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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군에게 찍힌 민폐 황후 입니다-32화 (32/130)

32화 황제한테 꽂힌 건지

“요즘 황후궁에 출입하기가 어려울 텐데요?”

“허락을 요청해도 아예 모두 거절당한다고 하던데 어떻게?”

“정말로 황후궁에 들어가 보긴 한 겁니까?”

“최근 들어간 사람을 본 적이 없는데…. 벽을 기어서 올라가지 않는 이상 무리일 텐데요.”

긴가민가하면서도 두 공작의 말투에는 여전히 비웃음이 깔려 있었다.

발츠 때처럼 퍽이나, 하면서 비꼬는 건 알아줬다. 상대가 누가 되었건 나머지 두 사람은 이

때다 싶어 마구 갈구었다. 세 공작은, 지금은 뭉쳐 있긴 하나 서로 대공 자리를 노리고 있

었기에 쿠로 브누아 대공 앞에서는 은근 서로를 깎아내리는 것이 몸에 배어 있었다.

“다 방법이 있습니다.”

벽을 기어서 올라간 것은 아니지만 벽 속에 감춰진 비밀 통로로 올라간 것이니 조금은 맞

췄다.

“어젯밤 누구 아들과는 달리 아주 환대를 해 주셨습니다. 아주 특별한 시간을 가졌지요.”

쿠로는 조용히 침을 꼴딱 삼켰다. 정말인가? 이게 사실이라면 에무르에 이어 또 한 번 제

대로 뒤통수를 맞는 셈이다. 쿠로는 늘 그렇듯이 가면을 쓴 채 지금 제 속마음을 완벽하게

숨겼다.

아들 발츠의 일 때문에 옌슨 공작의 얼굴은 순식간에 돌 씹은 표정이 되었다.

산티노 공작은 더더욱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제가 황후마마에게 특별한 존재인가 봅니다. 저는 바로 방으로 직진했답니다.”

물론 비밀 통로로 직진했지만. 이들은 그가 말하지 않는 이상 알 턱이 없다.

산티노 가문은 원래 황궁 토목 공사로 부를 쌓은 집안이었다. 그러니 대대로 내려오는 황

궁 설계도에 비밀 통로까지 소상히 아는 사람은 그 한 명뿐이었다. 절대 비밀이니 비밀 통

로이고.

역시나, 두 공작의 얼굴이 싹 변했다. 찍어 누르려 했는데 오히려 역으로 당했다는 얼굴.

그러게 상대도 되지 않으면서 어디서 까불어!

산티노 공작의 얼굴은 더욱더 의기양양해졌다.

“그럼… 왜 그렇게 홀딱 젖어서….”

이런 개같은 하인들을 봤나.

각자 첩자를 다 심어 놓은 탓에 이들 셋은 서로에 대해 거의 모르는 게 없었다. 두 공작은

들개들처럼 한번 문 것을 여간해서 놓지 않으려는 듯했다. 어지간히도 이가 갈리는 모양이

었다. 산티노 공작은 아주 여유로운 표정을 지으며 제 속마음을 위장했다.

“황후마마께서 목욕을 하시던 중이시라 저를 그만 욕조로 끌어들이는 바람에….”

하하하. 멋쩍은 듯 웃음소리도 이쯤에서 터트려 주었다. 다들 놀라면서도 얼굴이 벌게져

가는 걸 산티노 공작은 즐기면서 들여다보았다.

무슨 일이 벌어졌을까 상상하느라 벌게진 것이 아니라 자기들 뜻대로 되지 않으니 속이

쓰려 벌게진 것이다.

황후가 별 해괴한 방법으로 남자들과 즐긴다는 건 알 만한 사람은 다 안다. 그러니 더 이상

꼬투리 잡아 물고 늘어질 수도 없을 것이다. 감히 황후에게 가 확인하지도 못할 테니까. 아

주 고소하다.

산티노 공작의 얼굴에 승리자의 표정이 점점 짙게 묻어 나오고 있었다. 하지만 그 표정을

바라보는 쿠로의 눈빛은 점점 가늘어지며 매서워졌다.

***

“살이 좀 찐 것 같은데.”

숙녀에게 무슨 그리 실례되는 말을.

벨리타는 말타기 연습을 하러 가는 중 황제가 던진 말에 눈이 새초롬해졌다. 같이 식사하

면서 너무 잘 먹은 것이 눈에 띈 모양이다. 그렇다고 면전에다 저런 말을 쉽게 던지다니,

어째 요즘 잠잠하다 했다.

