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화 왜 그 이름이 여기서 나와!
일반적으로 말 같은 걸 선물하면 이름 정도는 받는 사람이 지으라고 할 텐데 역시 황제다
싶기도 했다. 어쨌건 어떤 이름이 나올까? 그와 전혀 어울리지 않는 행동이라 궁금하지 않
을 수 없었다.
“알고 싶소?”
“그럼요.”
어서 말해 봐요. 전혀 감도 못 잡겠다. 만약 귀여운 이름 같은 게 그의 입에서 나오면 어떤
반응을 해야 할지 생각만 해도 손발이 오그라들었다.
“벨롱.”
와장창, 뭔가 깨지는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분위기 깨는 덴 여전히 금메달감이다. 손발이
오글거릴 준비까지 하고 있었는데…. 왜 그 이름이 여기서 나와! 그녀의 표정이 황당함과
무안함으로 멍해졌다. 핑크빛 솜사탕 같던 공기가 순식간에 무너졌다. 이렇게 만드는 것도
재주다.
“시간이 없으니 이 벨롱을 타고 한 바퀴만 돌아볼까? 벨롱, 가자!”
웃음을 참는 그의 목소리가 들리더니 말이 움직였다. 벨리타는 순하게 움직이고 있는 말
등 위에서 입술을 삐죽거렸다.
“왜 이렇게 부어 있소? 벨롱이 마음에 안 드오?”
침묵했다. 앞만 보고 시선도 돌리지 않았다.
“벨롱. 네 주인이 널 싫어하나 보다. 벨롱. 벨로롱으로 바꿀까? 아니지? 벨로롱보다는 벨롱
이 더 좋지?”
이렇게 말을 많이 하는 칼리크는 또 처음 본다. 그 바람에 그녀의 시선이 그에게로 돌려졌
다. 더 이상 참지 못하겠다는 듯 웃음을 터트리는 칼리크의 모습이 그리 속상하거나 기분
상하지 않았다.
조금 삐져 있었던 건 사실이지만 그가 이렇게 즐거워하는 모습이 꽤 봐 줄 만했다. 이제 자
신에게 장난까지 치고. 이런 모습이 좋게도 보였다. 그래서인지 그의 웃음소리가 너무나
호탕하고 시원시원하게 들렸다. 한마디로 조금…… 멋있었다.
“벨롱. 내일 만나자.”
또 이렇게 불러 보니 괜찮은 이름 같았다. 아니 입에 착착 붙었다. 어감이 귀엽기도 하고
부르기도 쉬웠다.
한 바퀴 돈 다음, 말에서 내려 그렇게 인사하는 벨리타를 보며 칼리크는 여전히 즐거워했
다. 자신이 지었어도 정말 잘 지었다.
처음 벨롱이라고 말했을 때 놀라며 황당해하다 삐지는 벨리타의 얼굴이 예상했던 그대로
였다. 하루 종일 그녀의 표정이 어떻게 달라지나 쳐다만 보고 있어도 지루할 틈이 없을 것
같았다.
오래 같이 있어도 이젠 편하고 즐거웠다. 그럼 더 오래 있어 볼까? 제 생각에 웃으며 걸어
가던 황제는 집무실에 다다를 때까지도 그 웃음이 여전히 남아 있었다.
***
에무르는 지금 자신이 들은 이야기를 정리해 보기 시작했다. 어마어마한 이야기를 이 작자
에게 들어서인지 정신이 멍해졌다. 머리를 몇 번 흔들면서 다시 정신을 차리려고 노력했
다. 지금 잘 판단해야 한다. 득과 실을 정확히 계산하고 더 유리한 조건을 받아 내야 한다.
이 작자의 언변에 말려 손해 보는 장사를 하면 절대 안 된다.
그러니까 무사히 로카 왕국으로 돌아가면 시기를 봐 3개월쯤 후에 다시 군대를 이끌고 이
나라를 치라는 소리다.
“왜 3개월 후?”
쿠로는 머리 나쁜 에무르에게 인내심을 가지고 찬찬히 설명을 해 주었다.
“유클로 왕국을 치러 가면 고전을 면치 못할 터, 100만 대군이 몰살당하려면 그 정도 시간
은 지나야 하지. 이 나라 황궁은 주인도 군대도 하나 없이 텅텅 비어 있고. 그러니 그때가
적기지.”
