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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군에게 찍힌 민폐 황후 입니다-31화 (31/130)

31화 우리만의 비밀 통로

살금살금 그쪽으로 걸어가는 벨리타는 바짝 긴장했다.

똑똑똑.

이제 제 발밑에서 그 소리가 정확히 들려왔다. 두꺼운 카펫 위에 서 있는 그녀의 발밑이 그

소리와 함께 살짝 진동했다. 벨리타는 가만히 몸을 낮춰 귀를 바닥에 대고 다시 기다렸다.

똑똑똑.

-마마. 이것 좀 열어 주세요. 약속한 대로 제가 왔어요.

앗.

분명히 들렸다. 작은 목소리였지만 정확히 들었다. 그녀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이건 또 뭐지?

***

잠시 후, 일단 두꺼운 카펫을 돌돌 말아 바닥이 드러나게 했다. 그러자 가로세로 50cm 정

도의 정사각형 작은 문이 있었다. 아래층으로 통하는 듯한, 한 사람 정도 드나들 수 있는

크기의 나무 문이었다.

이게 다 뭐야.

지금까지 이런 게 있을 거라곤 상상도 하지 못했다. 황후 방 바닥에 이런 나무 문이 있다

니, 게다가 이 아래 사람이 있고.

그냥 안 열어 주면 된다. 열어 줬다가 이상한 놈이 튀어 들어오면 어떻게 하려고. 그러나

벨리타는 고개를 돌려 창 쪽에 서 있는 든든한 이를 바라보고는 용기를 냈다.

도대체 누구지? 누군데 이 시간에 황후 방에 몰래 들어오려 하는 거지?

계속 문 두드리는 소리가 거슬려 그녀는 조심스럽게 문을 들어 젖혔다.

삐걱… 소리가 날 줄 알았는데 조용히 잘 열렸다. 이런다는 건 지금이 처음이 아니라는 말

이다. 그러나 더 이상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었다. 바로 남자의 정수리가 보이자마자 바짝

긴장했다.

바닥의 나무 문이 열리자 바로 그 남자의 두 손이 모서리에 올려졌다. 그렇게 힘을 주어 위

로 올라오려는 행동임을 알고 벨리타는 반사적으로 얼른 움직였다. 인정사정없이 발로 남

자의 손가락을 아작 내듯이 세게 밟아 버렸다.

윽.

아픔 때문인지, 그녀가 이럴 줄 몰랐기 때문인지 놀란 남자가 얼굴을 들었다.

앗. 이… 남자는?

벨리타는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남자의 얼굴을 내려다보았다.

얼굴이 눈에 익었다. 아! 지난번 지나가다 만났던 그 마통단 멤버 중 하나였다. 이름은 정

확히 모르겠다. 다만 얄미운 듯한 얇은 콧수염과 느끼했던 눈빛만은 기억한다.

“마마?”

남자는 벨리타의 뜻밖의 행동에 당황한 채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고개를 갸웃거리던 그는

벨리타의 사나운 표정을 보며 이제야 감을 잡았다.

“제가 좀 늦어서 서운하셨군요? 죄송합니다.”

누가 뭘 서운해해?

“다른 사람들은 황후궁 안으로 들어가기가 거의 불가능하다고 투덜거리더군요.”

당연하다. 허락받은 남자들 외에 다 출입 금지다. 약속이 이미 돼 있던 발칙한 발츠 이후로

는 귀족들 요청도 다 거절하고 있다. 예외는 없다. 그러니 당신 같은 사람은 절대 못 들어

오지.

“저야 우리만의 비밀 통로를 이용하면 되니 그런 말은 신경 쓰지 않았습니다.”

우리만의 비밀 통로….

놀람과 당혹감이 한 차례 지나가자 의문만 가득 남았다. 이런 곳이 있다는 것도 처음 알았

고 왜 있는지도, 어떻게 사용했는지도 의문투성이였다. 아니, 이런 식으로 사용하던 비밀

통로였던 건가? 얼마나 자주 이용했던 걸까? 이렇게 쥐 새끼처럼 아무나 마음대로 드나들

수 있다는 게 위험스러워 보였다.

“이 통로, 누가 또 아나요?”

“알긴요. 전에도 알려 드렸듯이 저만 알고 마마님만 아십니다. 아무도 모릅니다.”

그럼 이 남자만 드나들었다는 말이다. 사실일까?

“매달 만나는 이날만을 고대하며 얼마나 손꼽아 기다렸는지. 애가 타서 죽는 줄 알았습니

다.”