“요즘 아주 편한가?”

여전히 벨리타로 사는 것이 불편했다. 물론 그래도 처음보다는 마음이 조금 편해진 건 사

실이다. 어젯밤 남자 하나가 쳐들어온 것만 빼면.

“이제 겨우 떨어지지 않고 여길 한 바퀴 돌 수 있어서 여간 다행인 게 아니오.”

비꼬는 데도 선수다.

얼마나 삭신 쑤셔 가며 연습한 건데 ‘겨우’라고 비하하다니.

그래도 이 정도도 만족스러우니 맘 넓은 자신이 참아 주기로 했다. 애도 아니고. 맨날 비웃

기나 하고 말이야.

벨리타는 입을 삐죽거리면서도 혼자서 말을 타고 넓은 정원을 천천히 한 바퀴 돌았다. 아

직 달리는 건 무리였다. 말을 조금만 빨리 몰아도 멀미가 났다. 칼리크처럼 그렇게 바람을

가르며 쌩쌩 언제 달려 보나. 그것 하나만은 부럽긴 했다.

어… 어?

잘 걷던 말이 갑자기 머리를 흔들며 푸드덕거렸다. 겁을 집어먹은 벨리타의 몸이 말 위에

서 균형을 잃고 기울었다.

털썩.

땅으로 발이 떨어졌다……

……가 아니라 황제의 품 안으로 쏙 떨어졌다.

얼른 달려와 받아 준 황제가 고맙긴 했다. 이럴 때 보면 친절하게까지 느껴진다. 혀는 날카

로운데 하는 행동은 가끔씩 이런다.

왜 자꾸 잘해 주지?

무슨 꿍꿍이가 또 있는 건가?

그의 도움으로 다시 말 위에 똑바로 앉은 벨리타는 슬쩍 눈을 흘겼다.

“조금 더… 순한 말로 타야 할까 봐요.”

이 말이 특별히 거친 편은 아닌데 그렇다고 순한 것도 아니었다.

칼리크는 오늘도 속으로 피식 웃었다. 이렇게 잘 타다가 슬쩍 미끄러지며 제 품에 안기는

것이 한두 번이 아니다. 전처럼 말을 잘 타는 듯하면서도 말이다. 자신이 받아 줄 걸 알고

있는 벨리타의 작전이다.

누가 모를 줄 알고.

뭐, 이러고 싶다는데 딱히 말릴 이유도 없다. 제 뜻대로 전개되는 이런 상황을 즐기는 성향

이라는 걸 새로 알게 되었으니 장단은 맞춰 줄 생각이다. 다가왔다가 멀어졌다가, 이런 걸

재미있어하는 것 같다. 그래도 안톤하고 생각이 일치하는 것 하나. 정말로 처음 말을 타는

사람처럼 군다. 그게 연기라도 정말 열심히도 한다.

게다가 남들보다 더 더디게 느는 실력. 이건 잘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저 슬쩍 안기고 싶

었다면 말 타는 것보다 덜 고생하는 방법도 많이 있다.

이렇게 사람 헷갈리게 하는 게 벨리타의 작전인가? 궁금해서 계속 생각하게 만들려는.

어찌 되었건 자신과 붙어 있으려는 속내가 여전히 다 읽혀 황제는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

었다.

***

“이렇게 저만 몰래 초대해 주시다니 이 은총을 어찌 갚아야 할지요.”

쿠로 브누아 대공이 두 공작을 따돌리고 저택에 자신만 부르자 감개무량해진 산티노 공작

은 아부란 아부는 다 떨었다. 그때 최고급 와인도 그렇고 이렇게 되면 대공 자리는 자신의

것이다. 산티노 공작은 대공이 바닥에 기라면 길 준비까지 되어 있었다.

“궁금한 게 있는데 대답만 잘해 주면 될 것 같소.”

“뭐든지 답해 드리겠습니다. 말씀만 하십시오.”

“황후 방에는 어떻게 들어간 거요?”

쿠로는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아무것도 할 수 없을 정도로 그것이 내내 궁금했다.

“이건 저희 가문만이 아는 비밀이라 다른 누구에게도 발설하면 안 되는 사항입니다. 하지

만…….”

산티노 공작은 이 정도로 뭔가 궁금하고 안달이 난 대공의 모습을 본 적이 없어 지금이 기

회라는 걸 알아차렸다.

“그런 사항을 대공님께만 알려 드리겠습니다. 그러니 제 공을 잊으시면 안 됩니다. 약조해

주시겠습니까?”

