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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군에게 찍힌 민폐 황후 입니다-30화 (30/130)

30화 달라져도 너무 달라졌다

황제는 혼자 피식 웃으며 눈을 감고 약초 향이 올라오는 온천물에 몸을 더 깊숙이 담갔다.

그때.

웅웅.

“누구냐.”

날카롭게 빛을 발하며 옆을 지키던 신검이 울림과 동시에 그 역시 수상한 인기척을 감지

해 조용히 물었다. 이곳에 다른 사람이 들어올 수도 없는데 침입했다는 건 위험한 상황이

다.

하지만 놀라지 않았다. 위협적인 냄새가 나지 않았고 신검도 옆에 있어 그는 감았던 눈을

뜨지도 않은 채 조용히 물었다. 하지만 충분히 상대방의 발걸음을 멈추게 할 정도로 위엄

있는 목소리였다.

“폐하….”

여자의 목소리.

순간 떠오른 생각. 귀찮다.

“무슨 일이냐.”

사라락.

그는 옷이 스치는 소리에 할 수 없이 억지로 눈을 떴다. 역시나 예상한 그대로의 상황이었

다. 육감적인 몸매를 드러낸 시녀가 거의 옷을 걸치지 않은 채 조심스럽게 다가오고 있었

다.

“폐하… 제가 폐하의 목욕을 돕게 하소서.”

그다음에 더 중요한 것이 있다는 식으로 들렸다. 간도 크다. 이런 강행을 결심했다는 것이.

잘못하면 죽을 수도 있다.

시녀가 또 한 발짝 움직이자 공기를 가르는 소리가 들렸다.

쉬익.

아악!

아직 죽이지도 않았는데 비명 소리가 터져 나왔다. 늘 봐 왔던 대로 신검의 칼끝이 시녀의

목에 닿아 있었다. 황제의 명령만 기다리듯 흔들림 없이.

시녀들이라 그런가, 신검에 대해 들었긴 해도 어떻게 활약하는지는 모르는 모양이다. 본

적이 없을 테니 그렇겠지만.

“시종장!”

쩌렁쩌렁한 그의 목소리가 울려 퍼지자 득달같이 시종장이 달려 들어오다 허걱 놀라 그

자리에서 멈추었다.

“가둬라.”

뒤이어 들어온 병사들의 손에 잡혀 과감하지만 무모했던 시녀는 즉시 끌려 나갔다. 바로

수습이 되었지만, 황제 앞에 시종장은 무릎을 꿇었다.

“안 하던 짓을 한 이유!”

분명 이유가 있을 것이다. 저 시녀가 여기로 들어올 수 있었던 이유.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저 시녀가 달려와 황…후 마마의 급한 전갈을 가져왔다고 했습니다.

어서 전해야 한다고. 저의 불충이옵니다. 죽여 주시옵소서.”

사지를 떨며 읍소하는 시종장을 황제는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요즘 자주 전갈이 오고 가니

그렇게 속아 넘어간 모양이다. 그래도 항상 벨리타의 유모가 보좌관하고만 전갈을 주고받

았지 다른 시녀가 움직인 적은 없었다. 그것을 잊고 함부로 판단해 황제를 위험에 빠트릴

수도 있는 일을 저질렀다는 건 용서할 수 없는 일이다.

“보안을 강화해라.”

네?

시종장은 목이 달아나지 않은 것에 놀라 번쩍 고개를 들었지만, 목소리는 내지 못했다.

“한 번뿐이다. 이런 실수는.”

바로 엎드리며 감격해 하는 시종장을 물린 황제는 느긋하게 뜨끈한 온천물에 몸을 맡겼다.

그 시녀는 운이 좋았다. 황제는 성스럽게까지 여기는 온천탕을 피바다로 만들기 싫어 신검

을 거둔 것뿐이었다.

지금까지 황제에게 후사가 없고 황후와도 서로 등 돌리고 있으니 저렇게 나오는 시녀가

심심찮게 나오고 있었다.

임신이라도 해 비어 있는 황비 자리를 꿰차고 싶어 발칙한 생각을 한다만, 성공한 예는 단

한 번도 없었다. 황제는 귀찮고 피곤한 건 딱 질색이었다. 특히 치정에 얽힌 문제들은. 예

전에도 머릿속에는 통일밖에 없었지만 지금도마찬가지다.

