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화 폐하가 자꾸 자러 오니 신경이 쓰여서요
이번 일을 계기로 에무르와 내통하는 자가 누구인지 확실히 알아내고자 이렇게 둔 것이었
다.
“추격조를 배치해 놓았는데 감쪽같이 도망쳤다 합니다. 샅샅이 뒤진 추격조가 서쪽 탑 밖
성벽 한쪽에 작은 구멍이 나 있는 걸 발견했습니다. 아무래도 그쪽으로 도망친 것이 아닌
가 추측됩니다. 물론 그곳은 이미 보수를 해 놓았습니다.”
“짐승들처럼 그 구멍으로 도망을 쳤다?”
일부러 탈출하라고 서쪽 탑 입구의 경비를 느슨하게 한 것도 있지만 생각보다 감쪽같이
도망쳤다. 그래도 왕자다 이건가? 그를 도운 건 과연 내부 첩자일까? 반역자 무리일까?
잠깐, 아주 잠깐 벨리타의 얼굴이 떠올랐다가 사라졌다. 아니다. 그녀는 아니다. 예전 같으
면 그녀가 가장 유력한 인물이겠지만 지금은 그럴 이유도 시간도 없다. 뭔가 꾸미고 있었
다면 진작에 알아봤을 것이다. 그 다양하게 변하는 표정 속에 그런 기미는 손톱만큼도 보
이지 않았다. 그럼 누구인가?
“그런데 쿠로 대공이 에무르가 사라지기 전 황도를 떠났다가 몇 명의 사병들과 함께 조금
전 저택으로 돌아왔다 합니다.”
“역시 쿠로인가.”
우연이라고 하기에는 꺼림칙한 쿠로의 동선이었다. 게다가 고작 몇 시간 만에 금방 돌아올
거면서 사병들까지 대동하고 황도 밖을 나갔다 올 일이 과연 뭐가 있을까. 냄새가 난다. 강
력하게.
데인이 고개를 끄덕이며 같은 생각임을 알려 왔다. 왕자를 도운 것이 쿠로라는 것이 놀랍
지는 않았지만, 한편으로는 왜인지 안심이 되었다. 어쨌건 벨리타는 아니다. 데인도 벨리
타를 의심하지 않는다.
쿠로와 에무르, 그 둘이 만났을 테니 무슨 작당을 했을지 안 봐도 뻔했다. 자신을 밀어 버
리고 쿠로가 황제가 됐을 때 로카 왕국과의 관계를 더 유리하게 만들려는 수작. 그것도 나
쁘지 않았다.
“로카 왕국에게 서신을 보내시오. 에무르 왕자가 살아 돌아갈 것이라고. 죽어 마땅한 죄를
지었지만 이렇게 살려 보내는 우리의 큰 뜻을 꼭 잊지 말라 전하시오.”
누가 도왔는지 알면 되었다. 쿠로가 어떻게 해서든 에무르를 배에 태워 로카 왕국으로 보
낼 터. 한발 앞서 서신을 보내 버리면 그만이다.
로카 왕국과의 관계 호전으로 인해 입는 혜택은 지금 자신이 황제일 때 얻어야 한다. 에무
르를 죽이지 않고 살려 준 것은 자신이다.
쿠로가 아니다. 다만 신경이 쓰이는 건 쿠로가 나라 간 관계 개선을 위해서만 움직였냐는
것이다. 속으로 또아리를 틀고 있는 살모사 같은 사악한 쿠로에게 다른 꿍꿍이가 분명 있
을 것 같아서다. 그것이 예상되지 않았다.
그렇게 일단락된 문제였는데 지금 어두운 밤하늘을 올려다보며 다시 떠올랐다. 정말 벨리
타가 확실히 아닌가?
갑자기 흔들렸다. 지금이야 어떻게 변했건 그때는 둘이 죽고 못 살았으니 손잡고 야반도주
를 강행한 거다. 조금 전 다른 날보다 더 강하게 거부하고 나온 벨리타의 얼굴을 확실히 기
억한다. 그녀가 에무르를 도운 것이 아니라고 완전히 확신하기엔 시기상조라는 생각이 들
었다.
그는 가볍게 손을 들어 수신호를 보냈다.
자신을 그림자처럼 뒤따르는 안톤이 가까이 다가왔다. 그는 조용히 명령하고는 다시 가던
길을 걸어갔다.