네 머리가 텅텅 비어 있는 것처럼 여기도 그렇다는 말이지.
쉽게 끝날 것 같은 이 자리가 마음에 쏙 들었다. 산티노 공작에게서 받은 설계도로 황궁 아
래 비밀 통로가 에무르가 갇혀 있는 서쪽 탑 지하와 근접하게 지나가고 있는 걸 확인하고
는 사람들을 비밀리 고용했다.
가장 가까운 곳까지 들어가서 서쪽 탑 지하 쪽으로 밤새 땅을 파며 길을 만들었다. 그렇게
지하 바닥을 뚫고 올라가 에무르를 여기까지 끌고 올 수 있었다. 쿠로는 애쓴 보람이 있어
여간 만족스러운 것이 아니었다.
“다 지쳐 있는 군대와 황제를 우리 군사들이 죽이고 나면 네가 황제에 오르고?”
“다시 한번 말하지만 내가 황제에 오르면 이 제국 중 렉서 왕국을 주지. 그렇게 되면 이 대
륙에 식민지를 두려는 로카 왕국의 오랜 염원을 이루게 되는 거고. 어때?”
흠….
렉서 왕국이 로카 왕국의 복속국이 된다… 이 정도만 해도 큰 과업을 이루게 되는 셈이다.
형님의 업적을 따라갈 수 없어 애당초 왕권은 포기하고 대사의 지위로 이 나라 저 나라 떠
돌아다니며 보냈지만, 딱히 괄목할 만한 성과는 들고 간 적이 없었다.
로카 왕국에서도 자신의 이미지는 ‘각국으로 놀러 다니는 한량 왕자’였다. 그러니 쿠로가
내민 조건을 얼른 잡아야 맞지만 자고로 협상이란 팽팽하게 해야 하는 법. 에무르는 더 큰
걸 받아 내기 위해 진짜 협상에 들어갈 생각이다.
“지금 장난하나? 고작 렉서 왕국? 부유한 펠론국이면 모를까.”
이렇게만 되면 로카 왕국으로 돌아갔을 때 추앙받는 정도를 넘어서 대신들의 지지로 둘째
왕자인 자신도 왕이 될 수 있다. 아니, 거의 그렇게 되고도 남는다. 이제 대반전이 일어날
수도 있다는 말이다. 하지만 쉽게 수락하지 않을 것이다. 이 제국에서 가장 부유한 펠론국
을 넘긴다고? 아무리 쿠로라고 해도 이런 협상은 절대 하지 않을…….
“그러지. 내 뜻대로만 해 준다면. 펠론국을 과감히 포기할 수 있지.”
에무르는 믿어지지 않는 표정을 감추지 않았다. 쿠로처럼 가면을 자유자재로 쓰지 못한다.
미치지 않고서야 이걸 수락한다고? 정말로 내가 왕이 될 수도 있다는 말이다. 잡아야 한다.
하나 어딘가 허점이 숨어 있을지도 모르니 정확히 찾아내야 한다.
“그렇게 되면 우리 로카 왕국의 이득이 더 큰데 이런 협상을 하는 이유는?”
여기까지는 꼴에 왕자라고 짚어 낼 수 있다 여겼다. 당연히 물어봐야 하는 점이고. 완전 헛
똑똑이는 아니라는 생각에 쿠로는 팽팽해진 협상 자리에서 더 신중하게 답을 골랐다. 어차
피 지금은 자신의 계획대로 에무르가 움직여 주기만 하면 된다. 황제가 되고 나면 펠론국
은 그때 다시 결정하면 된다. 사실 줄 마음이 없다. 미쳤다고 가장 알짜인 나라를 줘.
“평화. 이 땅의 평화를 위해서요. 이 나라 백성을 위하고.”
에무르는 속으로 콧방귀를 뀌었다. 백성까지 위해? 너 같은 놈이? 아무리 놀고먹는 것처럼
보여도 사람 하나는 제대로 본다. 특히 저 작자처럼 속이 시커먼 놈은 첫눈에 알아본다.
“어차피 내가 황제가 되어도 로카 왕국이 이 땅을 호시탐탐 노리는데 전쟁이 일어나는 건
정해진 법. 백성들을 위해 아예 그 전쟁을 없애려고 하오. 평화적인 협상으로. 이 큰 뜻을
위해 펠론국 하나 정도는 가슴이 쓰리지만 포기할 수 있소.”
