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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군에게 찍힌 민폐 황후 입니다-41화 (41/130)

41화 황도 축제

이상하게도 그의 그 말에 씩씩거리던 벨리타의 가슴이 점차 누그러졌다. 그렇다면 지금까

지 한 번도 그 침대에 여자를 끌어들이진 않았다는 말인데 이런 건 원작에 나와 있지 않았

다. 사실일까? …하긴 뭐 하러 그가 그런 거짓말을 하겠어. 칼리크는 다른 건 몰라도 거짓

말을 할 사람으로는 보이지 않았다. 거짓말할 필요가 뭐 있겠어. 뭐든지 제 맘대로 할 수

있는데.

그가 던진 말을 곰곰이 생각해 보다 삐죽거려도 보다, 이리저리 분석하고 있는 자신의 모

습이 생소했다. 은근 신경 쓰고 있네. 뭐 하러? 거리를 둔다며?

벨리타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며 이러는 자신한테 짜증이 났다. 모든 게 못마땅했다. 그

가. 아니 내가. 아니 그가…… 아. 모르겠다.

가뜩이나 심란한데 그의 물건들이 거슬릴 정도로 여기저기 눈에 띄었다. 마치 그가 여전히

이 방에 있는 것처럼 그 사소한 물건들의 존재감이 대단했다. 안 되겠다. 물건도 그렇고 자

꾸 자러 오는 칼리크도 그렇고.

조금이 아니라 많이 거리를 두어야겠다. 이대로는 절대 안 된다. 자꾸 위험하게 구는 칼리

크와 어떻게 해서든 침대를 같이 쓰는 것만은 피해야 한다. 그런데 제 맘대로 찾아와 자고

가려 하니 문제다.

이 방을 벗어날 방법이 없을까? 잠시라도 어디 갔다 올 수만 있다면. 친정에 간다고 하고

펠론국에라도 구경 가 봤으면 좋겠는데 지금 제 상황에서 또 낯선 곳으로 가기에는 엄두

도 안 나고 두려웠다. 벨리타는 머리가 아파 왔다. 돌파구를 찾아야 하는데 그것이 쉽지 않

아 답답하기만 할 뿐이었다.

***

“로간 공작. 지금 이 사안이 그렇게 중요해서 자꾸 거론하는 건가?”

칼리크의 목소리는 심히 매서웠다. 아침에 그 좋던 기분이 한 번에 날아갈 정도로 매우 언

짢아졌다. 지금이 몇 번째인가. 이젠 듣기도 지겨워졌다.

“계속 언성이 높습니다.”

로간 공작 역시 이젠 말하기도 지겨울 정도였다. 매번 같은 식으로 거절만 하고 나오는 황

제 폐하 때문에 다른 나라들에게 난처하기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지금 대업을 앞에 두고 있는데 황비라니? 그것도 세 나라에서 다? 갑자기 황비 셋을 들이

라는 말이 지금 중요한 사안이냐고 묻고 있는 거요!”

세 나라란 데상 연합국, 렉서 왕국, 소닉 왕국을 말한다. 그들이 공주를 황비로 들이라고

계속 압력을 가하고 있었지만, 지금까지 계속 거절을 하고 있었다. 한 명 있는 황후도 골치

아파 죽겠는데 셋씩이나? 차라리 나보고 죽으라 해라.

“로간 공작은 복속국들 외교를 하라 했더니 왜 매번 황비 얘기만 들고 오는 거요? 그것 말

고는 할 일이 없소?”

칼같이 날카로운 황제의 말에 로간 공작은 찔끔했다. 지금은 다시 물러날 때. 하나 공작은

죽을 맛이었다. 중간에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겠고 이 안건이 끝날 기미도 보이지 않

고. 황제는 대쪽같이 통일을 이루기 전에는 말도 꺼내지 말라 엄포를 놓고 있고 세 나라에

서는 펠론국만 왜 특별 대우하냐, 거긴 황후씩이나 앉혀 주고 왜 자기들 공주는 황비 자리

하나 얻기도 이렇게 힘이 드냐, 우리를 홀대하냐며 아주 그를 들들 볶아 댔다. 이럴 땐 다

때려치우고 싶다.

집무실을 나가는 로간 공작의 얼굴은 늘 그렇듯이 어두울 수밖에 없었다.

***

“일주일 후 열리는 황도 축제엔 늘 하던 대로 진행하면 되겠습니까?”

