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화 한 번이 어렵지
난 이렇게 불편한데 이 사람은 여기가 편한가?
편하니까 잠이 든 거겠지. 근데 왜 편하지? 원래 벨리타를 싫어하지 않았나?
오만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떠올랐지만 정확한 답은 칼리크만이 알고 있다. 고민해
봤자 소용없다. 생각을 멈춘 벨리타는 그의 품에서 완전히 벗어나 침대 끝으로 살금살금
이동했다.
얼마나 깊게 잠들었는지 그가 미동도 하지 않는다. 그에게서 시선을 돌린 벨리타는 덩그러
니 저쪽에 혼자 놓여 있는 소파를 바라보았다.
그 문제의 나무 문 위에 놓여 있는 무거운 소파를. 자연 얼굴에 싫은 기색이 돌았다. 유모
가 은밀하게 움직여 내일 저곳을 철판으로 아예 봉하기로 했다.
이 넓은 방에 혼자 누워 있었다면 자꾸 신경이 쓰이고 무서운 느낌도 들었을 텐데. 다시 그
에게로 시선을 돌린 벨리타는 조금 떨어져 잠든 칼리크의 얼굴을한동안 쳐다보았다.
이 남자가 여기 있으니 덜 신경이 쓰였다. 나무 문 사건이 없었다면 칼리크가 여기 있는 것
이 마냥 불편하기만 했을 텐데, 지금은 좀 든든하기까지 했다. 살짝 안심이 된 벨리타는 한
숨을 내쉬며 눈을 감았다. 잠을 자려고 눈을 감은 것이 아니라 정신적으로 피곤하니 눈까
지 뻑뻑하게 아파 와 그런 것이다. 그런데 어이없게도 그녀 역시 금세 잠이 들고 말았다.
***
유모는 아침까지 열리지 않는 마마의 방 문을 바라보며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한 번이 어렵지.
폐하가 또 주무시고 가신다. 이렇게 되면 마마 혼자서 관심을 보이는 건 아니라는 소리다.
지금까지 폐하가 황궁에서 다른 여인과 잠을 같이 잤다는 소리는 들어 본 적이 없었다. 전
쟁에 미쳐 있던 폐하는 애초에 황궁에 머무는 때가 별로 없었다.
절대로 그럴 일 없다고, 폐하 같은 분이 여인을 왜 안지 않겠느냐고 생각도 했었다. 그렇게
하신들 하등 문제 될 것이 없었다. 그런데 안지 않으셨다. 폐하 같은 분도 계시다는 걸 알
게 되었을 때 유모는 고개를 갸우뚱거렸었다.
어디가 잘못된 분도 아니고 어떻게 그럴 수 있는지.
아무리 황제의 자리에 오른 높으신 분이지만 그래도 남자다. 그런데 보통 남자들이 할 만
한 짓을 하지 않았다. 그래서 남들과는 다른 분이신가, 그러니 황제 폐하이시고? 아니, 오
히려 하렘을 형성해도 당연할 위치인데 그런 것도 관심이 없으셨다. 그냥 여인을 멀리하셨
다. 오로지 제국 통일만이 관심 대상이라는 걸 한참 지나서 알게 되었다.
그런 분이 드디어 관심을 가지셨다. 여인에게, 그것도 마마님에게. 이번엔 단순 유희가 아
닌 듯 보이는 마마도, 처음으로 여인에게 관심을 가지신 폐하도 어떻게 표현하고 다가가야
하는지 잘 모르시는 듯하다. 어서 보좌관을 만나야겠다.
유모는 신이 난 발걸음으로 바쁘게 황후궁을 나서고 있었다.
***
껌뻑.
눈에 이상한 게 보인다.
껌뻑.
여러 명의 날개를 단 아기 천사 그림이 보인다. 자신의 방 천장에 있는 난해한 무늬가 아니
었다. 서서히 잠이 깬 칼리크는 몇 번 눈을 껌뻑이다 주변을 돌아보았다.
커다란 창으로 아침 햇살이 들어오고 있었고 창가에 놓인 여러 가지 꽃들이 눈에 들어왔
다.
벨리타의 방이다.
여기가.
자신의 방과는 다른 풍경이었지만, 그걸 감상하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결국, 잠들고 말았
다. 끙, 소리와 함께 그는 옆자리에서 여전히 자고 있는 벨리타에게 시선을 돌렸다. 손을
뻗어도 닿지 않을 정도로 멀찍이 떨어져 자고 있는 벨리타의 얼굴이 방금 천장에서 본 아
기 천사의 얼굴과 닮아 보였다.