매달 만나?

설마.

에이 설마.

나이가 스무 살은 더 차이 나게 보이는데….

“제가 나이는 좀 있지만, 힘이 장사라 젊은이들보다 더 낫다는 마마님의 칭찬에 몸 둘 바

를 모르겠습니다. 오늘도 믿고 맡겨 주십시오.”

설마가 아니었다.

이 미친 벨리타. 벨리타의 남자들을 숱하게 만나면서 그녀의 취향을 알 것 같다 여겼는데

빙산의 일각이었다. 그냥 아무 남자면 다 좋았던 거다. 나이건 지위건 아무 신경도 안 썼다

는 말이다.

유혹하는 여자나 거기에 응하는 남자나. 이 더러운 세상.

벨리타는 두 사람 다 너무나 한심했다.

후….

한숨만이 길게 새어 나왔다. 마통단의 이 사람까지 벨리타의 남자였다니. 아니, 남자면 가

리지 않고 다 좋아했던 벨리타였다니. 한심하다 못해 화가 나기 시작했다.

“뭘 믿고 맡겨요!”

게다가 이 마통단 남자는 황제의 적이다. 적에게도 손을 뻗다니 이건 미친 거다.

원래 벨리타에게도 이 남자에게도 화가 나 그녀는 사나운 눈빛을 던졌다. 한쪽 귀에 붕대

를 붙인 이 남자 또한 제정신이 아니다. 분명 처자식도 있을 텐데.

“마마. 올라가게 해 주세요. 오늘도 지난달처럼 뜨거운 밤을…….”

또다시 삐죽, 손가락이 모서리로 올라왔다. 그녀는 옆 탁자에 놓여 있던 화병을 얼른 집어

들었다. 그리고는 그 안에 있던 물을 가차 없이 그에게 쏟아부었다.

촤악.

윽.

산티노 공작은 갑자기 쏟아진 물에 홀딱 젖은 생쥐 꼴이 된 채 황당한 표정으로 벨리타를

올려다보았다.

황후가 왜 이러는 거지? 나한테까지?

“마마?”

왜 이러는지 모르겠다는 남자의 황망한 표정을 더 이상 지켜볼 이유가 없었다.

“유모!”

다다다다.

만일의 사태를 대비해 검을 들고 창 쪽에 숨어 벨리타의 호출만 기다리고 있던 유모가 달

려왔다.

“산티노 공작! 얻다 대고 우리 마마님한테!!!”

검을 위협적으로 든 유모가 한바탕 뭐라 뭐라 쏟아 냈다.

이 사람이 산티노 공작이구나. 이름값 한다. 싼티노.

목소리도 행동도 싼 티가 팍팍 난다.

“싼티노 공작! 나머지 한쪽 귀도 다치고 싶은가 보죠?”

벨리타는 밥이나 먹고 이런 짓은 하는지, 라고 말하려다 그만두었다. 공작씩이나 되니 밥

은 잘 먹고 다닐 거다. 저 입에 들어가는 밥이 다 아까울 정도였다.

“폐하의 귀에 들어가게 해 줄까요?”

히익. 숨넘어가는 소리가 바로 터져 나왔다.

그렇게 되면 한쪽 귀가 아니라 제 목이 날아간다. 산티노 공작은 어이없음과 두려움에 몸

을 부르르 떨며 이상하게 구는 벨리타의 얼굴과 검을 높이 쳐들고 있는 유모의 얼굴을 번

갈아 쳐다보았다. 함정인가? 그렇다면 여기서 빠져나가야 한다.

“마마께서 절 먼저 유혹하시지 않았습니까? 그래서 달마다 찾아오고 있는데 뭐가 잘못되

었습니까?”

갑자기 목소리와 표정이 확 바뀌었다. 공작으로서 체통을 지키려고 지금 개구멍을 파고 있

다. 도망칠 개구멍. 머리 하나는 재빨리 돌아가는 놈이다. 황제에게 말해 보았자 자신은 이

렇게 주장할 거다, 선포하고 있다. 원래 문란했던 벨리타에게 죄를 뒤집어씌우겠다는 말이

다.

“어디 폐하께 말씀해 보시지요.”

제 뜻대로 되지 않으니 이렇게 변할 수도 있나 보다. 서늘하고 계략적인 눈매로 돌아간 산

티노 공작이 오히려 큰소리로 협박을 하고 나왔다. 이렇게 권력과 지위를 이용해 얼마나

터무니없는 협박과 간계를 꾸며 왔을까. 하지만 그건 공작보다 지위가 낮은 사람에게나 해

당되는 수법이다.

