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화 이런 선물을 다 준비하다니
벨리타는 점점 능청스러워지는 황제의 얼굴을 다시 한번 살포시 째려보고 난 뒤, 유모를
불렀다.
유모만 신이 났다. 아니 황제도 기분 좋은가? 여기서 기분이 별로인 사람은 그녀 한 사람
뿐이었다. 유모의 지시로 테이블에 가득 차려 놓은 식사를 두 사람은 조용히 먹기 시작했
다. 별로 입맛이 없어서 아니, 있던 입맛도 달아나 버려 벨리타는 천천히, 아주 천천히 수
프만 홀짝홀짝 떠먹고 있었다.
반면 칼리크는 며칠 굶은 사람처럼 아주 맛있게 싹싹 비우고 있었다. 얼마나 계속 먹는지
도무지 식사 시간이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그럼… 이따가 정원에서 바로 만날까요?”
뭘 하루에 두 번이나 같이 식사를 하나 싶어 그녀는 슬쩍 그의 의중을 떠보았다.
“뭐 하러? 같이 먹고 움직이는 게 낫지.”
들리지 않게 한숨을 또 내쉰 벨리타는 그나마 먹고 있던 수프의 맛이 매일 유모가 챙겨 주
는 약처럼 쓰게 느껴졌다. 이러다간 한숨쟁이로 등극할 것 같았다.
“하루에… 두 번이나 만나네요.”
내 말을 좀 알아들으라고요.
“아니. 세 번일 텐데?”
세 번? 어떻게 세 번?
뾰족해진 눈매로 의아한 표정을 짓는 벨리타의 얼굴 때문에 칼리크는 웃음을 터트렸다. 불
만스러운 눈으로 궁금해하는 표정을 지으니 여간 우스운 게 아니었다. 이렇게 자신이 웃으
니 더 당황하면서 떨떠름한 표정으로 변해 가는 벨리타의 얼굴은 봐도 봐도 흥미를 자아
냈다. 시시각각 변하는 그녀의 표정이 무슨 뜻을 담고 있는지 손에 잡히듯 읽히는 것이 그
흥미를 배가시켰다.
“저녁때도 또 올 거요. 그러니 세 번.”
이제 입까지 떡 벌리며 황당해하는 벨리타를 바라보며 기어코 황제는 크게 웃음을 터트렸
다.
식사 시중을 드는 유모는 과일주스를 들고 들어오다 흡족하게 지어지는 미소를 얼른 감추
었다. 폐하 앞이다. 이 방 안에서 폐하의 호탕한 웃음소리를 듣게 될 줄이야. 귀를 즐겁게
했다.
“왜 시원한 홍차가 아니오?”
식후 음료로 벨리타가 과일주스를 마시자 황제는 정말 궁금해서 물었다. 하지만 지금 배배
꼬인 벨리타에게는 그것도 또 하나의 시비로 받아들여졌다.
“내가 맨날 그것만 먹는 줄 아세요?”
날카롭게 들리는 벨리타의 말에 황제는 또다시 미소를 지었다. 자신이 그걸 기억해 주니
좋으면서도 내색하고 싶지 않아 저런다는 게 다 보였다.
귀엽네. 최근 귀엽다는 생각을 종종 하는 것 같았다. 하긴, 귀여운 걸 귀엽다고 하는 것이
뭐가 잘못됐나?
기분 좋게 아침까지 먹고 벨리타의 방을 나서는 황제는 머리 아프던 것이 해결된 건 아니
지만 그래도 상쾌함을 맛보고 있었다.
어제 미뤄 뒀던 업무를 하기 전에 더 중요한 일부터 해야겠다.
시급을 요하는 일.
더 이상 미룰 이유가 없다.
벨리타가 알면 안 된다. 모르게 움직여야 한다.
황제는 안톤을 부르라 명하고는 자신의 집무실로, 잠깐 쉬고 돌아갈 줄 알았던 집무실로
이제야 서둘러 향했다.
***
히이잉.
사납게 달려가던 말이 울음소리를 내자 말 등 위에 눈이 가려진 채 엎어져 있던 에무르는
숨을 죽였다. 여기에 실린 다음 계속 심하게 발버둥을 쳤더니 말이 성이 난 모양이었다. 어
디로 데려가 죽일 것인지, 그것이 두려워 온몸이 떨렸다.
에무르는 그 황제 놈이 쥐도 새도 모르게 저를 죽이라 명했다고 확신했다. 그러고도 남을
놈이다. 벨리타와 그렇게 놀아났으니 저를 가만두면 남자가 아니겠지.
