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화 그녀에게 취한다
다행히 그 일주일 동안 칼리크는 두 번만 찾아왔다. 그녀에게는 좋은 일이었지만 많이 바
빴나 보다. 매일 찾아올 것처럼 굴더니 그건 또 아니었나 보네. 이러면 좋은 거지. 그래. 좋
은 거다. 그 두 번도 소파에서 잤더니 다음 날 얼마나 몸이 찌뿌둥하던지. 그녀에게는 축제
까지 남은 일주일이 평소보다 너무 길게 느껴졌다.
드디어 하루 남았다. 내일이면 여길 잠시 떠날 수 있다. 아니나 다를까 오늘 밤 칼리크가
찾아왔다. 하루만 참으면 되고 이번 주에 매일도 아니고 세 번밖에 안 찾아온 거라 이해해
주기로 했다.
“기분이 왜 이렇게 좋아 보이지?”
안 좋을 수가 있나요. 내일부터는 제가 여기 없답니다. 황도 나들이 나갈 거예요.
벨리타는 얼굴에 표 나지 않게 표정 관리에 힘썼다. 빨리 나가고 싶은 걸 그에게 들켜 봤자
저만 손해다.
아무리 그녀가 표정을 감추려고 애를 써도 칼리크는 한 번에 알아봤다. 벨리타는 표정 관
리에 젬병이다. 속으로 즐거워하는 벨리타와는 달리 칼리크의 얼굴은 그다지 좋지 않았다.
어제처럼 손을 닦고 이것저것 만지고 있는데도 정신이 딴 데 가 있는 여인처럼 멍하니 있
기만 할 뿐 벨리타가 당황해하지 않아 살짝 흥이 떨어졌다. 그녀의 마음이 이미 축제에 가
있는 모양이었다. 그렇게 좋은가? 마치 황궁에서는 좋은 일이 하나도 없는 것처럼.
“어서 누워서 주무세요.”
하! 먼저 권하기까지.
칼리크는 점점 못마땅한 얼굴이 되어갔다. 축제 생각에 빠져 있는 벨리타를 긴장하게 만들
어 줘야겠다.
벨리타는 그가 빨리 잠들기를 바랐다. 어서 누우라고 손까지 잡아 침대에 곱게 눕혀 준 뒤,
옆 테이블에 고이 모셔 둔 책까지 펼쳐 쥐여 주었다.
어서 잠들라고. 책만 보면 잠드는 타입인 것 같아 서둘러 선심 썼다. 오늘만 지나면 당분간
해방이다. 그러니 황제가 여기로 또 자러 온 것을 이번 한 번만 너그럽게 넘어가기로 했다.
소파에 누우려고 그녀는 그쪽으로 가벼운 발걸음으로 걸어갔다.
훌렁!
옷 스치는 소리가 들려 뒤돌아보던 벨리타는 펄쩍 뛰고 말았다.
앗!
갑작스런 상황에 벨리타는 저도 모르게 두 손으로 얼른 눈을 가리고 말았다.
왜 갑자기 옷을 벗어?
훤하게 드러난 칼리크의 구릿빛 가슴에 놀라 눈을 가린 손을 내릴 수가 없었다. 그 좋던 기
분이 스멀스멀 아래로 내려오고 있었다.
오히려 칼리크는 그런 벨리타를 지켜보며 바닥에 있던 기분이 점점 상승하는 걸 느꼈다.
효과 있군.
“누가 보면 내가 다 벗은 줄 알겠어.”
악. 다 벗은… 상상하는 것조차 겁이 났다.
왜 그런 말을 아무렇게나 하는 건데!
“이리 와 봐.”
미쳤어. 그리로 가면 이젠 내가 미친 거지.
벨리타는 여전히 눈을 가린 채 슬슬 뒷걸음질 쳤다. 그가 손을 뻗어 자신을 잡아챌 것 같아
그게 더 두려웠다.
윽!
그가 갑자기 비명을 질렀다. 그 소리에 놀란 벨리타는 얼른 손을 치우고 그를 바라보았다.
침대에 앉아 앞으로 몸을 숙이고 있는 칼리크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왜 이러지? 순간
걱정이 되었다. 얇은 실크 이불을 쥔 그의 손이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뭔가 큰일이 난
모양이다. 그녀는 서둘러 그에게 다가갔다.
“왜 그래요? 어디 아파요?”
그의 벗은 어깨에 손을 대고는 살짝 흔들며 걱정스럽게 물었다. 이젠 어깨까지 떨고 있었
다. 어디가 아파서 이러나…….
휙!
