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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군에게 찍힌 민폐 황후 입니다-40화 (40/130)

40화 첫 번째 여자

잠도 못 자게 만들려는 신종 고문인가.

그녀는 더 기가 막혔다. 그녀를 위해 갖다 놓은, 손 닦는 용도인 커다란 도자기 그릇에 담

긴 물에 그가 척 손을 담그더니 닦은 것까지는 이해한다.

그럴 수 있다. 그런데 문제의 그 상자에서 수건이 왜 나오는 건지. 거기에 물기를 닦고는

그녀의 수건 옆에 자연스럽게 걸어 놓는 건 또 뭔지.

상자에서 또 빗을 꺼내더니 머리를 쓱쓱 빗고 작은 병을 꺼내 얼굴에 뭘 바르고는 그대로

그녀 화장대 위에 떡하니 올려놓는 그의 행동들이 하나같이 수상하게만 보였다.

지금 뭐 하자는 건가? 유모가 갖다 놓는 것도 모자라, 이제는 직접 자신의 물건을 가져와

왜 이 방 여기저기에 배치해 놓는 건지 물으려 했다.

그런데 그가 침대에 자연스럽게 누워, 주인인 자신보다 더 편안하게 누워 상자에서 꺼낸

두툼한 책을 읽기 시작하는 걸 보고는 하려던 말이 쏙 들어갔다. 항상 매일 밤 이랬던 사람

처럼 너무 자연스럽게 보여서였다. 누가 보면 그녀가 그의 방에 방문한 것처럼 보일 만한

광경이었다.

칼리크는 이 침대가 무척 마음에 들었다. 자신의 침대는 너무 커서 그런지 이런 아늑한 맛

이 없었다. 침대를 바꾸자 할까, 뭐 이런 쓸데없는 생각을 할 여유까지 생겼다. 당황하는

그녀의 모습은 자주 보아도 여전히 즐거웠다. 얼마나 당황했으면 멍하니 움직이지도 못할

까. 그러면서도 자신이 들고 온 상자에는 관심을 보였다.

상자 안에서 하나하나 물건을 꺼내 올려놓아도 아무런 제지도 하지 않았다. 혹, 이러길 바

라고 있었던 건가? 좋으면서 내색하지 않으려 애를 쓰는지 그녀가 입술을 꼭 다물었다. 미

소 짓지 않으려 그러나? 어제 그렇게 나가고 나서 내가 오늘은 안 올지도 모른다고 걱정하

다 이렇게 오니 좋긴 좋은가 보다.

칼리크는 하품이 나오려는 걸 참으며 책을 읽었더니 몇 줄밖에 읽지 않았는데 졸음이 쏟

아졌다. 거의 못 자고 일만 계속했더니 피곤한 것은 당연하다.

“먼저 잠들지도 몰라. 신경 쓰지 말고 당신도 푹 자도록 해.”

벨리타는 그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커다랗게 하품을 하는 그의 모습까지 멍하니 보고 있

었다. 이게 실화인지. 정말 금방 잠들었다. 며칠 밤을 새운 사람처럼 그가 그렇게 곯아떨어

졌다. 자신은 아직도 방 한가운데 서 있는데 말이다.

책은 폼으로 가져온 것이 분명하다. 아니면 책만 보면 잠드는 타입인가? 펼쳐진 책을 가슴

께에 올려놓고 잠이 든 그의 모습이 다른 경우라면 근사하게 보일 수도 있었겠지만, 상황

이 상황인지라 그렇게 보일 리 없었다. 낮게 코까지 골고 있는 저 길쭉한 코를 잠이 홀딱

다 달아나게 비틀어 주고 싶어졌다.

속이 터진다.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그의 물건을 휘 둘러보고는 헛웃음이 터져 나왔다. 무

슨 자기 분신을 떨구어 놓은 것처럼 그의 물건들이 점점 많아진다. 오늘도 또 침대 귀퉁이

에서 쪼그리고 자야 하는 건가? 어제의 맥 빠짐 대신 오늘은 황당함만이 가득 자리 잡고

앉아 그녀를 괴롭혔다.

입이 앞으로 쑥 나온 그녀였지만 그래도 그가 깰까 봐 조심조심 가슴께에 놓인 책을 가만

히 치워 주었다. 이왕 이렇게 자는 거 깨워 보낼 수도 없고 할 수 없다. 포기도 빠른 게 좋

다고, 그녀는 어깨를 한 번 으쓱해 버리고는 그가 깨지 않게 조용히 움직였다.