황제 뒤에서 안톤이 신호를 보내자 다른 황제 기사단 몇 명이 어둠 속에서 모습을 드러냈
다. 그들이 황제 곁을 지키며 걸어가는 걸 지켜보던 안톤은 반대 방향으로 향했다.
***
벨리타는 제 침대에 팔다리를 쭉 펴고 누워 편안함을 만끽했다.
칼리크가 나가자 곧장 들어온 유모가 그냥 넘어가질 않았다. 왜 그냥 가시냐, 가시라고 했
냐, 두 분이 싸운 것이냐, 또 뭐라 뭐라 잔소리가 이어졌지만 귀담아듣지 않았다. 가끔 이
렇게 유모의 잔소리를 흘려들어야 정신 건강에 이로울 때가 있었다. 지금이 그때였다. 한
숨을 푹푹 내쉬던 유모가 포기하고 나가자마자 곧바로 침대로 뛰어들었다.
아. 넓고 좋다.
구석에 쪼그리고 자는 것도 못 할 짓이다. 일어나도 몸이 찌뿌둥한 것이 영 개운치가 않았
었다. 이제는 이렇게 확실히 말하면 칼리크가 들어주는 걸까?
스스로가 조금 발전한 느낌도 들어 약간의 뿌듯함도 있었다. 그런데 웬일로 그가 내 말을
들어준 걸까? 막 우기면서 제 맘대로 할 줄 알았는데. 항상 자신의 의견은 다 무시하고 들
이대길래 이번에도 그렇게 나올 거라 각오했다. 그래서 속으로 소파에서 자려는 생각까지
했었다.
지난번 그가 첫날밤을 입에 처음 올렸을 때 자신의 말을 듣고 한발 물러나 주었을 때는 마
냥 좋기만 했다. 그런데 이번엔 그가 생각보다 너무 쉽게 수락해 주었다. 게다가 지겹다는
말을 하니 살짝 맥 빠진 감도 없진 않았다. 너무 긴장하고 있어서 그런 것 같다.
오늘 밤은 저기 찜찜했던 곳도 철판으로 봉했으니 개운하게 잘 잘 수 있을 것이다. 칼리크
도 없이 이 넓은 침대를 혼자 다 차지하니 세상 편했다. 그런데…… 이 침대가 이렇게 넓었
던가? 저쪽 소파에 칼리크가 벗어 놓고 간 그의 가운이 눈에 들어왔다. 잠시 물끄러미 바
라보던 벨리타는 얼른 시선을 돌렸다. 어서 자는 게 좋겠다.
칼리크는 바로 잠들지 못하고 침대 위에 누워 멍하니 눈을 뜨고 있었다. 개운치 않았던 기
분 끝자락에 무거운 추가 하나씩 매달리고 있는지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무거워졌다. 아무
래도 유클로 왕국 문제 때문인 것 같다. 그거 외에는 이럴 이유가 없다.
그는 다시 잠을 청하기 위해 모로 누웠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뭔가가 불편했다. 흠… 앞으
로 쭉 뻗은 자신의 팔이 눈에 들어왔다.
무게감이 느껴지지 않는… 뭔가 허전한…. 그는 피식하고 짧은 웃음을 터트렸다. 쓸데없는
생각을 다 하다니, 벨리타는 이미 자고 있을 텐데 아니, 자고 있어야 할 텐데. 혼자서. 그는
더 이상 아무 생각도 하지 않으려 억지로 다시 잠을 청했다.
***
“아니. 눈이 왜 이렇게 빨개요? 잠을 잘 못 주무셨어요?”
유모가 걱정하는 말에 벨리타는 대답하지 않았다. 고개만 끄덕이면 되는 것을 하지 않았
다. 그냥… 뭔가 신경이 쓰여 잠을 잘 못 잔 것을 알리고 싶지 않았다.
유모가 이상하게 오해할지도 모른다.
“폐하가 자꾸 자러 오니 신경이 쓰여서요.”
반은 맞고 반은 틀리다. 하지만 유모에게는 자세히 말하고 싶지 않았다.
“폐하께서 오시는 게 싫으세요?”
“당연히 싫죠.”
망설임 없이 바로 대답이 나왔다. 이걸 어떻게 좋아해요? 그럴 만한 사이도 아니면서 자꾸
같이 자자 하니 싫은 게 당연하다. 형식상 부부라지만, 위험한 남자가 그녀의 방을 제 방
드나들 듯하며, 같은 침대에 드는 건 정말 곤욕이었다.