갑자기 그녀의 손목을 휘어잡은 그가 큰 소리로 웃기 시작했다. 뭐…지? 그녀는 사정없이
커진 두 눈으로 그를 뚫어지게 쳐다보기만 했다. 실성했나?
“아. 웃음 참느라 힘들었네.”
이번엔 그녀의 두 손이 부들부들 떨리기 시작했다.
어디가 괴로워 그런 것이 아니라 웃음을 참느라 손도 어깨도 떤 거다? 이게 다 장난이었
다? 이 사람이 정말!
벨리타는 그에게 잡히지 않은 손으로 벗은 어깨를 탕탕 두드렸다. 원래 한 방 때려 주려고
힘을 준 건데 얼마나 근육으로 단단한지 제 손이 더 아팠다. 결국 두드린 꼴밖에 안 되었
다. 그의 웃음소리는 더 높아졌다. 이러다가 벽이 다 진동하겠다.
앗. 이게 뭐지?
그녀의 눈동자가 놀람으로 다시 커졌다. 걱정 가득한 표정으로 그의 벗은 가슴께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아파요?”
움찔.
이번엔 정말로 그가 몸을 떨었다. 그녀의 손이 그의 가슴께를 가만가만 더듬고 있었기 때
문이다.
커다란 상처 자국이 이었다. 세로로 길게 자리 잡은 상처였다. 아물긴 했어도 여전히 붉은
색으로 깊게 파인 상처. 이건 분명 검으로 길게 베인 상처다. 얼마나 아팠을까? 그녀의 손
으로 한 뼘은 더 되어 보인다.
“아니.”
그의 목소리가 살짝 잠긴 듯 흘러나왔지만 벨리타는 상처에 집중하느라 알아차리지 못했
다. 자신을 바라보는 그의 눈동자가 점점 짙어지는 것도.
“많이 아팠겠다.”
얼마나 아팠을지 가늠조차 되지 않았다. 안쓰러운 마음에 그녀는 계속 그의 상처를 손가락
으로 어루만져 주었다. 그러면 마치 조금이라도 더 나아질 것처럼 위아래로 가만가만 쓸어
내렸다.
“죽다가 살아났지.”
엄청난 사고가 있었던 거다. 이 남자의 인생도 그리 순탄치만은 않은 듯 느껴져 더 애잔해
졌다. 게다가 앞으로 더 순탄치 않을 걸 알고 있기에 콧잔등까지 시큰해졌다.
“정말 괜찮아요?”
사실 날씨가 궂거나 너무 무리한 날은 그 부위가 욱신거릴 때가 종종 있었다. 하지만 그는
그녀에게 괜찮다고 대답하려 했다. 그런 걸 일일이 알릴 필요는 없다. 그런데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다. 목소리가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아프진 않은데 그 부위가 뜨거워졌다. 그녀의 손가락이 지나간 자리가 뜨끈하게 달아올랐
다. 그의 가슴이 점점 빠르게 오르락내리락거리기 시작했다.
처음이다. 이 상처를 누군가 이렇게 만지는 것이. 그때의 고통과 절망, 두려움이 조금씩 치
유되고 있는 것만 같았다. 그걸 벨리타가 하고 있다는 것이 더 그를 놀라게 했다. 정말로
걱정하고 있다. 그녀의 표정이 그렇다고 말해 주고 있다. 진심으로 위로해 주고 있다. 상처
뿐만 아니라 가슴 안까지 뜨끈해지고 있었다.
“아.”
뭔가 생각이 난 것처럼 벨리타가 벌떡 일어나더니 화장대 쪽으로 다람쥐처럼 쪼르르 달려
갔다. 그냥 좀 더 이러고 있지 뭐 한다고 저리도 재빨리 움직인 건지. 왠지 아쉬움이 남는
순간이었는데 다행스럽게도 다시 쪼르르 그녀가 다가왔다. 아주 마음에 든다.
“이거 아주 좋은 약이에요.”
조그만 병을 들고 와 그녀가 살뜰히도 상처에 오일 같은 걸 바르기 시작했다. 이제는 약을
바를 필요가 없는데, 굳이 말리지도 않았다. 그녀의 손이 닿도록 그냥 내버려 두었다.
“이게 유모가 만든 고바 기름인데 아주 효과가 좋아요.”
상처도 잘 아물고 통증도 없어지고. 만병통치약 같은 거라고 주절주절 설명하고 싶었지만
너무 떠드나 싶어 생략했다.
“봐요. 벌써 옅어진 거 같지 않아요?”
