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화 걱정 말고 이리 와
“이번 전쟁을 위해 펠론 왕국은 물자를 지난번보다 세 배를 지원하기로 했습니다. 데상 연
합국과 렉서 왕국은 군사 5만씩, 소닉 왕국은 10만을 약속했습니다.”
데인이 서면으로 끌어낸 복속국들의 조공 내역이었다.
칼리크는 마음에 들지 않았다. 소닉 왕국은 10만인데 데상과 렉서 왕국은 5만? 뻔했다. 세
왕국이 입을 맞춰 5만씩 합의를 봤는데 소닉 왕국이 저 혼자 잘 보이려고 10만으로 올렸
다는 것이. 다른 두 왕국이 이 사실을 알면 게거품을 물겠지만.
“데상, 렉서 왕국에게 군사 15만씩 요구하시오.”
데인이 예의를 갖추고 조용히 물러났다.
카르탄에서 60만. 그렇게 100만 대군을 이끌고 유클로 왕국을 친다. 완벽한 제국을 이루는
것도 목적이지만 단순히 그 이유만으로 전쟁을 일으키려는 것은 아니다.
사막과 닿아 있는 카르탄 영지를 그들이 수도 없이 약탈해 가고 있었다. 그쪽 백성들은 하
루도 빠짐없이 그들의 야욕에 희생당하고 있었다. 시건방지게 감히 내 백성과 영토를 건드
리다니. 반드시 유클로를 응징하고 말 것이다.
순차적으로 통합한 데상 연합국은 상대적으로 인구가 많은 나라임에도 불구하고 렉서 왕
국과 함께 굶는 사람 또한 많은 가난한 나라였다.
귀족들이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썩어 있어서 그 꼴이 났다. 하나 지금은 칼리크의 통치 아래
적어도 굶는 사람은 없어졌다. 또한, 그들 나라의 백성들이 각국으로 흩어져 유용한 인적
자원이 되었다. 옆에서 힘껏 도와주는 데인의 공이 가장 컸다.
칼리크가 꿈꾸는 통일 제국.
이제 유클로 하나만 남았다. 되도록 빨리 끝나야 할 텐데.
여전히 사막을 통과하는 다른 방법은 나오지 않고 있었다. 유일한 통로로 갈 경우, 유클로
왕국 진입 입구가 협곡으로 되어 있어 협곡 사잇길로 군대가 진입했을 때 양쪽에서 공격
이 들어오면 꼼짝없이 그 사이에 갇힌 채 몰살당할 위험에 처한다.
그러니 그 방법으로는 쳐들어갈 수 없다. 이렇게 시간을 질질 끌면 사기 문제도 있고 유클
로 왕국에게 시간을 더 주는 셈이라 방비를 더 강화할 터, 여러모로 불리해진다. 대륙 밖
섬나라인 로카 왕국과 손을 잡으려 할 수도 있었다. 그러니 되도록 빨리 움직여야 한다.
방법. 방법. 방법!
어디서 그 방법이 뚝 떨어지면 좋겠는데.
유클로 왕국에 무사히 입성할 수 있는 방법.
칼리크는 그 생각만 하면 마음이 무거워졌다.
***
다른 날보다 더 피곤한 하루였다. 회의는 길어졌고 승인할 것이 줄을 이었다.
밤이 되자 칼리크는 하던 일에서 잠시 손을 뗐다. 아직 더 할 일이 남았지만 조금은 쉬어야
할 정도로 피곤이 누적되었다.
조금만 쉬고 다시 일해야겠다.
집무실 소파로 다가가 편안히 기대앉은 칼리크는 눈을 감고 휴식을 취했다. 그것도 잠시,
그는 다시 벌떡 일어났다.
안 되겠다. 신선한 공기라도 마시며 기분 전환이나 해야겠다.
밖으로 나온 칼리크는 아무런 망설임 없이 방향을 틀어 벨리타를 찾아갔다. 물론 예고도
없이. 요즘 이것만 한 기분 전환도 없다.
그녀의 계획대로 따라가지 않고 이렇게 허를 찌르면 당황할 거라는 것도 이미 예측한 상
황이다. 그 당황이 보고 싶어 또 들이닥쳤다. 최근 벨리타가 당황하는 걸 본 적이 없어서
좀 밍밍했다. 간이 안 되어 있는 스테이크를 먹는 느낌이라고 할까.
“무슨 일로… 이 시간에….”
