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화 적응해 봐
벨리타는 이래도 되나 싶어 약간 염려스러웠다. 이러면 또 와서 잔다고 할까 봐 염려스럽
다는 말이다. 이런 물건이 있으면 칼리크야 편히 지내겠지만 자신은 편치 않은데 이번만큼
은 유모가 서둘렀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러니 더 이 황궁이 갑갑하게 느껴졌다. 성질 뭐 같은 칼리크에게서 제 물건을 마음대로
손댔다고 불호령이라도 떨어지면 어쩌나, 그것도 은근 걱정이 되었다.
***
“왜? 가만히 있어도 황제가 될 텐데. 아니면 황제가 신수 발현 조짐이 보였나?”
쿠로는 있는 힘을 다해 정신을 가다듬었다. 아직 그 사실은 아무도 모른다.
“그럼 계속 지하에 갇혀 있게 해야 옳았겠네. 저 미친 황제가 언제 갑자기 죽일지도 모르
는 그 지하에 말이야. 왕자를 생각해서 이리 미리 움직인 건데 내가 잘못 생각했나 보군.
죽게 내버려 둘걸.”
에무르는 후회 가득한 표정을 짓는 쿠로를 바라보며 그가 처음에 강조하듯 내뱉은 말이
떠올랐다. 생명의 은인.
“자네도 살리고 백성도 살리고. 내 뜻을 아직도 모르겠나?”
백성을 살린다는 말은 개소리고. 어쨌건 지금은 자신의 목숨을 쥐고 있는 이놈과의 협상만
잘 된다면 로카 왕국에게도 자신에게도 이득이다. 그러니 일단은 수용하기로 했다.
“그럼 한 가지 더. 개인적으로 정말로 원하는 게 있다.”
“뭐든지.”
수락만 한다면 한 가지가 아니라 그 이상도 들어줄 용의가 있다.
“벨리타.”
느닷없이 에무르 입에서 튀어나온 그 이름에 쿠로는 가면 쓰는 걸 깜빡 잊은 채 놀란 표정
을 지었다.
“벨리타는 나에게 줘. 원래 계획대로 내 나라로 데려가 왕비로 만들어 줄 거다.”
눈물겹다. 그러니 손잡고 야반도주를 하다 황제에게 걸린 거겠지.
쿠로는 뜻밖의 요구에 잠시 생각 중이었다.
[요즘 에무르한테 꽂힌 건지, 황제한테 꽂힌 건지…….]
산티노 공작이 했던 말이 선명하게 떠올랐다. 재수 없었던 그 말이. 다시 떠올려 봐도 열이
받았다.
어차피 계약한 것을 먼저 깬 건 벨리타다. 영악하게 머리라도 잘 굴리는 여자인 줄 알았더
니 그게 아니었다.
그냥 몸뚱이만 근사한 여자였다. 그저 아무 남자나 밝히는. 순애보인 에무르를 만나 적당
히 맞장구치며 즐겼을 것이다.
야반도주도 즉흥적이었다고 장담할 수 있다. 아무 생각도 안 하고 사는 여자, 그런 것이 부
모 잘 만나 황후씩이나 하고 있다니, 경을 칠 노릇이다. 그런 주제에 자신을 차 버린 거다.
그 어떤 말 한마디 없이.
“좋소. 그리 어려운 건 아니지.”
흔쾌히 수락했다. 어차피 자신이 황제가 되면 황후 자리에 그대로 앉혀 주겠다는 계약은
이미 물 건너갔다.
그렇게 하더라도 자신은 황비를 하나 가득 뽑아 놓고 맘껏 즐길 생각이었다. 아무리 천하
의 벨리타라고 해도 자신하고는 상성이 맞지 않았다.
희열은 다른 여자 쪽이 더 나았다. 그러니 그녀는 자리만 차지하고 있게 만들 생각이었다.
그녀 뒤에 있는 부유한 펠론국의 지원이 필요한 것뿐. 그러나 이제 황제가 되는 것도 위태
로워진 마당에 펠론국이나 벨리타가 그에게는 황제 자리보다 더 가치 있는 것들이 아니었
다. 그러니 에무르, 너 가져!
팽팽하게 맞서고 있던 두 사람은 갑자기 동지가 된 분위기 속에서 자세한 사항을 의논하
기 시작했다.