금방 뭐가 옅어졌겠느냐마는 칼리크는 말없이 그냥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그러면서도 약
이 발라진 제 상처는 단 한 번도 쳐다보지 않았다. 그저 그녀에게서 잠시도 눈을 떼지 않은
채 빨려 들어가듯이 바라보고만 있었다. 뭔가 따뜻하다. 아주 많이 따뜻하다. 가슴에 품고
싶을 정도로.
어?
벨리타는 갑작스레 그의 벗은 가슴에 안겨 버렸다. 가슴이 쿵쿵 뛰었다. 아니다. 손바닥에
닿은 그의 가슴이 쿵쿵 뛰고 있었다. 아주 단단했다. 뜨거운 열기가 느껴지지 않았다면 단
단한 벽을 짚고 있는 줄 착각했을 것이다. 남자의 맨가슴을 처음 만져 보는 그녀로서는 놀
란 가슴을 진정시킬 길이 없었다.
이렇게 또 안기면 안 된다. 그의 가슴 흉터에 놀라 무턱대고 거리를 좁힌 일이 후회스러워
졌다. 그녀는 얼른 다급하게 밀어 냈다. 그러나 두 손으로 힘을 주어 그의 가슴을 밀어 보
았지만 조금도 떨어지지 않았다. 너무 꼭 끌어안겨져 전혀 움직일 수가 없었다. 다른 때 저
를 포옹하던 힘과는 전혀 달랐다. 그에게서 평상시와는 다른 격한 감정이 느껴졌다.
칼리크?
왜 이러는지 묻고 싶어 그를 긴장한 눈으로 조심스럽게 올려다보았다. 아! 마주친 그의 눈
동자가 희미하게 흔들렸다. 짙어진 황금빛 눈동자가 더한 무게감으로 그녀를 압박하듯 조
여 왔다. 그의 갑작스러운 행동이 둘 사이의 공기마저 바꿔 놓았다. 공기가 빠져나간 듯 숨
쉬기가 점점 힘들어졌다. 맞닿은 그녀의 가슴도 빠르게 들썩거렸다.
그의 손이 천천히 감질나게 다가왔다. 그녀의 얼굴을 감싸더니 조심스럽게 어루만지기 시
작했다. 그러다 손등으로도 쓸어 보며 턱까지 내려갔다 다시 올라오기를 반복했다. 그의
손길이 스쳐 지나간 자리가 화끈거렸다. 마치 처음 보는 여인을 대하는 듯, 아니 신기한
듯, 아니 매혹당한 듯 그의 눈빛이 점점 더 크게 흔들렸다.
하아…….
숨 쉬기가 어려워 그녀의 입술 사이로 깊게 들이마신 공기가 새어 나왔다. 그 소리에 그녀
의 눈동자를 잡고 있던 그의 시선이 바로 아래로 떨어졌다. 살짝 벌어진 그녀의 입술로. 더
호흡하기가 힘들어졌다.
그의 손가락이 시선이 머물고 있는 그녀의 입술로 내려왔다. 그 끝으로 그녀의 앙증맞은
핑크빛 입술을 가만가만 쓸어 보는 그의 눈빛이 몽롱해졌다.
그녀에게 취한다. 아직 아무것도 하지 않았는데도 술을 가득 마신 것처럼 벌써 취한다. 달
달한 향기를 뿜어내는 술이 눈앞에 있는 듯 보고만 있어도 자꾸자꾸 취해 간다. 정신이 멍
해질 정도로, 시야가 흐려질 정도로.
그렇다면 마셔야지. 달콤한 술을 머금고 혀를 적셔야지.
마음은 그래 놓고는 마시는 것이 아니라 입술을 벌리고 마치 한입 베어 먹을 것처럼 그녀
의 입술을 덮어 버렸다.
아……. 이 키스에는 도저히 적응할 수가 없었다. 매번 할 때마다 이렇게 다르고 더 강렬해
진다. 그저 거침없는 그에게 쓸려 또 이리저리 정신없이 헤맬 뿐이었다. 어딘가 꼭 붙잡고
싶어 그녀의 손이 저절로 그의 목을 끌어안았다.
쿵쿵.
맞닿은 가슴으로 전해지는 그의 심장이 얼마나 크게 뛰는지 그녀의 몸을 울리게 할 정도
였다. 그녀의 심장도 그를 따라가는지 점점 더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더 뜨겁다. 매번 그 뜨거움을 갱신하는 것처럼 또 새로운 기록을 만들어 간다. 자신을 삼킬
것처럼 덤비는 그의 입술에서 급박감까지 느껴진다. 마치 아주 먼 곳으로 떠나보내는 사람
처럼. 그다음은 아무 생각도 할 수가 없었다. 그저 이 현란한 키스에 빠져 계속 허우적거렸
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