데인이 던진 그 물음에 황제는 잠시 침묵했다.

늘 하던 대로라.

그건 황제 대신 황후가 대신 나가 시찰을 하며 얼굴을 내보이는 일이었다. 매년 열리는 황

도 축제는 일주일에 걸쳐서 열린다. 황후는 3일 정도 후에 나가서 이틀 정도 참석하는 시

늉만 하고 돌아왔다. 아니, 다 알고 있었다. 그동안 멀리서 온 귀족 남자들과 아주 알차게

즐기고 온다. 그런데 올해도 그렇게 진행한다? 왠지 선뜻 대답이 나오지 않았다.

“그렇게 하시오.”

특별한 이유도 없는데 변경할 필요는 없었다. 다만 그렇게 답을 하고도 황제는 찜찜함에

갈증이 다 일었다.

데인이 나가고 나자 그는 테이블에 놓여 있는 물잔을 들어 연거푸 벌컥벌컥 마셔 버렸다.

차가운 홍차였으면 더 좋았으련만. 갑자기 이는 갈증이 쉬 가시지 않았다.

오늘은 살짝 더운 날씨라 더 갈증이 이는 모양이다. 밤에는 쌀쌀한데 한낮은 해가 쨍쨍해

다소 더운 하루였다.

로간 공작이 다녀가 더 갈증이 난 것일 수도 있다. 일도 손에 안 잡히는데 안톤이 있는 곳

에 가 한바탕 몸이나 풀고 오는 게 더 능률적일 것 같아 그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

황실 연무장에 다다르기도 전인데도 들려오는 우렁찬 함성에 다시금 기운이 샘솟았다. 역

시 앉아서 업무를 보는 것보다 여기서 뛰는 게 그의 적성에 맞았다.

황제가 나타나자 더 큰 함성이 대연무장을 넘어 골짜기로 메아리쳤다. 맞닿은 거대한 산이

쩌렁쩌렁 울릴 정도였다.

안톤의 지휘 아래 낮 훈련에 매진하고 있는 군사들의 사기를 위해서라도 더 자주 나와야

겠다. 줄을 지어 정렬해 절도 있게 움직이고 있는 수많은 군사들이 자신의 혈육처럼 느껴

졌다.

싸우자. 승리하자. 통일 카르탄. 구호를 온 세상이 떠나갈 듯 크게 외치며 훈련에 임하고

있는 그들 속으로 합류한 황제는 가슴이 벅차올랐다. 웃옷을 훌렁 벗어 던지고 그들과 함

께 넓은 연무장을 돌며 같이 훈련에 임했다.

그 많은 군사들은 더 열심히 연습하기 시작했다. 황제 폐하가 자신들과 같은 모습으로 그

속에 끼어 훈련에 집중하는 모습은 충성심을 넘어서 경외감마저 들 정도였다. 늘 폐하가

나오면 그들의 사기는 하늘을 찔렀다.

역시 자신이 놀 장소는 여기다. 모든 에너지가 몸속에서 모여 폭주하듯 치솟았다. 이 느낌

이 얼마나 큰 원동력인지, 올 때마다 느낀다. 행복하기까지 하다. 여기서는 모든 걱정과 근

심을 내려놓을 수 있었다. 통일, 신수, 벨리타의 이름까지 머릿속에서 싹 다 비울 수 있었

다. 그 자신만의 안식처. 땀을 비 오듯 쏟으면서도 그의 얼굴은 눈부시게 빛이 났다.

***

“일주일 후에 열리니 이것저것 준비할 것이 많아요.”

유모에게 처음 들었다. 원작에도 나와 있지 않아 이런 게 있는 줄도 몰랐다. 그것도 축제란

다. 황도 축제. 그것까지 나가서 해야 하나 싶었다. 칼리크와 같이 나가 황궁 밖에서도 또

시달린다는 뜻이겠지.

“폐하 대신 나가시는 거라 더 신경 써야 해요.”

“네? 나 혼자요?”

이러면 말이 달라진다. 갑자기 그녀의 머릿속이 맑아지는 것 같았다.

신은 살아 있다. 이렇게 돌파구가 생기다니. 이 방을 잠시 떠나 있을 수 있게 되었다. 타당

한 이유가 제 발로 자신을 찾아왔다. 이렇게 운이 따라 주다니.