***
불호령은커녕 칼리크가 아주 좋아했다. 자신의 가운을 입고 소파에 편하게 앉아서는 마치
제 방에 있는 것처럼 흡족한 표정을 지었다. 문제는 문제다. 왜 또 왔는지. 어제도 와 놓고
오늘도 또. 게다가 정말로 오늘 세 번씩이나 만나게 되니 혹시 계속 이러는 건 아닌가 싶어
벨리타의 마음은 심란했다.
자신의 이름을 불러 주던 감미롭게 느껴졌던 그의 목소리.
온몸이 흐물흐물해졌던 그의 키스.
호탕하고 시원스럽게 들려 좀… 멋있었던 그의 웃음소리.
뭔가 잘못되었다. 이러면 안 되는데…. 점점 그의 마력에 휩쓸리는 것만 같았다. 이렇게 되
면 그가 의도한 대로 흘러가게 생겼다. 좀 더 경계해야겠다. 이렇게 자주 만날 것이 아니라
조금 거리를 두는 게 맞을 것 같았다.
게다가 제 방인데 편히 쉬지도 못하고 하루 종일 그에게 시달리는 느낌이어서 그런지 피
곤해졌다.
하~~
“일찍 잘까?”
합. 하품을 하다 말고 중간에서 바로 멈추었다.
하품 하나도 맘대로 못 하겠네. 잠깐. 자다니? 그럼 쉬었다 가는 게 아니라 또 자고 간다
고?
미치겠다. 어떻게 해야 저 황제를 이 방에서 내쫓…… 아니 나가게 할 수 있을까? 아무리 이
리저리 궁리를 해 봐도 마땅한 것이 떠오르지 않았다.
벨리타의 표정은 역시 관람용이다. 뭘 생각하는지 표정이 확확 바뀌는데 여간 재미있는 것
이 아니다. 무슨 생각을 하는 거지?
“잠은 편한 곳에서 자야 피로가 풀리고….”
“난 여기가 편한데?”
그를 방에서 내보낼 말을 시도하다 끝까지 말하지도 못한 채 바로 중단해야만 했다.
“내가… 편하지 않아서….”
“적응해 봐. 처음이라 그래.”
이 말은, 칼리크는 적응을 했다는 말이다. 그새? 이렇게 빨리? 이런 일이 많았던 모양이다.
처음도 아니라는 소리다.
갑자기 기분이 무지 나빠지기 시작했다.
당신은 어떤지 몰라도 난 남자와 같이 잠을 자는 게 처음이라고요. 어떻게 이게 적응돼요?
소란스러운 제 마음을 벨리타는 애써 숨겨 버렸다.
“그럼 저희 쪽에서 어느 정도 준비를 하고 나서 그 이후에….”
“이만하면 됐어. 뭘 더 준비할 게 있지?”
말 좀 끝까지 하면 안 될까요?
벨리타는 말하는 족족 그가 끊어 먹고 들어오는 통에 가뜩이나 잘 돌아가지 않는 머리가
더 굳어져 버렸다.
“홍차 드실래요?”
얼른 차 한 잔 주고 내보낼 생각에 그녀는 찻잔이 세팅된 테이블로 다가갔다.
“시원한 홍차밖에 없네.”
바로 유모를 부르려고 하는 그녀를 칼리크가 제지했다.
“그거 먹을 만하던데? 같이 마시지.”
어라?
그는 뜨거운 홍차밖에 안 마신다고 했는데 이러면 오히려 잘됐다. 차가우니 빨리 마실 수
있어서. 발칙한 발츠 때처럼 얼른 마시게 하고 등 떠밀어 내보내야겠다.
벨리타는 그와 같이 시원한 홍차를 홀짝거렸다. 칼리크는 목이 탄 사람처럼 시원스럽게도
한 번에 쭉 들이켰다. 더 잘됐다.
“제가 오늘은… 그날이라 혼자 자야 할 것 같아요.”
이 정도 말하면 오늘은 그냥 돌아갈 것이다.
“그래? 알았소.”
칼리크가 이번에도 시원스럽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다행이다. 안녕히 가세요. 여긴 자주 오지 말아요. 제발.
어?
왜 그가 다시 침대에 벌렁 누워 버리는 건지 모르겠다. 문으로 향하는 줄 알고 배웅하려고
같이 일어선 벨리타는 벙찐 표정이 되었다. 가기 전에 한번 누워 보려고… 아니다. 무슨 침
대 테스트하는 사람도 아니고. 안 돼!