순수하고 이슬만 먹고 살 것 같은… 아니다.
지금 벨리타의 외모를 칭찬하고 있을 때가 아니다.
여기서 또 잠을 잤다는 것이 더 중요한 문제다.
언제부터 여기서 잠을 잤다고, 그것도 벨리타의 옆에서.
더 환장하는 건 너무 잘 잤다는 것이다. 제 침대에서도 이렇게 푹 잔 적이 없었는데 어떻게
이리 깊게 잠들었는지. 아무 소리도 듣지 못할 정도로 너무 개운하게 잘 잤다. 예민한 칼리
크는 잘 때도 조그만 소리에 금방 깨곤 했다. 황제 자리에 있으니 자연스럽게 몸에 밴 습관
이었다. 그런데…….
이렇게 잘 잤다고?
침대 옆 탁자 위에 놓여 있는 신검도 조용했다. 마치 잠든 것처럼. 위협적인 것이 전혀 없
으니 신검도 저렇게 가만히 있는 거겠지만, 원래 신검이 옆에 있어도 잘 자는 편이 아니었
다. 언제 이렇게 푹 잔 적이 있었는지 기억도 나지 않았다. 꿈도 꾸지 않고 아침까지 아주
잘 잤다. 벨리타만 옆에 있으면 희한한 체험을 하는 것이 신기했다.
느긋하게 방 안을 둘러보던 칼리크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벨리타가 편했다기보다 이 방이
뭔가 아늑하고 안정이 되어서 잠을 깊게 잔 것이다. 같은 3층인데도 느낌이 전혀 달랐다.
카펫 색깔이 달라서 그런지 뭐가 되었건 자신의 방보다는 훨씬 침실다웠다.
찬찬히 둘러보던 그의 시선이 이중으로 된 창문에 머물렀다. 대부분 나무 문으로 되어 있
는데 여긴 특이하게도 대리석으로 만든 창문이었다.
지금은 그 무거운 대리석 창문이 열어젖혀져 있어 햇살이 들어오고 있었다. 창문으로 소리
가 새어 나갈까 봐 대리석 창문을 이중으로 닫는다는 소문을 들은 기억이 났다. 그래도 바
깥으로 음란한 소리가 새어 나가는 건 신경이 쓰였던 모양이다.
흠… 여기가 그 광란의 밤을 보내던 방이란 말이지.
지금은 아무리 훑어봐도 퇴폐적인 분위기를 전혀 느낄 수 없었다. 오히려 정갈한 느낌이었
다. 그것도 신기했다.
그는 시선을 돌려 벨리타의 얼굴을 다시 들여다보기 시작했다. 갑자기 자신한테 다가온 벨
리타의 얼굴을.
처음엔 왜 자신한테 이러느냐고 그녀에게 물었었다. 그런데 지금은 왜 이렇게 즐거운 걸
너무 늦게 알게 해 줬냐고 묻고 싶었다.
이래서 다들 벨리타의 매력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는 건가 보다. 즐거워서. 하지만 자신은
문제없다. 다들 벨리타의 비위를 맞추기 바빴을 텐데 자신에게는 오히려 그녀가 유혹하며
비위를 맞추고 나오니 그런 걱정은 들지 않았다. 벨리타의 유혹 작전을 더 느긋하게 즐길
생각이다.
생각보다 꽤 즐겁다. 덧붙여 오는 새로운 경험도 마음에 들고. 뭐 하나 아쉬울 것 없는 그
였다.
조용히 자고 있던 벨리타가 입술을 오물거리는 것이 그의 눈에 들어왔다. 귀엽게 느껴졌고
이렇게 보고 있을 만하다는 생각과 함께 계속해서 그녀의 얼굴만 들여다보고 있었다는 것
도 깨달았다.
벨리타도 먼저 잠든 자신의 얼굴을 이렇게 들여다보았을까?
당연히 그랬겠지. 관심을 둔 남자의 얼굴을 이때다 싶어 열심히 들여다보았겠지.
얼마나 좋아했을지 알고 싶어졌다. 그런 사소한 것이 알고 싶어지다니 슬쩍 어이가 없어졌
다.
“그런 거 아니거든….”
벨리타가 뭐라 중얼거렸다.
“너… 그러다 큰코다쳐….”