좋으면서 저렇게 묻는 벨리타가 그에게서 미소를 끌어냈다. 그런데 이제 이전처럼 그리 놀
라지도 않는다. 자신이 이러는 게 한두 번이 아니어서 벌써 적응을 한 건가? 그건 은근 불
만이었다.
벨리타는 아직 잠옷으로 갈아입기 전이라 전처럼 놀라지는 않았다. 침대에 자려고 누웠다
가 황제가 쳐들어왔을 땐 정말 많이 놀랐었다.
낮에 말 연습할 때 만났는데 왜 지금 또 왔나?
하루에 한 번만 만나면 안 될까요? 라고 말할 수도 없고.
이렇게 쳐들어오면 어딜 또 만지려 들거나 키…스를 하려고…….
그녀는 바로 몸을 사렸다. 하늘이 도와줘서 일단 보류시켰지만 이미 첫날밤도 입에 올린
황제다. 그러니 벨리타는 황제와 거리를 자꾸 두려고 했다.
슬금슬금 뒷걸음질 치며 멀어지고 있는 벨리타의 모습에 칼리크의 눈가가 찌푸려졌다. 지
금 무슨 작전을 펼치는지 모르겠지만 기분이 별로다. 더 안달 나게 하려는 작전인가 본데
그렇다면 또 허를 찔러야겠다.
털썩.
대자로 누워 버렸다. 벨리타의 침대에.
지난번에는 기억에 없었는데 이렇게 누워 보니 상당히 편했다. 푹신하고 아늑하니. 하긴,
황후의 침대이니 이것도 당연한 건가.
그것보다 더 만족스러운 건 이제야 당황하는 벨리타의 모습을 봤다는 것. 막 들어왔을 때
는 보지 못했던 모습을. 이거면 됐다.
사실 이러려고 여기 온 것이 아닌데, 잠시 쉬었다가 다시 집무실로 돌아가야 하는데 지난
번도 그렇고 즉석에서 결정한 행동을 하는 자신이 이상하긴 했다. 하지만 즐겁다. 그거면
되는 거지.
벨리타는 예측할 수 없는 칼리크의 행동에 이번에도 또 놀라고 말았다. 매번 이러니 사람
미치겠다. 이젠 침대에 떡하니 눕기까지. 혼자서 누워 편히 쉬라 하고 잠시 나갔다 올까,
그러면 또 뭐라 하겠지, 이런저런 생각을 하는 벨리타를 향해 칼리크가 짓궂게 미소를 지
었다.
저 미소가 이젠 겁난다. 또 뭘 요구할지. 지난번 시키는 대로 다 하겠다는 말을 아주 알뜰
히도 써먹을 작정인가 보다.
팡팡.
싫어요.
아니나 다를까 칼리크가 옆자리를 손으로 소리 나게 두드리고 있었다. 옆으로 오라는 소리
다.
미쳤어요?
첫날밤 소리나 안 했으면 몰라, 저기에 눕는다면 정말 미친 거다.
“걱정 말고 이리 와.”
싫은데요. 걱정할 건데요. 어디 한두 번 속았어야지.
벨리타는 고개를 저으며 제 의사 표현을 확실히 했다. 순간 칼리크의 얼굴이 사납게 찌푸
려졌다.
“어허. 아무 짓도 안 한다니까.”
오빠 믿지? 이 말이 이어서 들리는 듯했다.
침대에 누워서 남자가 하는 저 말은 무조건 거짓말이다. 그것도 모르는 바보인 줄 아나 본
데 천만의 말씀이다.
벨리타가 계속 멀리 떨어져서 버티고 있자 칼리크는 좀 지루해졌다. 이번에는 당기기가 아
니라 밀기인가? 자꾸 저렇게 나오면 더 괴롭혀야겠다. 애처럼 유치하다 해도 할 수 없다.
자신이 하고 싶다는데.
“오늘은 여기서 자고 가야겠소.”
히익. 숨넘어가는 소리를 들으며 칼리크는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이러니 놀리는 맛이
있어 계속하게 된다.
벨리타는 이 방에 폭탄이 떨어진 것만 같았다. 기겁한 소리를 냈지만 그래도 절대로 안 움
직일 거다. 세상에 믿을 놈 하나 없다.
“데려와라.”
누구한테 하는 소린가 싶어 의아해하던 그녀의 눈에 신검이 위로 떠오르는 것이 보였다.
침대에 들기 전 칼리크가 그 옆 탁자에 풀어놓은 그의 신검이.
뭐…야?
저게 왜 움직여?