“지금 그날이라고 했는데요.”
“알았다고 했는데?”
그런데도 왜 거기 누워 있냐고 세모꼴로 뜬 눈으로 물었다.
“잠만 자는데 무슨 문제가 있지? 누가 당신을 안는다고 했나?”
칼리크는 야무진 생각까지 한 벨리타 때문에 입술이 슬쩍 벌어졌다.
침대에서 잠만 자고 가니 은근 이런 식으로 압박하려나 본데. 환상적인 키스 좀 했다고 널
안고 싶어 안달이 난 줄 알면 곤란하지. 좀 더 유혹을 화끈하게 해도 안을까 말까인데 너무
쉽게 본다. 반성해. 벨리타.
“그래도 자꾸 이렇게 같이 자게 되면….”
“부부가 같이 자는 게 당연하지. 그동안이 비정상이었던 거고.”
아. 우리가 부부였지? 잠시 낯선 남자와 조금 친해진 자신의 상황만 생각했다. 원작 내용을
망각하고. 칼리크는 4년이나 된 아내에게 하는 행동이라 그럴 수 있다 쳐도 자신은 도저히
무리다.
“잠만 자도 같이 누워 있는 게 사실 너무 불편해요.”
이제 철판으로 그 끔찍한 비상 통로도 막았겠다 그가 이젠 필요가 없었다. 그에게는 미안
한 말이지만. 발츠 때처럼 간단하게 끝나지 않아 벨리타는 속이 타들어 갔다.
그래서 시원한 홍차는 다 마셔서 없길래 뚜껑 덮인 유리잔에 있는 물을 벌컥벌컥 마셨다.
자기 전 꼭 유모가 챙겨 주는 보약 같은 물이었다. 그런데 이번엔 조금 더 떫었다. 방금 홍
차를 마셔서 그런가 보다. 갈증이 좀 가시자 벨리타는 솔직하게 말했다.
“칼리크. 오늘은 피곤해서 혼자 있고 싶어요.”
칼리크는 그녀의 얼굴을 유심히 살폈다. 정말 그러고 싶다는 표정이었다. 이것이 연기이건
무슨 꿍꿍이가 있건 이러고 나오는데 억지로 여기 누워 있을 필요는 없다. 행여나 자신이
더 원하는 것처럼 착각을 불러일으킬까 봐 그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하긴 하루에 세 번씩 만나니 지겹기도 하지. 오늘은 편히 쉬시오. 혼자서.”
오늘만 날도 아니고 흔쾌히 물러나 주는 것이 그녀의 계획대로 따르지 않는 거다. 두 번 자
고 갔을 뿐인데 이렇게 나오면 자신이 매달릴 거라 생각했나? 제발 여기서 재워 달라고?
영악하네. 만약 다른 꿍꿍이가 있어서 이러는 거라면…. 그는 여기에서 생각을 멈추었다.
우선 여기서 나가는 것이 우선이다.
칼리크는 홍차 잘 마셨다는 인사를 남기고 느긋한 발걸음으로 그 방에서 나왔다.
그가 나가고 나자 벨리타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소파에 무너지듯 주저앉았다. 힘들었다.
세 번씩이나 만나니 지겨운 건 맞는데 그도 그렇다는 말인가? 그러면서 왜 또 찾아와? 그
지겹다는 말이 은근 신경이 쓰이긴 했다. 어쨌건 오늘 밤은 편안한 잠을 확보했다. 순순히
자신의 말을 들어준 칼리크가 의외였지만 이것 또한 나쁘지 않았…… 그래, 나쁘지 않았다.
정말로 혼자 편히 쉬고 싶었으니까.
칼리크는 제 방으로 향하면서 기분이 좀 묘했다. 절대 기분이 상한 건 아니다. 그러려면 상
대방에게 마음이 있어야 한다. 그건 아니니, 절대 아니니 지금 이 일로 기분이 상할 리가
없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기분이 개운치는 않았다.
밤하늘에 구름이 잔뜩 껴 있는지 달조차 보이지 않았다.
낮에 데인과 나누었던 대화가 새삼 떠올랐다.
“에무르 왕자가 탈출하였습니다. 폐하.”
그래? 황제는 단순히 눈썹만 슬쩍 올려 반응한 게 다였다. 생각보다 늦었네. 더 일찍 탈출
할 줄 알았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