겨우 한 명. 현재 흥미를 불러일으키는 여인은 벨리타뿐이다. 다른 누구도 아닌 황후인데

이제라도 가까워지든 뭘 하든 아무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러니 굳이 다른 여인은 필요 없

다.

이 소문은 황궁 안으로 빠르게 퍼져 나갔다.

황후궁에도.

안 되겠다. 어서 빨리 두 분을 더 가까이 붙여 놓아야 저런 것들이 안 꼬이지.

유모는 그 소식을 듣고는 주먹을 불끈 쥐었다.

자신이 권한 대로 두 분이 매일 말을 타는 건 좋았다. 게다가 두 분이 한 말을 같이 타기까

지 하셨다니 더할 나위 없었다. 그런데 말 타는 연습을 폐하께서 도와주신다고 해 이상했

다. 아주 많이. 마마는 말 타는 걸 배울 필요가 없는데. 아무리 기억을 잃어버리셨다 해도

한두 번 타 보면 몸이 기억해 잘 타실 수 있을 텐데…. 그러다 아! 하고 깨달았다.

마마가 저보다 한 수 위다. 말 탄 지 오래돼서 다시 연습해야 한다고 하면 더 많이 만지고

안길 수 있으니 그렇게 돌리신 거다. 역시. 우리 마마님의 그 비상한 머리는 여기서도 빛을

발한다.

이제 발동을 거신 두 분인 만큼 더 나설 때다.

폐하에게 처음으로 관심을 가지신 마마, 제국 통일밖에 모르시는 폐하.

유모가 보기에 이쪽으로는 두 분 다 문외한이시다.

그러니 팍팍 도와드려야 한다. 뭐가 좋으려나.

유모의 두 눈은 어느 때보다 번쩍번쩍 빛이 나고 있었다.

***

안톤은 죽을 맛이었다. 죽어도 하고 싶지 않은 일을 떠맡았다. 이번에도 말에서 미끄러져

두 발이 닿자마자 주저앉아 버린 황후를 한심한 시선으로 차갑게 바라보고 서 있었다.

감히 황후를 만질 수 없어 떨어지는 걸 보고도 손을 내밀 수 없었다. 아니 솔직해지자. 손

을 내밀지 않았다.

여기서 떨어진다고 죽는 것도 아니다. 황후가 고삐를 잡고 있으니 미끄러져도 두 발이 땅

에 닿을 거고. 차라리 말이 달려 나가지 못하게 제압하고 있는 것이 크게 다치지 않게 하는

길이다.

지금 몇 번째인지 모르겠다. 이만하면 포기할 만하건만, 또 올라타고 또 올라타 걷고. 무한

반복이다. 황후가 이렇게 끈기 있는 사람이었나?

황제와 마찬가지로 안톤 역시 황후가 말을 잘 타는 사람이라는 걸 알고 있다. 그러나 직접

눈으로 보고 있으니 진짜로 처음 타는 사람 같았다. 알다가도 모를 일이었다.

황제 폐하가 안 계시는데도 저렇게 열심히 하는 건 뭘까?

저런 모습은 폐하께 잘 보이려고 하는 것이라 여겼는데 그 생각을 황후가 뒤집어 놓았다.

만약 신입 기사가 저 정도로 열심히 연습한다면 그 싹을 알아보고 눈여겨 지켜볼 것이다.

그런데 그걸 이 황후가 하고 있다. 자신이 끔찍이도 싫어하는 황후가. 약간 혼란스럽긴 했

다. 황후가 제 앞에서 이럴 이유가 하나도 없기 때문이다.

조금 전, 폐하 대신 자신이 나타나자 실망하는 기색이 역력해 역시 오늘 연습은 그만두려

나 보다 확신했다.

그러면 더 좋았다. 사실 기대하고 있었다. 그런데 뭐 할 수 없지, 하더니 계속 연습을 하는

것이었다. 그것도 폐하와 있을 때보다 더 오래. 이러니 미치겠다. 황후가 왜 이러는지 몰라

미치겠다. 달라졌다 소문이 나 익히 알고는 있지만 이렇게 두 눈으로 직접 확인해 보니 그

소문이 오히려 약했다.

달라져도 너무 달라졌다.

그래도 잘 판단해야 한다. 속지 말고.

황후는 사람 속이고 갖고 노는 게 취미인 사람이다.

땀까지 흘려 가며 연습하는 황후의 모습을 바라보는 안톤의 시선은 혼란스러우면서도 싸

늘하게 식어 있었다.