하!
벨리타가 잠꼬대를 또 한다. 버릇이다.
아침부터 실소가 터져 나오게 만든 벨리타를 향해 그는 몸을 일으켰다. 너무 오래 누워 있
어서 그런지 시장기가 돌았다. 눈을 뜨면 바로 일어나 움직였던 자신인데 이렇게 느긋하게
일어나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그는 천천히 벨리타의 얼굴로 손을 뻗었다.
탐스러운 복숭아같이 생긴 그녀의 뺨으로 향하던 손이 허공에서 잠시 멈칫, 멈추었다. 그
러다 이내 아래쪽으로 방향을 바꾸었다. 그녀의 입술을 향해… 그의 손이 천천히 내려갔다.
가만히 쓰다듬어 보며 눈이 은근히 감기던 그는 정신을 차렸다. 두어 번 심호흡을 하고는
자신의 손가락 사이에 그녀의 입술을 끼웠다. 이내 음흉한 미소를 지으며 살짝 비틀었다.
아니 꼬집었다.
아야, 소리를 내며 드디어 벨리타가 눈을 떴다. 처음 눈을 떴을 때 자신이 했던 것과 똑같
이 그녀도 눈을 몇 번 껌뻑거렸다.
“이게 아닌데….”
뭐라 중얼거리며 잠에서 깬 벨리타는 그것이 꿈이었다는 것이 허무했다. 속 시원히 황제에
게 할 말 못 할 말 다 하고 있었는데, 경고까지 하면서 자신 앞에 무릎 꿇은 그를 향해 신
랄하게 비판하고 있었는데. 꿈이었다.
그럼 그렇지. 황제가 어디 무릎을 꿇겠어. 어쩐지 이상하다 했다.
아니지.
지금 꿈 생각을 하고 있을 때가 아니다.
당황한 그녀는 움직이기 싫은 고개를 억지로 돌렸다. 그를 향해.
모로 누워 저를 빤히 보고 있는 황제와 눈이 마주쳤다. 그렇다고 굿 모닝, 인사를 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 그저 어색했다.
지난번에는 먼저 일어나 그가 돌아가 주는 바람에 편히 늦게까지 잘 수 있었는데 오늘은
왜?
입술이 살짝 시큰거렸다.
설마. 자고 있는데 키…스? 그 바람에 깬 건가? 이 음흉한 황제 같으니….
“틀렸어. 더 이상 생각 안 하는 게 좋을 거요.”
“뭘…요?”
제 생각을 읽었나 싶어 좀 뜨끔하긴 했다. 설마. 독심술사도 아니고. 그래도 저 자신만만한
표정을 보니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키스. 안 했어.”
진짜 독심술이라도 하는 모양이다. 제 생각을 다 읽었다.
무안해진 벨리타는 바로 얼굴이 달아올라 얼른 침대에서 일어나서 저만치로 달아났다. 그
냥 옆에 가까이 누워 있기가 찜찜했다. 어떻게 이젠 제 속마음까지 다 읽을 수 있는지 황제
가 더 위험인물로 보였다.
칼리크는 기분이 좋았다. 눈뜨자마자 이렇게 미소를 지으며 아침을 맞이한 적이 있었나,
없었다. 정확하게 벨리타의 속마음이 읽혀지니 기분이 좋을 수밖에 없었다.
“여기서 같이 먹을까?”
또 뜬금없는 말에 벨리타는 도저히 참을 수 없어 따지고 들었다.
“뭘요?”
“뭐긴. 아침 식사지.”
그냥 아침 공기만 배불리 마시고 가면 안 될까요?
잠까지 자 놓고는 뭘 더 여기 있으려고 하는지 벨리타는 못마땅했다. 자연 그녀의 두 볼이
불만스럽게 슬쩍 부풀어 올랐다.
“조금 있다가 점심때 만나는데요?”
굳이 아침까지 같이 먹을 필요가 있나 싶었다. 그냥 빨리 돌아가 주면 서로 편할 텐데. 침
대까지 차지하고 잤으면 아침에는 빨리 가 주는 것이 예의라고 생각한다.
“그게 뭐?”
말이 안 통한다. 그건 그거고 여기서 내가 아침을 같이 먹겠다는데 뭔 불만이냐고 표정으
로 되묻고 있었다. 그 예의가 황제한테는 해당되는 상식이 아닌가 보다.
후…….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한숨부터 나오다니. 좋은 징조가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