***

갑작스레 눈이 떠진 칼리크는 눈이 어둠 속에 익숙해질 때까지 잠시 누워 있었다. 얼마나

곤하게 잤는지 아무 소리도 듣지 못했다.

잠에서 서서히 깨자 이번에도 또 여기가 벨리타 방이라는 걸 뒤늦게 깨달았다. 너무 달게

자다가 눈을 뜬 것 같았다.

아침까지 쭉 잘 줄 알았는데 새벽에 깨 버렸다. 어느 정도의 피로감은 사라졌지만 조금 더

자고 싶었다. 몸을 한껏 펴며 기지개를 켜다가 뭔가 이상해 옆자리로 시선을 돌렸다. 아무

리 어두워도 바로 옆 정도는 보였다. 그런데…….

아무도 없다. 비어 있다.

벨리타?

그는 슬그머니 몸을 일으켜 세웠다. 어둑한 방 안을 두리번거리는 그의 눈에 누군가의 인

영이 잡혔다. 소파 쪽이었다.

흠…….

가까이 다가간 그가 소파를 내려다보며 난해한 표정을 지었다. 뭔가 씁쓸한 것도 같고. 벨

리타가 자신 옆에서 자지 않고 여기에 있기 때문에 씁쓸한 것인지, 이런 곳에서 자면서도

입을 헤 벌리고 아주 잘 자고 있기 때문에 씁쓸한 것인지 잘 모르겠다.

아니 둘 다인 것 같다. 또 지난번처럼 입술을 꼬집을까 잠시 생각도 해 보았지만 별로 내키

지 않았다. 아직은 어두운 새벽이기에 자신도 그녀도 조금 더 잠을 청했으면 싶었다.

얼마나 깊게 잠들었으면 자신이 안아 들었는데도 그녀가 깨지 않았다. 두 팔에 느껴지는

그녀의 무게감이 기분 좋게 와 닿았다. 이렇게 자는 그녀를 안고 침대에 눕혀 준 적이 있었

는데. 그때는 빨리 내려놓고 싶은 마음이 컸는데 지금은 달랐다. 그날. 숲속에서 키스하다

기가 막히게도 잠든 벨리타를 안고 온 날. 불과 얼마 지나지도 않았는데 이렇게 느낌이 달

라질 수도 있다는 것이 더 놀라웠다.

그녀를 조심스럽게 안은 그의 발걸음이 느려졌다. 한발 한발 천천히 걸어가며 제 품 안에

고이 안긴 그녀의 무게감을 즐겼다.

처음도 아니지만 다시 인정했다. 감상하기에는 벨리타의 미모가 최고였다. 이렇게 아름다

운 얼굴이 또 있을까 싶을 정도로 눈이 호강한다.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보고만 있어

도 홀릴 것 같은 얼굴이다. 하지만 자신은 홀리지는 않고 즐기기만 하니 얼마나 다행인가.

그녀가 깰까 싶어 아기 다루듯이 조심스럽게 침대에 눕힌 그는 가만히 옆에 모로 누웠다.

이럴 때 우스운 잠꼬대라도 하면 더 즐거워질 텐데.

아무리 기다려도 조금의 움직임도 없는, 마치 그린 듯이 자고 있는 그녀의 얼굴을 하염없

이 들여다보던 칼리크는 조용히 손을 뻗었다. 그의 큰 손으로 다 덮을 정도로 작은 얼굴에

눈코입이 다 있다는 것이 신기했다. 최고의 화가가 혼을 불어넣어 정교하게 그려 놓은 그

림 같은 얼굴이었다.

머리카락까지 부드러웠다. 어두워 붉은색은 보이지 않았지만 손끝에 만져지는 촉감은 한

없이 매끄러웠다.

[칼리크. 머리카락이 부드러운 사람은 성격이 순한 편이에요. 황자처럼 뻣뻣한 머리카락은

좀 거친 편이고요.]

어머니가 살아 계실 때 놀리듯이 한 말이 떠올랐다. 즐겁게 웃으시던 웃음소리가 지금도

들리는 듯했다.

자신에 대해서는 맞았는데 벨리타의 경우는 그 말씀이 틀린 듯했다. 벨리타는 머리카락이

이렇게 부드러운데 성격은 개 망나…니였지만…… 지금은 순해 보이니 결국 어머니 말씀이

맞은 건가?