주관자로 참석해야 한다는 소리를 듣고는 뭘 해야 하는지 유모에게 물었다. 황후로서 해야

할 일이 있을 것이다.

그런 거라면 나가서 해야 한다. 망설일 필요도 없다. 그런데 끝까지 신이 도와주시려는 건

지 거의 할 일이 없단다. 축제 3일째 되는 만찬에 참석하고 가볍게 한 바퀴 둘러보기만 하

면 된다고 한다. 속으로 안도하며 좋아했다. 이런 소식을 알려 준 유모가 역시 최고다.

“그럼 3일째 되는 날 출발하실 수 있도록 준비하겠습니다. 마마.”

잠깐. 출발도 3일 후?

“원래 3일 후에 참석하는 건가요?”

“항상 그리하셨어요.”

“음… 혹, 첫날부터 참석해도 되는 건가요?”

가뜩이나 답답한 일투성이었는데 이참에 잠시 휴식을 취하며 칼리크와 떨어져 있어 보고

싶었다. 게다가 축제도 보고.

“황후마마께서 주관하시는 거라 마음대로 하셔도 돼요.”

괜한 고민을 했다. 이렇게 술술 풀릴 줄 누가 알았겠나.

“그럼 우리 축제 시작하는 첫날 나가요.”

황궁 밖을 나가 본 적이 없는 그녀로서는 궁금한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은근 기대도

되었다. 그래서인지 어디로 여행 가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렇게 할게요. 좀 서둘러 준비하면 됩니다.”

준비할 것들이 많은가 보다. 그래. 일주일 동안 황궁 밖에서, 더 정확히는 칼리크에게서 떨

어져 있어 봐야겠다. 그래야 이 혼란스러운 상황을 제대로 정리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벨리타는 마치 앓던 이가 빠진 사람처럼 안도하며 얼굴에 미소를 지었다.

그런 마마를 바라보며 유모는 살짝 표정이 심각해졌다. 다시 변덕을 부리시는 건가? 지난

번에 싸우신 것도 같고, 마마께서도 폐하가 싫다고 하셨고. 좀 오래간다 여겼는데…. 어찌

되었건 마마가 최우선이다.

저리도 좋아하시다니, 그동안 지루하셨나 보다. 이렇게 재촉하시며 빨리 나서지는 않으셨

는데. 그렇다면 마마님이 원하시는 대로 제대로 준비를 해야겠다. 아직 시간은 있으니 서

둘러 준비를 시키면 얼추 시간은 맞출 수 있을 것 같았다.

마음이 급해진 유모는 뛰다시피 밖으로 부리나케 나섰다.

***

“여기에 서명하셔야 해요.”

“여기요? 이게 뭐예요?”

“축제 관련 예산서예요.”

아하. 늘 이렇게 했나 보다. 시종이 들고 온 예산서를 받아 유모가 벨리타에게 전해 주었

다. 잠시 꼼꼼하게 읽어 보았다. 여기로 와서 자신이 직접 서명하는 것이 처음이라 무슨 내

용인지 알고 싶어졌다. 처음 황후로서 일하는 느낌이었다.

“기부금은 10만 골드인데 황후 개인 비용 예산은 5만 골드?”

축제 기부금은 10만인데 나 혼자 쓰는 비용이 그 절반이나 돼? 이게 말이 되나?

“그게… 원래 10만 골드였는데 반으로 삭감…….”

“아니. 이것도 너무 많다고요.”

유모는 적다고 뭐라 하는 줄 안 모양이다.

“마마 드레스도 여러 벌 해야 하고 그거에 맞춰 장신구와 티아라…….”

“유모. 있는 것도 많아요. 새로 하지는 말아요.”

유모는 놀라움으로 잠시 할 말을 잃었다. 그 말씀을 하시며 마마가 5만 골드를 1만 골드로

고쳐 넣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되면 이 방 아래 있는 큰 창고를 다 뒤져야 한다.

한 번 쓴 것 중 마마가 마음에 들어 하시는 건 죄다 넣어 놓은 방에서 필요한 걸 찾아야 한

다. 마마가 돈을 아끼시다니. 이것도 변하신 건가 싶어 얼떨떨해 아직은 적응이 되지 않았

다. 언제나 최고와 새것만을 찾으신 마마였다.

유모는 속으로 바빴다. 제 한 몸 부서지더라도 마마가 원하는 대로 해 드릴 사명감을 띠고

2층 창고로 총총 뛰어 내려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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