유모의 표정이 심각하게 변했지만 벨리타는 너무 졸려 보지 못하고 말았다.
“유모. 나 조금만 더 잘게요. 점심때 다시 깨워 줘요.”
벨리타는 다시 이불 속으로 들어가 잠을 청했다. 이제야 잠이 쏟아졌다. 밤새 잠을 잔 건지
안 잔 건지 깨다 자다를 반복하다 유모의 모습이 보이자 안심이 되어 스르륵 잠이 들어 버
렸다. 아마도 비상 통로 때문에 아직도 그 후유증이 남아 있던 모양이다. 단단히 막았는데
도 혼자 자려니 신경이 쓰였나 보다. 그 이유밖에 없다. 아니, 당연히 그 이유겠지.
벨리타는 뒤늦게라도 잠을 잘 수나 있지 칼리크는 처리해야 하는 나랏일로 아침 일찍부터
집무실에 나와 있었다.
눈도 피곤하고 온몸이 무겁게 처졌지만, 묵묵히 제 할 일을 해 나가고 있었다. 비가 오려는
지 창밖이 어두워 더 그의 기분을 무겁게 만들었다.
이런 적이 없는데. 자신은 비가 오건, 하늘이 맑건 어둡건 그 어떤 경우에도 지장을 받지
않았다. 할 일만 할 뿐. 날씨가 좋아 기분이 더 상쾌해진 경우는 있어도 날씨가 안 좋다고
더 나빠진 경우는 단 한 번도 없었다.
“아무도 들어가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인기척조차 없었습니다.”
그래야 맞지. 혼자서 자고 있어야 한다고 한 말대로 되어서 다행이었다. 벨리타한테 다행
이라는 소리다.
안톤이 어젯밤 그가 시킨 대로 벨리타 방을 지켜본 결과를 보고하고는 나가고 있었다. 이
건 확인 절차였다. 혹시나 자신을 내보내고 나서 벨리타가 딴짓을 하려고 하는 것은 아닌
지 알 권리가 있었다. 다른 남자를 부르는 건 벨리타의 특기다. 게다가 시기상 절묘했다.
에무르가 탈출한 그날 그녀가 자신을 거부하고 나온 것이. 그러니 이건 마땅히 필요한 절
차였을 뿐이다.
황제는 두 팔을 뻗으며 한껏 기지개를 켰다. 이리저리 몸을 좀 풀었더니 한결 머리도 개운
해지고 몸도 가벼워졌다.
이래서 가끔은 몸을 움직이면서 일을 해야 하는가 보다. 보좌관이 쉬지 않고 책상에 앉아
일만 하면 안 된다고 했는데 그 말이 맞다.
안톤이 나가고 나서 몸을 풀 것이 아니라 오기 전에 풀었다면 더 빨리 개운해졌을 텐데….
그런 생각을 하면서 내려놓은 서신을 상쾌한 기분으로 다시 집어 들었다.
드디어 창밖으로 비가 좍좍 내리기 시작했다. 창문에 빗방울이 부딪치는 소리가 요란하게
들려왔다. 아침인데도 하늘은 어둡고 공기는 축축해졌다. 하지만 칼리크의 표정은 가벼웠
고 점점 더 밝아지기 시작했다.
***
벨리타는 어제보다 더 빨리 제 방에 찾아온 칼리크를 멍하니 보고만 있었다. 이제 황당해
하는 것도 지쳤다. 그가 직접 자기 손으로 상자 하나를 들고 왔는데 그걸 물끄러미 보고 있
었다. 저게 뭐지?
“비가 와서 점심때 말타기 연습을 못 해 서운하진 않았소?”
아뇨. 전혀요. 덕분에 좀 더 잘 수 있어서 좋았어요.
그렇게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의 물음에 꼭 그것만을 묻는 건 아닌 듯한 뉘앙스가 풍겼다.
누가 서운했다는 소린가? 솔직한 게 반드시 좋은 건 아니다. 하지 않아도 될 말을 해서 상
대방을 실망시킬 필요는 없다. 그것보다 그녀는 저 상자가 더 궁금했다.
“오늘은 피곤하니 일찍 잡시다.”
그 말밖에 할 줄 몰라요? 그리고 왜 여기서 자는 걸 당연하다는 듯이 말하는 건데요? 당신
나한테 왜 이래요?
벨리타는 여전히 한자리에 우뚝 서서 그를 별로 반기지 않는 눈빛을 한 채 계속 침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