한 번도 본 적 없는 신검의 움직임 때문에 벨리타는 이만저만 놀란 게 아니었다. 무슨 SF
영화도 아니고 공중에 저 혼자 둥실 떠서 다가오고 있는 신검이 신기하면서도 무서웠다.
바로 저 신검이 그날, 제 목을 겨눈 검이었다.
어라?
그 신검이 벨리타 앞쪽으로 오는 것이 아니라 뒤쪽으로 움직였다.
기가 막혔다. 무서움도 잠시, 어이가 없었다.
신검이 손잡이 쪽으로 그녀의 등 뒤를 쿡쿡 찌르는 것이었다. 어서 침대로 가라고. 그래서
데려오라고 말한 거였다는 걸 알아차리고는 사람 손도 아닌 신검에 떠밀려 그녀는 침대
쪽으로 한발 한발 다가가야만 했다.
뭐 이런 경우가 다 있어.
그 모습을 모로 누워 즐기듯 바라보고 있는 황제가 그렇게 얄미울 수 없었다. 철딱서니 없
는 장난을 치고 그걸 즐기는 악동의 모습 그대로였다. 정말 가지가지 한다. 신검도 그렇다.
뭐 이런 일까지 하는 건지. 벨리타는 고개를 돌려 저를 찔러 대는 신검을 째려보았다.
네가 그러고도 신검이니? 너나 주인이나.
속으로 꿍얼거리던 벨리타는 하는 수없이 침대로 다가갔다. 그리고는 칼리크와 가장 멀리
떨어진 곳에 조심스럽게 누웠다.
“그러다 떨어지겠어.”
스윽.
엄마야.
팔이 닿지 않는 곳에 살며시 누웠건만 몸을 움직여 제 팔을 쑤욱 잡아당겨 기어코 옆에 끌
어 놓는 칼리크 때문에 그녀는 숨을 멈출 정도로 긴장했다.
“미리 말하는데 더 가까워진 후에 거사를 치르자는 당신 말은 지켜 줄 거요. 그러니 안심
하고 같이 잡시다.”
그러더니 모로 누운 칼리크가 두 팔로 그녀를 끌어안았다.
침대에 같이 누운 것도 모자라 그의 품에 꼭 안겨 있게 되자 벨리타의 심장은 사정없이 뛰
기 시작했다. 뭘 기대해서 뛰는 것이 아니라 도망치고 싶어서 뛰고 있었다. 이래도 되나 싶
었다.
정말 잠만 자려는 건가, 아니면 어쩌지?
뭘 어찌해야 하는지 떠오르지 않아 그녀는 조용히 숨죽이고 있었다.
그의 온기가 낯설고 어색했다. 이렇게 침대 안에서 느껴지는 그의 온기는 밖에서 가끔 안
겨 느껴 본 온기와는 조금 달랐다. 어떻게 이러고 잠이 오냐고 속으로 따지던 그녀였는데
그가 자신을 안고 편안히 숨을 고르자 뻣뻣하게 굳어 있던 긴장감이 조금씩 풀리기 시작
했다. 그도 자신이 한 약속은 지키려나 보다. 걱정했던 불상사는 일어나지 않을 것 같았다.
희한하게 잠이 쏟아지는 칼리크는 점점 깊게 잠에 빠져들었다. 제 품 안에 있는 벨리타의
촉감이 자신을 몽롱하게 만들었다. 집무실로 돌아가야 하는데, 여기서 자면 안 되는데, 이
러려고 여기 온 게 아닌데, 여기까지 생각하고는 잠이 들고 말았다.
벨리타는 자신을 안은 그의 팔이 스르르 풀리며 힘이 약해지는 걸 느꼈다.
정말 자나 보네?
그가 깨지 않게 조심조심 품 안에서 빠져나오자 정말로 잠이 든 얼굴이 눈앞에 있었다.
또 자네?
이렇게 잠든 얼굴을 들여다보는 것만도 벌써 세 번째다. 얼마나 피곤했으면 오늘은 이렇게
금방 잠드는 걸까, 그런데 왜 여기 와서 잠을 잘까, 그의 생각을 잘 모르겠다.
각자 침대에서 자면 편할 텐데 일을 왜 이리 어렵게 만드는지. 원작과 다르게 칼리크가 갑
자기 벨리타를 좋아하게 된 건 아닐 거고 왜 매번 이상하게 구는 걸까.
점점 강도가 높아지고. 단순히 놀리거나 괴롭히려고 하는 거라면 이렇게 침대에 같이 눕는
것 말고도 할 것이 많을 텐데 굳이 여기 누워 자는 칼리크의 심중을 알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