절대 살려 둘 리가 없다. 이렇게 되면 로카 왕국에서 가만히 있지 않을 거다. 그걸 감수하
고도 저한테 이러다니. 벌거벗은 채 서쪽 탑에 갇혀 있는 것도 쪽팔려 죽을 뻔했는데 이럴
거였으면 처음부터 바로 목을 치지. 왕자 체면에 그런 쪽팔림보다는 차라리 죽는 게 더 나
았다.
그동안 허풍을 떨고 강한 척했지만 죽을까 봐 두려웠다. 이젠 으슥한 골짜기에서 모가지가
날아갈 일만 남았다. 극도의 공포감에 휩싸인 에무르는 그냥 이대로 기절하고 싶었다. 깨
지 말고 그대로 이 세상 마감하는 게 더 좋을 것 같았다.
누군가 들어와 자신의 눈을 가린 채 다짜고짜 어디론가로 끌고 내려갔다. 내려가? 더 지하
로 내려가는 건가. 그 의문도 잠시 말 등위에 실려지고 떨어지지 말라고 말과 자신을 묶는
것 같더니 이내 빠른 속도로 말이 달려 나갔다. 주변에 같이 달리는 말 발굽 소리가 여럿
들렸다. 이들이 누구인지 얼굴조차 보지 못했다. 자고 있는 사이 이들에게 당한 것이었다.
말에 실려 꽤 오래 달려가는 것을 보니 이미 황궁을 빠져나온 듯싶었다. 인적 없는 곳으로
달린다는 것도 알았다. 아무에게도 눈에 띄지 않는 길로. 벌건 대낮에 이런 엄청난 대참사
가 일어날 수 있는 것만 봐도 당연히 황제 짓이다. 밤까지 기다릴 필요도 없다는 거다.
엉덩이를 훤히 드러낸 채 말 위에 얹혀 달려가고 있다는 건 신경도 쓰이지 않았다. 그만큼
죽으러 가는 이 길이 너무나 끔찍했다. 숨이 쉬어지지 않는다. 기어코 에무르 왕자는 눈을
까집으며 기절을 했다.
***
쎄하고 시큼한 냄새가 갑자기 콧속으로 훅 들어오자 기절해 있던 에무르는 경기를 하며
눈을 떴다. 눈앞에 이상한 약병을 들고 있는 하인이 보여 더 기겁을 했다.
여기가 도대체 어디지?
에무르는 정신이 나간 상태에서도 주변을 휘휘 둘러보았다.
산속이 아니었다.
방이었다.
커튼을 다 내린 어두컴컴한 방. 밀실인가? 여기서 쥐도 새도 모르게 죽이는 건가?
밧줄에 묶인 에무르의 벌거벗은 몸은 다시 사시나무 떨듯 달달달 떨리기 시작했다.
“나를 알아보겠나?”
자신한테 음산한 목소리로 저렇게 묻는 사람은 분명 황제이리라.
에무르는 고개를 들어 떨리는 눈빛으로 목소리를 낸 남자를 쳐다보았다. 어둠 속에 잠겨
있긴 했으나 서서히 그 윤곽이 드러났다.
바로 그의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입이 벌어지고 콧구멍이 다 벌렁거렸다.
너는!!!
***
황제는 벨리타와 다시 점심을 먹기 전, 안톤에게 물었다.
“시킨 일은?”
“이미 다 처리했습니다.”
안톤은 고개를 숙여 답했다.
고개를 끄덕인 황제는 벨리타를 만나기 위해 발길을 돌렸다. 그녀가 알면 안 된다. 절대 비
밀이다.
황제는 아무것도 모르는 벨리타가 여전히 맛있게 식사하는 걸 지켜보며 흡족해했다. 나중
에 놀라겠지만 그녀를 위해서다. 이미 마음이 떠났는데 계속 가까이에 둘 필요가 없다. 그
래도 알게 되는 순간, 어떤 반응을 보일지 궁금해지는 건 사실이다. 기대가 된다. 황제의
두 눈이 그녀 모르게 슬쩍 번쩍거렸다.
***
너는!!!
에무르는 이 작자가 왜 자신의 앞에 있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황제가 아니라 왜 네가!
아니다. 황제가 시켜 이럴 수도… 아니다. 이것도 말이 안 된다. 저놈은….
“쿠로 브누아 대공.”
황제의 적이다.