이론적으로는 맞는 말이다. 정말로 백성을 위하는 성군이라면 일리가 있는 말이다. 그런데
이 작자가 말을 하니 무슨 꿍꿍이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절대 앞에서 하는 말이 진실일
리 없다. 뭔가 더 있다.
“다 좋은데. 이런 협상을 하기엔 이른 것 아닌가? 당신이 황제가 된 다음에 해야 순서가 맞
지 않나?”
쿠로는 침을 꿀꺽 삼켰다.
오호. 이것 봐라. 생각했던 것보다는 왕자 흉내를 제대로 내고 있다. 그래 봤자 넌 날 못 이
겨.
“하루라도 빨리 이 땅에서 전쟁을 종식시키려고 하는 것이오. 어차피 내가 황제가 될 텐데
조금 더 빨리 확답을 받고자 하는 것이 그리 잘못이오? 지금 황제라는 놈이 어떤지 잘 알
지 않소. 피에 굶주린 미친 황제. 그러니 이 일을 해낼 사람은 나밖에 없소.”
쿠로가 갑자기 인자한 성군의 표정을 지으며 간곡히 부탁하는 자세를 취했지만, 거기에 속
을 에무르가 아니었다. 저 본성을 아는데 어디서 개수작을 부리나.
“이제 반년도 안 남았는데 가만히 있어도 당신이 황제가 되는 거 아닌가? 그다음 이 일을
추진해도 된다 생각하는데. 고작 몇 달 앞당기자고 우리 군대를 끌어들여 황제를 죽여 달
라?”
쿠로는 조금 긴장했다. 펠론국을 잃더라도 자신이 황제가 되는 것이 중요하다. 이대로 있
으면 그 자리도 차지하지 못하게 된다.
“왜? 가만히 있어도 황제가 될 텐데. 아니면 황제가 신수 발현 조짐이 보였나?”
헉!
쿠로는 급히 가면을 썼다. 당황하지 않은 척 이를 악물고 유지했다.
이 개같은 놈이 거기까지 추리해 냈다. 머리는 장식으로 달고 다니는 놈인 줄 알았더니 그
게 아니었다. 이제야 한 나라의 왕자로 보였다. 왕자 흉내만 내는 것이 아니었다. 자신의
계획을 말할 때는 이해를 못 하는지 자꾸 되묻고 확인하는 에무르를 보며 친절하게 다시
설명해 주었지만, 속으로는 한껏 비웃으면서도 만족했다. 머리가 아주 아둔한 것이 마음에
들었다.
그런데 갑자기 훅 치고 들어왔다. 저 정도의 머리가 있을 거라고는 예상하지 못한 그로서
는 한 대 얻어맞은 듯 머리가 띵했다. 지금 쿠로의 입장에서는 절대 반가운 현상은 아니었
다. 그냥 무식한 바람둥이여야 자신에게 유리한데 이렇게 나오니 미치고 팔딱 뛸 노릇이었
다.
***
보기만 해도 끔찍한 나무 문을 철판으로 덮고는 아예 대못까지 박아 완전히 봉해 버렸다.
유모 덕에 비밀리 사람을 불러 잘 처리할 수 있었다. 이러니 이젠 완전히 안심이 되었다.
그 위에 놓여 있던 소파도 제자리로 돌려놓았다.
아. 정말 이런 일도 지겹다. 그냥 황궁에서 일어나는 일들이 다 자신을 괴롭히는 일투성이
다. 잠깐이라도 이런 황궁에서 벗어날 수 있는 방법도 없고.
벨리타의 얼굴이 점점 어두워져 가고 있을 때, 언제나 바쁜 유모가 보좌관을 부리나케 만
나고 왔다. 그런데 뭔가를 이것저것 들고 들어왔다.
“그건 폐하의 가운 아니에요?”
실내에서 신는 슬리퍼, 은으로 만든 물잔, 오일이 담긴 병 같은 것도 있었다. 이게 다 뭔지
모르겠다. 왜 이 방 여기저기에 놓이고 있는지도. 부산하게 움직이고 있는 유모를 의아한
눈으로 바라보며 답을 기다렸다.
“계속 폐하께서 여기를 찾으시는데 조금이라도 편히 지내시라는 마음에 이렇게 가져왔지
요.”
“그래도 허락도 안 받고….”
“보좌관하고 다 말이 되었어요. 그러니 걱정 마시고 또 찾아오시면 편히 지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