***

힘겨운 시간을 보낸 안톤은 폐하 앞이라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황후마마께서 정말 말을 못 타시는 분처럼 보였습니다.”

“나도 안다.”

“그런데 너무 열심히 연습하셔서 혼란스럽습니다.”

내 앞에서도 그랬지.

“수고했다. 안톤.”

불만스러울 텐데도 전혀 표 내지 않고 돌아서서 나가는 안톤을 바라보며 황제는 떨떠름했

다. 데인과 급한 일을 처리해야 해서 오늘만 안톤을 대신 내보냈는데 이렇게 오랫동안 벨

리타가 연습했다는 것이 신경이 쓰였다.

[낯선 사람한테 배우라고 할까 봐 조금 걱정은 했어요.]

[무슨 걱정?]

[아무래도 불편하잖아요.]

바로 이틀 전 이렇게 말했었다. 불편하다고.

자신 외에는 다 불편하다는 듯이 말해 놓고 계속 연습을 했다?

황제는 안톤을 내보내면 벨리타가 연습을 하지 않을 거라 확신했다. 하지만 오랫동안 안톤

이 돌아오지 않자 의아해했다. 기어코 연습을 한 건가 본데 오히려 자신하고 할 때보다 더

오래 했다.

자신한테 잘 보이고 괜히 안기려고 하는 연습인데 안톤하고도 했다?

사람 헷갈리게 하는 덴 으뜸이다.

콕 집어 뭐라 할 건 없는데도 황제의 기분은 별로 좋지 않았다.

안톤은 건드리지 마라.

안톤이 얼마나 황후를 싫어하는지 어느 정도 알게 된 황제는 더 이상 그를 곤란하게 하는

일은 하지 않기로 했다. 더할 나위 없이 소중한 자신의 충신이다. 내일은 자신이 해야겠다

고, 다시는 안톤을 내보내지 않겠다고 결심하는 황제였다.

***

“오늘은 왜 이렇게 오래 하셨어요?”

욕조에 몸을 담근 마마의 몸을 닦아 드리며 유모는 애써 참아 왔다는 듯이 물었다.

“오늘은 폐하가 아니셨다면서요.”

“응. 그래서 더 할 수 있었어요.”

그래도 이만큼 시간이 흘렀으니 유모가 목욕을 돕는 것은 허락할 수 있었다. 몇 번 하다 보

니 적응도 되고 더 가까워졌다.

“왜요?”

폐하도 안 계시는데 무슨 이유로 더 해요?

“폐하는 바쁘셔서 금방 끝나야 했거든요. 그런데 이번엔 세드릭 경이어서 더 오래 할 수

있었어요.”

유모의 고개가 바로 기울어졌다.

이건 또 어떻게 해석해야 하나.

혹시… 그새.

“마마. 내일은 누구와 연습을 하실 거예요?”

“당연히 폐하죠. 왜요?”

순진한 얼굴로 되묻는 마마의 얼굴을 한참을 들여다보며 유모는 제 생각이 틀리기를 바랐

다. 당연히 아직은 폐하다.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유모는 향기 나는 주머니로 마마의 몸을

살살 문질러 주었다.

***

똑똑똑.

여기저기 관절이 다 아파 침대에 누워서도 끙끙대는 벨리타의 귀에 문 두드리는 둔탁한

소리가 들려왔다. 유모인가? 왜 자지 않고 이 늦은 시간에.

벨리타는 대답을 했다. 그러나 문을 열고 들어오는 사람은 없었다.

잘못 들었나?

다시 두 눈을 감고 누운 벨리타는 빨리 늘지 않는 제 말 타는 실력에 한숨을 폭 내쉬었다.

운동 신경 제로였던 것이 여기서도 똑같다니.

똑똑똑.

분명 그 소리가 또 들려왔다. 벨리타는 이상한 생각에 억지로 여기저기 저린 몸을 일으켰

다. 왜 안 들어오고 내가 나가게 만들까, 하며 넓은 방을 가로질러 걸어갔다.

똑똑똑.

어?

문 쪽에서 나는 소리가 아니었다. 문에 거의 다 다다랐는데 그녀의 뒤에서 그 소리가 들려

왔다.

뭐지?

벨리타는 방 한가운데로 돌아와서 다시 소리가 들리기만을 기다렸다. 귀를 쫑긋하고.

똑똑똑.

아! 저쪽 벽, 의상실로 들어가는 근처에서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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