“영광이군. 날 기억해 줘서.”
에무르의 눈빛이 날카로워졌다. 저렇게 말하며 거들먹거리는 상대방은 별로 기억하고 싶
지 않은 놈이었다. 멀찍이 몇 번 본 적이 있고 특히나 벨리타에게서 가끔 이름을 들었던 놈
이었다.
그때마다 기분이 상해 다른 남자 이야기는 하지 말라고 부탁한 기억까지 있다. 신수가 먼
저 발현된, 차기 황제라는 말을 벨리타에게 들으니 기분이 좋을 리 없었다. 그것도 들뜬 목
소리로 얼굴을 빛내며 말하는 벨리타에게 상처까지 받았었다.
에무르는 인상을 팍 구겼다. 그런 저놈이 왜 나서서 자신을 여기로 끌고 왔는지 이제는 그
것이 의문이었다. 딱 봐도 자신을 죽이려고 데려온 건 아니다. 그 정도 눈치는 있어야 타국
에서 왕자 노릇도 해 먹는다.
“언제까지 날 묶어 놓을 거지?”
그래도 왕자다. 황제한테도 말을 텄는데 한낱 대공인 이놈에게 격식을 갖출 생각은 일절
없다.
에무르는 왕자의 위엄을 갖추고 쿠로에게 말했다.
하! 웃기지도 않는다. 쿠로는 속으로 한껏 비웃었다. 원래 일개 왕국 왕자의 위치는 제국의
대공보다 아래다. 아무리 타국에서 사절단을 이끌고 온 왕자라 할지라도. 그래도 좋게 생
각하기로 했다. 눈치 하나는 빨라서 좋다. 이래야 대화가 통하지.
방금 전만 해도 벌거벗은 채 바닥에 엎드려 발발 떨던 개 같은 모습이었는데 바로 눈치를
채고 명령조로 말하는 에무르가 가소로우면서도 한편으로는 다루기 쉬워 보여 만족스러
웠다.
밧줄이 풀리자 손발을 이리저리 움직이며 푸대접을 받았다는 걸 적나라하게 표시하는 에
무르, 너무나 불만스러워하는 에무르의 모습이 계속 우습게 보였다.
꼴에 왕자라고 알몸인 상태로 자신 앞에 당당하게 서 있는 꼴이 같잖았다. 하지만 그의 다
리를 훑던 쿠로의 표정이 점점 굳어져 갔다. 벨리타가 저놈을 좋아했단 말이지. 이 부분은
심하게 자존심을 상하게 만들었다. 쿠로는 심호흡을 하며 대업을 위해 그런 하찮은 건 밀
어 버렸다.
“자. 우리 이제 협상을….”
“이 꼴로 무슨 협상!”
우스꽝스러운 꼴을 한 에무르가 꽤 힘찬 고함을 지르며 쿠로를 제지했다. 쿠로는 자신의
말을 막아선 것이 불쾌했지만 이 정도의 패기는 인정해 주기로 했다.
쿠로는 시종을 부르기 위해 매달려 있는 줄을 조용히 당겼다. 지금은 저놈을 구슬려야 할
때다. 뭐든 다 들어주지. 쿠로의 입가에 야비한 미소가 희미하게 자리 잡고 있었다.
***
어?
말이 바뀌었다. 지금까지 벨리타가 타고 연습한 말은 갈색 말이었다. 그런데 다른 말이었
다. 눈부시게 하얀, 대신 조금 몸집이 작은 백마였다.
“오늘부터 이 말이 그대 말이오.”
이 백마가? 이 말을 나한테 주는 건가? 설마… 선물?
“아직 성장 중인 백마요. 연습하다 보면 같이 크겠지.”
당신 실력도. 이 백마의 몸집도.
쿠로의 신수가 삼킨 자신의 애마 백마의 새끼다. 망아지를 벗어나 쑥쑥 자라고 있는 녀석
이었다. 지금 벨리타에게 딱 맞는 크기다. 순하기도 하고. 이번에는 그가 직접 벨리타를 백
마 위에 올려 주었다.
얼떨떨해 있던 벨리타는 말 등 위에 올라앉아서 연신 눈부시게 빛나는 백마의 말갈기를
손을 뻗어 쓰다듬었다. 감촉도 얼마나 부드러운지. 낯선 자신이 탔는데도 백마는 순하게
가만히 서 있었다. 마치 환영하듯이. 마음에 쏙 들었다.
이런 선물을 다 준비하다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