건 알 수 없다. 위험한 남자를 앞에 두고
그런 고민도 사치로 느껴진다. 그러니 자꾸 감정 끄트머리에 달라붙어 있는 작은 혹 같은
아쉬움이라는 존재가 거슬렸다.
“내일 황궁을 나가는데 여기서 편히 자야지.”
당신이 없으면 그리할 수 있을 것 같아요.
“피곤하니 그만 잡시다.”
침대 안으로 들어가 누우며 평상시와 같은 말투로 권하는 칼리크에게서 그 어떤 의심도
들지 않았다. 눈으로, 목소리로, 행동으로 선언하고 있었다. 아무 일 없을 거라고.
떨떠름한 기분이었지만 그녀는 그에게로 다가갔다. 분위기로 알 수 있다. 핑크빛이 난무하
던 아까의 분위기는 이미 사라지고 없다는 것을 온몸으로 체감하고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
었다.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며 침대에 나란히 누운 두 사람은 바로 잠이 들진 않았다. 서로 피곤
하긴 했지만 잠시 잠들 시간이 필요한 것뿐이었다. 다소 어색한 기분이 들었지만 참을 만
했다. 그러니 아무 말 하지 않아도 되었다. 누구 하나가 먼저 잠들면 이런 시간도 끝이 날
테니.
“언제 돌아올 거요?”
그가 말을 건네 올 거라 생각 못 한 벨리타는 움찔 놀랐지만 그가 알아차릴 정도로 표 나
게 굴진 않았다. 그런데 왜 묻지? 오해하기 딱 좋게 묻는다. 마치 사이좋은 부부인데 떨어
지기 싫어 빨리 돌아오기를 바라는 남편처럼 묻는다. 물론 당연히 오해다. 그가 왜 자신한
테 그러겠는가. 하지만 왜 이렇게 오해할 만한 일을 더러 하는지 모르겠다.
칼리크는 어둠 속에서 자신이 뱉은 말에 눈을 껌벅거리기만 했다. 지금 내가 뭘 물은 거
지? 벨리타가 먼저‘언제 돌아왔으면 좋겠어요?’ 묻는 것이 더 정상인 상황인데 왜 이런 거
지? 그렇게 물으면 ‘아무 때나 원하는 만큼 놀다 오시오.’ 이렇게 답하면 그만인데 처음으
로 자신이 슬쩍 못 미더워졌다.
“내일 가 보고 결정할게요.”
신중에 신중을 기한 대답이었다. 바로 일주일 꽉 채워 쉬다 올게요, 이렇게는 말할 수 없는
노릇이었다. 그가 예의상이건 뭐건 저렇게 묻고 나오는데 야박하게 대답할 수는 없었다.
“뭘 내일 가 보고 결정해?”
야박하게 말하는 건 그였다. 남은 애써 좋게 좋게 말하려 하는데 언성을 높여? 이게 뭐 그
리 중요한 일이라고 이 밤중에 소리를 질러? 누군 소리 지를 줄 몰라 안 지르나.
“4일 주겠어. 그때는 돌아와.”
칼리크는 많이 봐줬다. 이틀이면 충분한 걸 2배로 선심 썼으니 불만은 있을 수 없다. 벨리
타도 당연히 자신의 너그러운 마음에 분명 감사하고 있을 것이다. 꼭 그래야 한다.
“왜 대답이 없어?”
벨리타는 눈을 꼭 감고는 숫자를 세기 시작했다. 참자. 참자.
“……네.”
생각해 볼게요, 는 일부러 말하지 않았다. 여기서 길게 왈가왈부해 봤자 자신만 손해 본다.
일단 내일 나가는 게 중요하다. 여기서는 그가 더 위지만 황궁 밖으로 나가면 누구 눈치 볼
필요가 없다. 신의 도움으로 휴가와 같은 일주일을 얻었는데 그 어떤 것도 그걸 망치게 둘
순 없다. 지금은 침묵할 때. 나갈 때까지만 꾹 참는다.
뭐 하나 건질 것 없는 이 남자에게서 잠시라도 벗어나 보자. 아… 키스 하나는 잘하는구나.
그럼 키스 하나 말고는 볼 것 없는……. 아니지.
그래도 생긴 건 좀 생겼구나. 흠. 그래. 인정. 생기긴 좀 생기고 키스 하나 잘하는 것 말고는
쓰잘데없는 이 남자와 잠시 떨어져 있자. 그 생각만으로도 숨통이 다 트이는 것 같았다. 그
러니 이제 할 일은! 곱게 잠이 드는 것이다. 얼른 자야겠다. 그래야 내일이 빨리 오지.
칼리크는 이상하게 잠이 잘 오지 않았다. 몸은 편한데 마음이 따라 주질 않았다. 게다가 먼
저 잠이 든 벨리타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어떤 키스를 했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