만약에. 아주 만약에 말이다. 벨리타가 그런 방탕한 황후가 아니라 그냥 무난한 사람이었

다면 우린 어떤 부부가 되어 있을까?

부모님처럼 그렇게 좋은 부부가 될 수 있었을까? 아직도 잊히지 않는다. 두 분이 서로를

쳐다보는 그 눈빛을. 서로에 대한 애정과 무한한 신뢰, 존경까지, 어린 자신이 보고 있어도

확연히 알 수 있던 두 분 사이를 기억한다. 지금 이 자리에 있고 보니 그런 두 분이 부러워

졌다. 자신은 애당초 포기한 부분이라 두 분을 그리워만 했는데 최근 부럽다는 생각을 종

종 하곤 했다.

벨리타… 정말로 당신이 원하는 건 뭐지? 이제는 에무르하고도 별 연관성이 없는 것 같았

다. 그건 정말 다행이었다. 그러면 이 끝엔 뭐가 있는 거지? 나를 흥밋거리로 언제까지 이

렇게 굴 거지? 별로 진척된 것이 없는데.

그는 벨리타가 너무 질질 끈다고 여겨졌다. 아니면 어리숙한 황후 놀이를 해 보고 싶었던

거거나. 생각보다 오래 한다. 어제 벨리타의 모습에서 이제 슬슬 끝날 기미가 보였다. 끝나

는 날이 언젠가는 오겠지. 조금은 씁쓸해지는 것도 같았다. 즐거운 놀잇감을 잃는 것 같은

씁쓸함이다. 그 정도밖에 안 된다. 머리로는 그렇게 여겼다.

그때는 또 그때대로 살아가면 될 일. 벨리타 없이도 잘만 살아왔다. 그렇게 크게 신경 쓰지

않기로 했다. 그러면서도 그는 쓰다듬고 있는 그녀의 머리카락에서 손을 뗄 수가 없었다.

언제 이렇게 실컷 만져 보겠어. 그렇게 그녀의 머리카락에 손을 묻고 다시 잠이 들 때까지

그 부드러움을 음미했다.

***

벨리타는 벌떡 일어나 몸을 부르르 떨었다.

내가 왜 여기에?

“난 일어나자마자 시끄러운 소리 안 좋아해.”

닥쳐요. 마음 같아서는 그렇게 쏘아붙이고 싶었다.

분명 소파에서 혼자 자고 있었는데 왜 침대에서 눈을 뜬 것인지, 그것도 하필 왜 그의 옆에

딱 붙어 꼭 끌어안고 있었던 것인지 믿어지지 않았다. 뭐라 소리라도 지르려고 입을 달싹

거리기만 했는데 먼저 선수 치고 나오는 칼리크가 그렇게 얄미울 수가 없었다.

“오해 마. 편히 자라고 여기 눕혀 준 것뿐이야. 굴러서 나한테 달라붙은 건 당신이고.”

이 저주받은 몸뚱아리. 처음부터 그랬지만 이 몸뚱이를 어디 갖다 내버리고 싶다. 이건 내

가 한 것이 아니라 이 몸이 저 혼자 굴러간 것이다. 전혀 기억에 없으니까. 그건 내 의지가

아니라는 말이다.

“여기가 편하면 여기서 주무실래요? 내가 당신 방에서 잘게요.”

차라리 이러려면 방을 바꿔요. 제발 잠은 각자 떨어져서 맘 편히 자자고요.

“오. 그것도 좋은 생각. 그럼 오늘 밤은 내 방에서 잘까?”

자고 일어났을 때 가장 밉상으로 구는 타입인가.

“내 침대는 너무 넓어. 당신 찾아서 헤매야 할 거야.”

“헤매지도 말고 혼자서 굴러다니며 주무세요.”

뭐가 좋은지 그 말에 하하하 소리 내어 웃으며 칼리크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정말 다행스

럽게도 이번에는 바로 방을 나가 주려나 보다. 문 쪽으로 향하는 그의 뒤통수를 바라보며

성난 마음이 조금은 가라앉으려 했다.

“아참.”

꼭 저 말 뒤에는 사람 염장 지르는 말이 나온다. 경험상 그렇다.

“내 침대에서 자게 되면 거기서 같이 잔 첫 번째 여자가 될 거야. 기억해 둬.”

뭘 기억해?

문소리가 나고 그가 사라지고 나자 침대에 있던 베개를 냅다 그쪽으로 던져 버렸다. 갈수

록 얄미워지는 것이 따라올 사람이 없을 정도였다.

첫 번째?

그게 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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