난 황후다.

고로 당신보다 위다.

유모 말마따나 얻다 대고!!!

유모도 있고, 사실 문밖에 황후궁을 지키는 기사들도 와 있었다.

이 상황에서 원래 벨리타라면 뭐라 했을까.

“당신 같은 남자 질렸으니 다신 얼씬도 하지 마. 여기도 당장 봉해 버릴 테니까.”

쾅.

아얏.

사납게 닫아 버린 나무 문에 정수리를 찧었나 보다. 그것참 고소하다.

“휴… 얼마나 긴장했는지 손에 땀이 다 났어요. 그나저나 이게 다 뭐래요? 이런 문이 여기

왜 있어요?”

유모도 모르는 비밀 문인가 보다.

“아니? 저 몰래 이런 문으로 저런 놈을 만나고 있었던 거예요? 마마님이 뭐가 아쉬워 저런

놈을…… 아니, 누굴 만나셔도 저에게까지 비밀로 하시다니.”

유모가 한바탕 잔소리를 늘어놓고 있었지만 벨리타의 귀에는 들어오지 않았다.

정말로 저 남자 한 명만 여기로 드나들었던 건지, 그건 확실하지 않다. 확실한 건 저 남자

가 여기를 통해 들어와 벨리타와 정을 통했다는 사실이다. 생각만 해도 끔찍해 그녀는 눈

을 질끈 감아 버렸다. 여간 찝찝한 게 아니었다.

“마마. 기사들은 저 인간이 지껄이는 걸 듣지 못했을 거예요. 그러니 비밀로 하심이 좋을

것 같아요. 이제야 폐하와 가까워지려 하는데 이런 말이 귀에 들어가면 마마님께 이로울

것이 없습니다. 시종이나 하인도 아니고 귀족 중에서도 하필 산티노 공작이잖아요.”

인정.

저 싼티 나는 것이 벨리타를 모함하는 건 식은 죽 먹기다. 워낙 행실이 나빴던 벨리타였으

니까.

나무 문을 단단히 걸어 잠근 벨리타는 유모와 힘을 합쳐 작은 소파 하나를 끌고 와 그 위

에 올려놓았다. 이래야 조금이라도 마음이 편할 것 같았다. 조만간 서둘러 여기부터 봉해

야겠다. 아예 철판으로 막아 버리면 아무도 못 들어오겠지.

다시 침대에 누운 벨리타의 눈은 자연스럽게 그리로 향했다. 나무 문이 있던, 싼티 나는 것

이 머리를 비죽 들이밀었던 곳으로.

어휴…….

그저 한숨만 연거푸 나올 뿐이었다.

***

다음 날, 마통단이 모이자마자 입이 근질근질했는지 두 공작이 산티노 공작에게 점잖음을

가장한 비웃음을 던졌다.

“어젯밤 늦게 돌아오셨나 봅니다. 밤늦게 지나가는 마차를 본 사람이 있더군요.”

“가만. 지난달도 이맘때쯤 밤늦게 어딜 갔다 왔다 하지 않았습니까?”

그런 쓸데없는 것까지 기억하고 있다니. 산티노 공작의 표정은 가히 좋지 않았다.

“우리 말고 누구를 그리 은밀히 만나는 건지 대공님 앞에서 밝혀야 하지 않겠습니까?”

대공 앞에서 두 공작은 자신이 마치 뭔가 다른 일을 은밀히 꾸미고 있다는 듯한 뉘앙스로

계속 지껄였다. 자신을 깎아내리려는 기회로 삼나 본데 어림없다. 너희들은 나보다 한 수

아래다.

“일이 좀 있었지요. 아주 특별한 일이요.”

“무슨 특별한 일인지 매우 궁금하군요.”

산티노 공작은 얇은 콧수염을 손으로 쓸어내리며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대답해 주었다.

“황후마마를 만나 뵙고 왔지요.”

확실히 그 말이 효과가 있었는지 두 공작은 물론이고 조용히 앉아 있던 쿠로 브누아 대공

까지 몸을 앞으로 내밀며 관심을 보였다.

지금까지야 비밀을 지켰지만, 어제 그렇게 내쳐졌는데 숨길 이유가 없다. 이제 자신한테

흥미가 떨어졌다고 큰소리까지 쳤지 않는가. 그러니 이제는 황후와의 관계를 유리한 쪽으

로 이용하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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