기회를 놓치지 않는 놈. 알고는 있었지만, 입 안이 씁쓸해지는 대공이었다. 하나 자신 쪽에

서 더 급하니 하는 수 없었다.

“제 마음, 아직도 모르시겠습니까?”

생각 같으면 이놈도 다른 두 놈도 다 내쳐 버리고 싶은 쿠로다. 하지만 지금은 잘 구슬려

정보를 얻어야 한다.

흡족한 대답이라 여겼는지 공작은 바로 제 가문의 황궁 설계도에 대해 상세히 털어놓았다.

그러자 쿠로의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렇게 황궁 밖으로 통하는 피신용 비밀 통로가 딱 하나 있지요. 그건 저만 아는 겁니다.”

이런 어마어마한 정보를 혼자만 알고 있었다? 이 괘씸한.

“왜 그런 걸 지금까지 비밀로 한 거요? 나한테까지.”

바로 산티노 공작의 자신만만하던 표정에 금이 갔다. 이런. 이렇게 흘러가면 안 되는데.

“중요할 때 말씀드리려고 했습니다. 지금처럼요. 대공님께는 제가 뭘 비밀로 할 것이 있겠

습니까? 제 것이 모두 대공님의 것입니다.”

바로 납작 엎드려 기었다. 황제로 올라가시고 그 자리는 제게 주십시오, 메시지를 풀풀 풍

기며.

쿠로는 더 큰 과업을 위해 지금은 넘어가기로 했다.

“고맙소. 그런데 황후와 무슨 이야기를 나누었습니까?”

사실 이것이 더 궁금했다. 황후가 산티노 공작과 만난 적이 있었던가? 제 기억으로는 단

한 번도 없다. 정력에 좋다는 음식은 죄다 구해 먹고 있다는 소리는 들었는데 그게 황후 때

문이었나.

“그게… 별 이야기는 없었고….”

산티노 공작은 당황함을 감추고는 다시 머리를 마구 굴리기 시작했다. 아까 두 공작 앞에

서는 일부러 거들먹거렸다. 황후와 나눈 대화를 그들에게 말했다간 그 쪽팔림은 감당이 되

지 않았다. 하지만…….

“저희가 말은 거의… 하하하… 나눌 시간이 없었습니다.”

사실이었지만 이 말은 다르게 해석할 수도 있는 말이었다. 산티노 공작은 대공에게는 사실

을 털어놓기로 마음먹었다. 이 대공은 거짓을 잡아내는 데는 도가 텄다. 잘못하면 신뢰를

잃고 만다. 쪽팔림은 이것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다. 눈 한번 질끈 감으면 그만이다.

“사실은… 황후와 여러 번 정을 통했습니다만 어제는 황후를 만나긴 만났는데 요즘 에무르

한테 꽂힌 건지, 황제한테 꽂힌 건지 저를 내치더군요. 변덕을 부리는 거지요.”

쿠로는 그런 비밀 통로를 통해 겨우 이런 것하고 놀아난 벨리타에게 오만 정이 다 떨어졌

다. 게다가 자신의 일등 공신하고 여자를 공유했다는 것이 기가 막힐 노릇이었다.

그러나 중요한 정보 하나를 얻었으니 용서할 생각이다. 그래도 산티노 공작은 황제 앞에서

나서 줘, 이렇게 정보까지 알려 줘, 그나마 쓸모있는 편이었다.

어차피 벨리타와는 재미없었다. 요구 사항만 많고. 저만 위해 달라 하고. 자신의 비위를 맞

춰 줄 여자는 많다. 쿠로는 너그럽게 용서해 주는 척, 공작이 기분 좋아할 만한 미소, 신뢰

에 가득 찬 미소를 띠며 제 속마음을 잘 숨겨 버렸다. 하지만 속은 부글부글 끓었다.

망할 벨리타! 은밀하게라도 부를 줄 알았더니 나까지 쳐내!

에무르와 도망친 것도 모자라 우연히 스쳐 지나갈 때도 남 보듯이 쳐다봤다.

괘씸한 계집 같으니라고. 주고받은 계약을 잊지 않았을 텐데 그렇게 뻔뻔하게 나온다 이거

지!

가서 따지고 싶어도 황후궁 안으로 아예 들어가질 못하니 환장할 노릇이었다. 저한테도 이

러는 걸 보니 계획을 수정해야겠다. 그것보다 더 급한 일부터 해결하고. 설계도라… 쿠로의

미소는 점점 만족스럽게 변해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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